2016-0504.다보라이온스클럽 정순철 지대위원장 향수 전시회(삼성동 코엑스)
기른 情(키운정)
기른 情(키운정)
@신정하(1680~1715)
“유모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옥선(玉僊)이다.
을유년 모월 모일에 태어나 갑신년 9월 모일에 죽었으니 향년은 60이다.
옛날 나의 어머니 정경부인 조씨가 임종할 때
한 아이가 아직 어렸기에 여종 중에서 젖이 나오고 성실하고 신중하여
걱정 없이 보육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아이를 맡기려 하였다.
그리고 유모 만한 이가 없다고 여겨
마침내 울면서 아이를 잘 키워달라고 명했고
유모도 울면서 명을 받들었다.
그 아이가 바로 나 정하(靖夏)다. …중략… 나는 성장하면서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유모는 등불 뒤에 앉아 듣다가 간혹 기름을 더 넣거나
재 속의 불씨를 쑤석여 독서를 도와주곤 했다.
이름이 조금 알려지자 유모는 내가 어서 당세의 현달한 사람들처럼
공명을 얻기를 매일같이 바랐다.
하지만 나는 몇 번이나 과거에 떨어졌고,
유모는 내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흘러 을유년 겨울 내가 증광시에 급제하여
처음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
유모는 이미 땅에 묻힌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나를 잘 길러달라고 명하셨고,
유모는 온 마음을 다해 나를 보살피고 길렀으나
나는 미처 그 성실함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늘 눈물이 옷을 적신다. …중략… 유모의 무덤은 적성현 모촌 모향 언덕에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봉분이 훼손되어 위치를 알수없게 될까 두려워
뒤늦게 이 글을 지어 무덤 옆에 묻는다.
아! 이것으로 그래도 영원히 떠난 사람의 혼을 위로할 수 있을까.
또한, 나의 이 슬픔을 조금이나마 삭일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부모의 사랑을 낳은 정과 기른 정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물론 낳은 부모가 기르기까지 했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낳은 사람과 기른 사람이 다를 때,
예컨대 생활고로 인해 친척이나 기관에 자식을 맡기고 떠나는 경우나
흔치는 않지만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는 경우
우리는 낳은 정이 먼저냐 기른 정이 먼저냐를 묻게 된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어 다른 사람의 아이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남자가 낳은 아이와 기른 아이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진정한 부모로서의 역할과 사랑에 대해 깨달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영화는 비록 허구지만 그 안의 고민과 깨달음의 모습들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의 선택보다
기른 정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쪽으로 생각이 쏠리게 된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에게 있어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진 질문은
애초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본 신정하의 글은 기른 정,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친자식 이상으로 살뜰하게 키워준
유모의 삶과 그에 대한 신정하의 고맙고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
신정하가 3살 되던 해에 생모인 조씨가 세상을 떠났다.
조씨는 아직 어렸던 신정하의 양육을 집안의 종이었던
김옥선에게 부탁했고,
김옥선은 유모로서 몸이 약한 신정하를 친자식 이상의 공을 들여 키웠다
@신정하는 13세 되던 해부터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농암 김창협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김창협에게 그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친자식처럼 키운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유모도 뿌듯했을 것이다.
졸음을 참아가며 앳된 목소리로 책을 읽던 아이가
어느새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이제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명성을 날리고
가문을 빛낼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정하는 연이어 과거에 떨어졌고 그때마다 유모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는 아들의 계속되는 좌절을 바라봐야 했던
안타까움과 혹시나 자신이 못 해준 것이 많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미안함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신정하는 25세 되던 해에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유모는 이미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는 신정하가 눈물을 흘렸다.
유모에 대한 고마움과 살아 있을 때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유모의 혼을 위로하고 자신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삭이고자
이 글을 써서 유모의 무덤 옆에 묻었다.
당시의 그에게는 이것이 유모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었다
@유모에게 그리고 신정하에게
두 사람이 피를 나눈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모에게 신정하는 아들이었고 신정하에게 유모는 어머니였다.
이 글을 보며 다시 한번 영화를 보며 생각했던 것을 떠올린다.
기른 정이란 무엇인가. 부모 자식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고,
안다 해도 몇 마디 말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이 글을 쓴 뒤 신정하는 몇 차례 부침(浮沈) 속에서도
예문관, 성균관, 홍문관 등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 거쳐야 할
청직(淸職)들을 연이어 맡았다.
하지만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한창 정국이 혼란스럽던 1716년에
탄핵을 당해 파직되었고 한 달 뒤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하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너무 일찍 온 아들을 보며 또 눈물을 흘렸을까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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