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0.지역부총재동우회 베트남 하노이 워크숍 1일차
2017-1220.지역부총재동우회 베트남 하노이 워크숍 1일차(12,20~12,24)
정몽주와 邂逅故人 三百盃(해후)
정몽주와 邂逅故人 三百盃(해후)
@邂逅故人 三百盃(해후고인 삼백배)
*사전에 약속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만나 회포를 풀다
“우연하게 만나게 된 친한 친구와 300백 잔의 술을 나누다”
@오경재(청, 과거제도 폐해)의 장편소설에서 유래된 고사이다
.三國志에 관도대전은 적벽대전 못지않은 명 장면이다
.조조는 거대세력인 원소를 꺽는 결정적 전투이다
.원소가 버텼다면 유비~손권은 유명하지 않을수도 있지요
아마 四國志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텐데...
.원소는 친구, 벗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원소는 절강성에서 떠나는 친구를 위해 연회를 열었는데,
신하들에게 한잔씩 받았으니 300잔이었다(하루종일)
@정몽주의 명원루(明遠樓)의 詩에서 邂逅故人 三百盃(해후)가 있다
“풍류를 즐기는 태수는 이천 석의 돈을 쓰고 오랜만에 만난친구 술 삼백 잔은 마신다네...”
.포은 정몽주(고려말)는 忠臣인가 ?
.開城 善竹橋는 忠節, 忠正의 상징이다
;정몽주(21세)는 고려 공민왕(6년,1357년)때 감시합격,
;3회연속 장원(수석합격)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성균관 대사성(이색)과 개혁정치, 성리학 중흥운동을 했다
.丹心歌 :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넔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일편단심 변할줄이 있으랴 !
.이방원에게 철퇴맞아 선죽교에 혈흔이 선명하다
@이성계와 信賴, 政治的 同志, 오랜 친분을 유지해왔는데
.將軍 종사관(戰鬪時)으로 이성계가 後援者역할을 하였고
.이성계의 측근인물로써 창왕추출에 관여, 政治的 實勢였다
.같은 개혁노선 표방,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적권력 宰相의 반열에 올라,
.27세 이성계 동지로 함경도 여진족의 약탈을 축출하고 동북면 道指揮使 한방신의 종사관을 지냈다(從軍)
.元나라와 전투시, 함께 여진족 토벌하고 항상 同行했다
.큰 일에는 매우 침착했다
.우왕 6년 雲峰, 大邱 토벌시 조전원수자격으로 대동 참여하여 대승리하는데 일조했다
@위화도 회군후 실세로 부상하여,
.정도전, 조준과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했으며,
.이성계의 정치기반, 보수세력 무력화, 경제 질서 개혁하고,
.개혁 반대세력 동료귀향(이색, 권근, 이숭인, 하륜)을 방관
@왜 朝鮮 開國을 反對했을까 ?
.이미 高麗國의 終末을 예견했는데..우왕, 창왕 폐하는데 찬성한후 공양왕쪽으로 돌아섰다
.정도전, 조준이 政敵을 무자비한 숙청, 정국여론이 악화됨
@공양왕은 高麗中興을 위해 손잡자고 정몽주에게 제의했다
.이성계를 꺽으면 實權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이성계축출을 위해 歸鄕한 이색, 이숭인을 復權시키고
.정도전, 조준을 歸鄕시킬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성계의 落馬(負傷)소식을 듣고 죽이려 했던것이다
.王의 허락만 남았는데, 공양왕은 이성계의 반격이 두려워 決定的 순간마다 決心을 못하고 있었다
@非常手段을 수립, 病問安 핑계로 前方으로 가던중이었다
.이성계의 태도 여하를 보고 제거하려고..
.말등에서 “이성계는 별로 염려할 인물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방원에게 射殺된 것이다
@최영將軍은 북쪽여진族 정벌중에 공양왕을 배경삼아 실세, 權力을 목전에 두고 비명에 숨졌다
.이성계는 “우리가 고려를 지키자”면서 최영에게 다짐했으나, 약속을 배반하고, 최영을 실각시킨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daum blog "늘빛사랑 조흥식"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