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9.드림라이온스클럽 조직총회
*가이딩: 유연식 부총장(한마음LC), 김미영 여성부위원장(선덕LC)
*스폰서클럽: 선덕LC(회장 조성근L), 초대회장: 김연숙
*면신례(免新禮)의 폐단
면신례(免新禮)의 폐단
@약천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사대부가 출신(出身)하여 군주를 섬기는 것은 이익을 얻고 녹봉을
받기 위한 계책만은 아니니 선배들이 후배들을 처음 맞이할 때는 읍하고
겸양하며 자리에 오르게 하여 예우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 세상 풍속이 저속하고 투박해지다 보니 여러 관청에 처음
배속된 관원이 있으면 벌례(罰禮) 또는 면신(免新)이라는 명목으로 술과
고기를 요구합니다.
그러고는 모여서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는데, 어떻게든 음식의
가짓수와 그릇 수를 더욱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요구하려고 힘을 씁니다.
처음 관청에 들어왔을 때 그로 인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도
정작 후배가 들어오면 자신이 당했던 일을 또 후배에게 반복하곤 합니다.
사관(四館 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승문원)과 내삼청(內三廳)에 이런
병폐가 가장 극심하지만 미루어 올라가면 그렇지 않은곳이 없습니다
심지어 술과 고깃값으로 銀子와 布를 대신 바치는 경우까지 있으니,
이 어찌 벼슬아치들의 수치가 아니겠으며, 더러운 습속이 아니겠습니까.
사대부들이 이런 짓을 하기 때문에 서리(胥吏)와 하인배들도 잘못된
관행을 따라 해서 그 폐단이 끝이 없으니, 탐오한 풍속이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관행이
오래되어 당연하게 여기고 괴이하게 생각할 줄을 모르니,
만약 단호하게 금하지 않는다면 묵은 폐단을 씻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서울 안의 여러 관청에 새로 들어온 관원에 대한 면신례나 벌례 등의
일을 일체 금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뇌물을 받은 죄로 논하여
예의와 겸양의 풍속을 일으키소서”
@1664년(현종5) 대사간 남구만이 관원의 면신례를 금지를 청한 글이다.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 벼슬에 임명되어 처음 출사(出仕)하는 사람을
‘신래(新來)’라고 하였는데, 신래가 실질적으로 해당 관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윗글에서 말한 면신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신입 관원이 선배 관원들에게 행하는 일종의 신고식과 같은 것이다.
처음 만나는 선후배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해당 관료 집단의 화목을
도울 수 있는 일종의 통과 의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성을 띠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동반하었다.
@성종 성현(成俔)은 새로 문과에 등과한 선비의
지나친 호기(豪氣)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려는 데서
면신례가 나오게 되었다고 그 유래를 분석하였다.
처음 벼슬하는 사람의 오만방자함을 막고 선후배의 위상을 엄격히해서
조직생활에 순응하게 하려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율곡(李珥)은 고려말 부패한 科擧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였다.
즉 과거 제도가 부패하여 젖내 나는 귀족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선배들이 나이 어린 급제자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것이 면신례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면신례가 서열과 위계를 중시하는 관료 집단에서
선배가 신입 관원을 길들이는 도구로 이용된 것은 분명하다.
이를 명분으로 새로 출사하는 관원에게 참기 어려운 모욕과 학대를
가하였던 데서 ‘신래침학(新來侵虐)’ 또는 ‘신래불림’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새로 배속된 관원에게 진귀한 음식을 강요하고,
흡족하지 않을경우에 한달이 넘도록 동좌(同坐)를 허락하지 않는가 하면,
기악(妓樂)을 갖춘 술자리를 요구하여 파산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어렵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선비가 겪어야 했던
굴욕과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이런 관행은 대과 급제자외에도 하급 무관이나 하례들까지 파급되었고,
그 폐단이 도를 넘어 국가에서 금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래 침탈을 금지하는 규정이 經國大典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못된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 시대에 줄곧
제기되는데, 윗글을 지은 남구만은 20년 후인 숙종 때도 병조 판서로서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였으니 면신례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고질적인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관료 사회에 저급한 관행이 사라지지 않았던것은 무엇 때문일까?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기존 집단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다 치더라도,
자신이 선배가 된뒤에 의지만 있다면 잘못된 관행을 단절시킬수 있었다.
그런데도 부당한 관행을 답습하여 후배를 길들이려 했던 것은
내가 당했던 고통을 누군가에게 되갚아 주려는 보상심리였을까?
아니면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관행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어
버린 것일까?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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