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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C지구(서울)

2015-1120.신생클럽 합동헌장 전수식

by 조흥식 2023. 4. 2.

2015-1120.신생클럽 합동헌장 전수식(권동선총재)

귀머거리 사회개혁가(유수원)

 

 

귀머거리 사회개혁가(유수원)

@승정원일기(영조13)

대개 우리나라 사람이 문장을 지을 때는 옛날 유학자들의 말을

이리저리 모아서 공교함을 구하는데 지나지 않는데,

이 사람은 모두 자기 뱃속에서 나온 말을 썼으니 참으로 귀하다 하겠다.

더욱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으니, 나는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행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애당초 말도 하지 않는데,

이 사람은 그것을 말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글로 적기까지 하였으니,

이 점은 실로 나보다 낫다

 

@윗글에서 말하는 주체는 영조(英祖)이고,

영조가 자신보다 낫다고 칭찬한 인물은 우서(迂書)를 편찬한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이다.

유수원은 대대로 관인을 배출한 문화유씨(文化柳氏) 집안사람으로  25세에 과거에 합격한 엘리트였다.

30, 사헌부 정언 당시 재상인 조태구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후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10여년을 지방 수령으로 떠돌았다.

이때 병을 앓아 귀가 안 들리게 되어 요즘으로 말하면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농암(聾巖), 농객(聾客)이란 호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유수원은 울울한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가슴속에 품은 생각을

책으로 썼는데, 그것이 당시 조정 관원들에게까지 읽힐 정도로 널리 알려져

영조 주변의 고위 관원들이 너도나도 그를 추천하였다.

단양군수 유수원이 비록 귀는 먹었으나 문장을 잘합니다.

책을 한권 지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을 논한 것입니다.

헛되이 늙는 것이 아깝습니다.”

신 역시 그 책을 보았는데, 책 이름을 우서라 합니다.

주장과 논변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우서는 개인의 시문(詩文)을 다룬 문집이 아니다.

77항목으로 된 문답(問答) 형식의 저술로,

앞의 6항목은 서론, 중간의 69항목은 본론,

마지막 2개 항목은 결론에 해당하는 논문 형식의 저술이다.

그는 당시 국가재정의 고갈을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이를 해결하여 부국안민(富國安民)하려면

···상을 평등한 직업으로 만들어 전문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려면 모든 백성이 가문이나 신분에 구애없이 초등교육을 받게 하고,

양반 관리는 전문적인 관리로 육성하여 정해진 연한에 따라 승진시켜 신분의 안정을 부여하며,

각 관사는 행정의 편의를 위해 업무 편람을 모두 구비하고,

농업에 있어서는 무리한 토지개혁보다는 상업적 경영과 기술의 혁신을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며,

상업에 있어서는 상인 서로 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규모의 확대와 상인이

생산자를 구성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개혁안들이 그다지 신선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당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지고 죽을 때까지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회였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회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확고하게 굳어져 변화를 상상하지도 않던

그런 시대에 자신이 속한 양반 문벌 위주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만인이 함께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개혁안을 제시한 사람, 그가 유수원이었다.

우서의 가장 첫번째 문답은 자신의 저술에 대한 스스로 서글픈 변()이다.

 

@유수원은 영조 31(1755) 525,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에 연루되어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조정을 비난하는 벽보가 나주객사에 붙은것에서 시작된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 즉위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당시 실세인 노론은 이 사건을 역모(逆謀)로 몰면서 반대파인 소론을 일망타진하는 계기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소론에 속한 유수원도 처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조는 정식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아니라 대궐 안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궁녀 소생이었다.

정식 후계자인 경종(景宗)이 재위 4년 만에 자식 없이 서거하여 이복 아우인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런 태생적인 한계로 영조는 왕이 되기 전부터 경종 주위의 실세들에게 언제 제거될지 모르는 불안한 시절을 보냈고,

즉위하여서도 언제 그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날지 몰라 늘 마음을 놓지 못했다.

영조는 이미 재위 4년 만에 무신년(1728)의 난으로 우려했던 일을 겪었는데 27년 뒤에 다시 나주괘서 사건이 발생하자,

직접 관련자들을 친국(親鞫)하고 속전속결로 처형하였다.

 

@유수원이 처형된 후 남은 가족은 모두 노비가 되어 흩어졌다.

아직까지 그의 문집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손 중에 아무도 유고를 수습할 수 없는 처지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역적 유수원을 옹호한 죄로 유수원과 하루 사이로 처형된

심악(沈䥃)은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수원이 처형된 것이 흉언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알겠지만,

대역죄로 처형된 것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신은 유수원의 역절(逆節)은 나라를 향한 정성이고,

유수원의 흉언은 대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수원과 함께라면 죽더라도 기쁘겠습니다.”

 

@자신들의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유수원과 그의 동료들의 불행,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던 그들 간의 믿음, 이 모든 것이 오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들이 처형되고 나서 약 150년 뒤인 순종 2(1908)

77인의 죄인을 사면하는 명단에 유수원과 심악의 이름이 포함되었다.

 

@자신들의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유수원과 그의 동료들의 불행,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던 그들 간의 믿음,

이 모든 것이 오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들이 처형되고 나서 약 150년 뒤인 순종 2(1908)

77인의 죄인을 사면하는 명단에 유수원과 심악의 이름이 포함되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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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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