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4.동도라이온스클럽 방문(온누리클럽 초대회장 유차옥)
조국의 독립(三義士合傳)
조국의 독립(三義士合傳)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삼의사합전(三義士合傳)
석주유고(石洲) 태사씨(太史氏)는 말한다.
지금 세 사람의 행적을 읽은 사람 중에 혹자는 그들이 일을 비밀스럽게
꾀하지 못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혹자는 적 하나를 없애면서 세 사람을 잃게 되었다며
애석해 하기도 하겠지만, 이는 모두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은 독립하는 일이 급속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알았다.
또 일이 급속히 이루어질 수 없다면 예비하는 것뿐인데,
예비하려면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야 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려면 해악을 없애야 하고,
해악을 없애려면 목숨이라도 버려야 함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이른바 살신성인한 사람들이며, 죽고 사는 데 마음 쓰지 않은 사람들이다
살아서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없다면 살아도 영광스러울 것이 없고,
죽어서 국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죽어도 슬퍼할 것이 없다 여겼으니,
이른바 용사(勇士)는 제 목숨 잃을 각오로 임한다는 것이다.
의(義)란 마땅함이다.
마땅히 없애야 해서 없애면서 그 공을 따지지 않았고 마땅히 죽어야 해서
죽으면서 그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바로 의사(義士)라 할 수 있도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이
67세인 1924년 당시 만저우(滿洲)에서 순국한 의사 김만수(金萬秀)
최병호(崔炳鎬), 유기동(柳基東) 세 분의 행적을 기록하고
마무리로 붙인 사론이다. 그 행적을 요약하면 이렇다
“김만수 의사는 경상도 출생으로,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는 만저우로 가서 1918년 이상룡 선생이
지린성의 화뎬(樺甸)에서 모집한 농병(農兵)으로 들어온 뒤
1922년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헌병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최병호 의사는 강원도 출생으로, 어려서 만저우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하였고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역시 서로군정서의 헌병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유기동 의사는 경상도 출생으로,
어려서 만저우로 건너가 1920년 흥업단(興業團)에 투신하여 활동하였고
1922년부터 화뎬으로 와서 김만수와 함께 활동하다가
이듬해 하얼빈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24년 4월 7일, 세 의사는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의 순사부장
쿠니요시 세에보(國吉精保) 등이 독립군들을 함부로 해친다는
정보를 듣고 이들을 없애기 위해 하얼빈의 여관 동발잔(同發棧)에 모여 밤새 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경(日警)에게 발각되어 밤 12시에 쿠니요시가
10여 명의 일경을 데려와 이들이 투숙한 방을 에워싸게 하는 한편,
중국의 빈지앙 진사(濱江鎭使)와 도윤(道尹)에게 뇌물을 써서
참모장(參謀長)을 특파하여 步騎兵들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김만수 의사가 먼저 문을 열고 당당히 서서
큰소리로 “나는 한국의 독립군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적(日敵)과
사생결단 하고자 하니, 중국 군민(軍民)에게는
결코 상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라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쿠니요시가 일경을 데리고 공격하려는 것을 김만수 의사가 먼저 총을 쏴 쿠니요시의 흉부에 관통시켰다.
이에 놀란 적들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빈지앙 진사가 육군 1소대를 더 파견하고
한 사람에 300원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도록 하였다.
8일 저녁부터 500여 발의 총탄을 난사하면서 공격해 댔고,
9일 날이 밝자 지붕에 구멍을 내어 폭탄 대여섯 개를 던져 넣고
사방에서 총탄을 퍼부어 끝내 담장을 무너뜨렸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 의사는 이미 가슴에
자결한 총흔을 남긴 채 피를 흘리며 땅에 엎어져 있었다.
유해는 만저우의 한국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이 일로 지린성장(吉林省長)이 빈지앙 진사를 꾸짖으며
“외국인의 요청으로 병사를 함부로 출동시켜 죄명이 분명치 않은
자기 영내의 사람을 대신 체포하려 한 것은 큰 잘못이다.
이후로 정치적 범죄와 관련해서는 만저우에 와 있는 한국 사람을 체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각계에서도 빈지앙 진사와 도윤을 여지없이 논박하였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비견되는
업적이라 하며 그들의 장렬함을 칭송하였다.
@세 의사의 행적은 이상룡 선생의 이 글 덕분에 후대에까지
자세히 전해지게 되었으니, 선생은 안동 출생의 정통 유학자로
구국을 위한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그 한계를 깨닫고
50살이 넘은 나이에 만저우로 건너가 독립군의 기지 개척과 무장투쟁에 헌신하였다.
세 의사는 그런 선생과 뜻을 함께하며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나이에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았으니,
그 뜻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생이기에 이러한 사론을 남겼던 것이다.
이 의거로 독립군을 괴롭히던 일본 순사부장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만저우의 독립군 활동을 확장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주권 잃은 조국을 떠나 타국 땅에서 일경뿐만 아니라
중국 군대의 공격까지 받아야 했던 처절하고 절박한 상황은 너무도 가슴 아픈 역사이다.
@이상룡 선생과 세 의사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진정 이러한 분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으로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뒤늦게나마 이상룡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고
1990년 유해를 모셔와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하였으나,
세 의사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을 뿐
유해의 송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필자는 세 의사의 성함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주변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국가보훈처 사이트의 ‘나라사랑광장’에 독립유공자들의 공훈록이
실려 있으니 한 번씩 들어가 추모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그리고 남북 분단 속에 여전히 열세인 주변국과의 관계를 벗어나
주도적인 외교를 펼치는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그 후손인 우리가
지금 마땅히 예비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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