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7.유준근 지역부총재 합동월례회
옥중화해(최명길, 청음 김상헌)
옥중화해(최명길, 청음 김상헌)
@이긍익(1736~1806)
“명길(鳴吉)은 처음에 상헌(尙憲)이 명성을 얻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정승의 천거에서 빼버리기까지 하였으나,
함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가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그의 절의를 믿고 그 마음에 탄복하였다.
상헌도 처음에는 명길을 진회(秦檜)와 다름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뜻을 지키면서 조금도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사람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
@청음 김상헌은 시를 지어,
“마침내 두 대(代) 걸쳐 나눈 교분 다시 찾아서, 평생의 의심 모두 풀어 버렸네.”라고 하였고,
@최명길도 시를 지어,
“그대 마음 굳은 바위 같아서 끝까지 바뀌지 않거니와,
나의 道는 둥근 고리 같아서 일에 따라 변한다네.”라고 하였다.
@병자호란 당시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인물을 들자면
삼전도(三田渡)의 비문을 쓴 이경석(李景奭)과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崔鳴吉)일 것이다.
그들은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했다.
그 반대편엔 척화론을 주장한 김상헌(金尙憲)과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가 있다.
그들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분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었다
@특히 예조 판서 김상헌과 이조 판서 최명길은 청나라에 항복할 때까지
조정에서 그야말로 극한 대립을 하였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척화를 주장한다고 보았고,
김상헌은 최명길을 남송 때 금(金)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진회(秦檜)에
비유하며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으로 몰아세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둘은 그 후 청나라의 심양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함께 감옥살이하는 신세가 되었다.
김상헌은 압송되어 갔고 최명길은 제 발로 찾아갔다.
사실 그들은 병자호란과는 무관한 일로 투옥되었다.
김상헌이 압송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4년이 지난 1641년 1월이고,
최명길은 그 이듬해인 1642년 10월에야 심양에 갔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김상헌은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낙향해 칩거하고 있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반면 최명길의 사연은 다소 복잡하다.
조선이 결국 청나라의 압박에 못 이겨 군대를 출병하게 되었는데,
당시 영의정이던 최명길은 임경업(林慶業)의 심복인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밀사로 보내 조선이 부득이하게 참전하게 된 사실을 알리고
명나라와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게 하였다.
이 일이 나중에 청나라에 발각되자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아들 최후량(崔後亮)에게 자신의 장례도구를 지참케 하고 심양으로 떠났다
“나는 영의정으로서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관여해 왔다.
이번 일은 나 혼자 주도한 것이다.
그리고 임경업이 평안 병사로 있었으므로 그에게 배를 마련해 보내도록
한 것이다. 우리 임금께서도 모르는 일이고 신하들도 아는 이가 없다”
@심문을 마치고 그는 감옥에 갇혔다.
1645년 2월에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수행하고 환국할 때까지
두 사람은 같은 감옥에서 2년을 함께 지내게 된다.
이 일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앙금을 풀고 둘 다 나라를 위해
행동한 것임을 서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과 최명길의 지천집(遲川集)에는
2년 동안 그들이 주고받은 시가 100여 편 수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은 그 가운데 두 편의 시를 인용함으로써
그들이 이미 화해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본래 최명길의 집안은 부친 최기남(崔起南, 1559~1619) 때부터 김상헌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
최기남과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었으며,
김상헌은 당시 나이가 어려 함께 배우지는 못했으나
성혼의 신도비명과 성혼 문인들의 비문을 여러 편 지을 만큼
성혼 문하와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양에서 감옥생활이 이러한 두집안 간의 우호 관계까지 회복해 준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정치적 노선의 차이로 경쟁과 대립을 한 인물들이 많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사이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서로 갈라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같은 자리에 함께 앉는 것조차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후손 대대로 원수 집안으로 지내기도 한다.
그 점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함께 감옥 생활을 한 것은
어쩌면 두 사람에게 행운이 아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 노태우와 전두환, 박근혜와 김대중처럼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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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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