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5-0510.제2지역 해단식(강화도,석모도) *이현주 지역부총재
박제가 요리하다
박제가 요리하다
@일성록(정조17년 1793)
의금부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형원(李亨元)이 조사하여 보고한 장계를
보면 전 부여 현감(扶餘縣監) 박제가(朴齊家)는 작은 고을에서 무상으로
진휼할 기민(饑民)을 1200여 명이나 뽑았으니, 꽤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떠돌며 걸식하게 된 사실을 그 고을 아전의 진술에서
숨길 수 없었으니 수령으로서 이들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 죄를
용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환곡(還穀)을 전용(轉用)한 일이 비록 진휼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마침내는 입본(立本)하게 되었으니,
요리(料理)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
이로써 법률을 적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조 17년에 박제가가 진휼 결과를 감찰하는 암행어사에게 적발된 뒤
의금부에서 사실관계를 조사하고서 그에게 요리한 죄를 적용하도록
청하는 문건이다
‘요리’라고 하면 요즘 TV 곳곳에 나오는 ‘요리하는 남자’들의 쿡방이
먼저 떠오를 텐데, 이렇게 음식과 관련되어 이 말이 쓰인 것은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한자 어휘로 ‘상황에 맞추어 요량껏 처리한다’는 뜻으로
주로 쓰였다.
조선의 역사 문헌에서도 전기에는 군사나 재정 등의 책임자에게 재량권을 주고
상황에 맞추어 잘 처리하도록 할 때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 말을 썼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이후에는 국가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진 가운데
관원들이 요리를 통해 각종 재원을 마련해 나가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편법과 불법이 만연해져 그 의미가 부정적으로 변해 갔다
특히 지방 수령들은 가뭄과 기근이 잦아지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진휼할 재원을 자비(自備)하고 연말마다 보고해야 했으므로 수익을 얻기
위해 관고(官庫)의 재물이라도 손을 댔다.
그중 가장 손쉬운 요리 대상이 유상으로 진휼하기 위해 비축해 둔
환곡이었다.
환곡은 해마다 절반은 보릿고개 때 식량과 종자로 쓰도록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뒤 추수 후에 10%의 모곡(耗穀)을 붙여
상환받고 절반은 창고에 남겨 두도록 되어 있었는데,
각 고을에 보관되어 있지만 엄연히 국가의 통제를 받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공곡(公穀)이었다.
그러나 비축분으로 더해야 할 모곡을 전용하여 팔거나 환곡을 곡물대신
돈으로 주고받아 곡가(穀價) 차익을 남기는 방법등으로 종잣돈을 만들고
나서 백성들에게 높은 이자로 빚을 놓았으니 이것이 입본(立本)이다.
수익을 진휼 등에 다 해도 분명 불법이었으며 수령이나 아전이 그 과정에서
착복하는 일까지 적잖이 벌어지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마침내 경종 2년(1722)에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이런 행위는
‘빚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백성들의 처지를 악용한 착취’라 규정하고
건의한 데 따라, 대명률의 나이출납률(那移出納律)을 적용해
최고 장(杖) 100대와 유(流) 3000리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70년이 지난 이때는 요리 행위가 이미 현실적으로 관행화되어
착복한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이 법이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정조가 의금부의 문건에 대해 다음날 비답을 내린다
“진휼 재원의 마련을 명분으로 공곡에 손을 댄 것은 엄히 징계해야
마땅하나, 암행어사들이 다른 수령은 한 명도 요리한 죄를 적용하도록
청하지 않고 오직 힘없는 서얼만 이처럼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진휼 재원을 자체적으로 마련한 수령들에게 일일이 이 법을 적용하기
어려운데, 막중한 어제 문제(御製文字)를 다루는 검서관으로 수년간
노고한 사람에게만 어찌 꼭 적용한단 말인가.
다른 죄인처럼 관원 이력만 모두 무효화하고 풀어 주라.”
정조의 옹호로 중벌을 피한 박제가는 이미 연경(燕京)에
여러 차례 다녀와 북학의(北學議)를 짓고
‘열가구 사는 마을에 하루 두끼 먹는 집이 몇 없는’ 현실을 통탄한바 있다.
그리고 나라의 세력가들이 명에 사로잡혀 도외시하고 있는
청나라의 발달된 농기구와 경작법을 도입하여 생산력을 높이면
국부(國富)를 증대시켜 해결할 수 있다고 제시한 터였다.
그러나 수령으로 처음 부임한 부여에서 당장의 심각한 현실을 목도하고는
여느 수령들처럼 요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서툰 솜씨로 인해 기민의 진휼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 채
1년도 되지 않아 파직되고 이런 곤경까지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다시 정조 21년에 경기의 영평(永平) 현령이 되고
한 번 재임되어 정조가 승하한 해까지 3년간 재직하였다.
그동안 농업 개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2년 11월 전국에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이 내린 데 따라
정식으로 북학의와 상소를 올려 수령으로서 체험한 현실을 말하고
국가적 농업 개혁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정조는 이미 수원 화성에서 수리시설을 갖추고 둔전을 시범 경영하는 등
농업 개혁에 나선 뒤 전국적인 확대를 염두에 두고 윤음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년여 만에 승하하고 박제가도 해임되면서
그들의 꿈은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관행과 불법 사이를 오가던 수령의 요리.
그래서 ‘어떤 대상을 능숙하게 처리함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
요리의 뜻풀이가 국어사전에 남게 된 듯하다.
여기에는 조선 후기 백성들의 고단함과 수령들의 고뇌, 현실을 개혁하려
했던 인물들의 꿈이 한데 교차되어 있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354-C지구(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0515.서구라이온스클럽 창립 제2주년 기념식 (0) | 2023.03.19 |
---|---|
2015-0512.뉴은평라이온스클럽 창립 11주년 기념식 (0) | 2023.03.19 |
2015-0507.강북라이온스클럽 창립 제19주년 기념식 (0) | 2023.03.13 |
2015-0505.대만 300-D1 자매지구 공식방한 5일차 (0) | 2023.03.13 |
2015-0503.대만 300-D1 자매지구 공식방한 3일차 (0) | 2023.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