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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C지구(서울)

2015-0502.제33차 지구연차대회(총재 우근식)

by 조흥식 2023. 3. 13.

2015-0502.33차 지구연차대회(총재 우근식), 세종대학교 대양홀

*대만 300-D1 자매지구 방한대표단 오찬(건양홀)

*돌아오지 못한 망명객

 

 

 

돌아오지 못한 망명객

@김가진(金嘉鎭 1846~1922) 대동단선언(大同團宣言)

()이 극에 달하면 양()이 나타나고,

꽉막힌 운수가 가면 형통한 운수가 오는것이 자연스러운 하늘의 이치이며,

죽을 처지에 놓이면 살길을 찾고,

오랫동안 굴복하면 일어나려 하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감정이다.

세계개조론과 민족자결주의는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이 자유라는 외침은 세상에 가득하다.

 

이에 31일 독립을 선언하고 410일 정부를 세웠는데,

저 완고한 일본은 시세의 추이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표범과 이리 같은 야만적인 습성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벌여

빈손의 민중을 총살하고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으니,

이것이 인류의 양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 민족의 충성과 열혈은 결코 이처럼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는

압박에 위축될 바가 아니요 더욱더 정의와 인도로 용감히 나아갈 뿐이다.

만일 일본이 끝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1일의 공약에 따라 최후의 1, 최후의 1각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을 불사하고자 이에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라고 하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독립선언은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다.

3.1운동에 앞서 191821일 만주 길림(吉林)에서

해외 독립운동가들에 의한 무오독립선언이 있었고,

뒤이어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3.1운동 이후 설립된 항일 지하조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조선민족대동단19191128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이른바 대동단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이 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은

과거 대한제국의 대신으로서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으로 알려져 있다.

 

@김가진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분신 자결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1대손이다.

壯洞金氏로 일컬어지는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핵심이었다.

판서를 역임한 부친의 뒤를 이어 벼슬길에 오른 김가진은

외교통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주일공사 등을 역임하고,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대한제국 출범 이후로는 농상공부대신, 법무대신을 역임하였다.

건양협회와 독립협회의 창립에 관여하고

대한협회의 회장으로 활약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대한제국의 관료 76인에게 작위를 수여하였다.

김가진 역시 대한제국의 대신을 역임한 인물로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3.1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김사준(金思濬), 김윤식(金允植), 이용직(李容稙) 등 일제의 작위를

받은 이들도 전향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김가진 역시 항일 지하조직 단체인 대동단의 총재로 활약하다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상해로 망명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임시정부에 큰 힘을 실어줄 인사의 망명을 추진하였다.

다름 아닌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었다.

 

@의친왕은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아우로서

황위 계승 서열상 순종의 다음 차례였다.

의친왕의 망명은 대한제국의 계승을 표방한 임시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크게 기여할 것이 분명하였다.

김가진은 비밀리에 의친왕에게 서신을 보내,

소인은 지금 상해로 갈 계획이니 전하도 뒤따라오소서라고 설득하였다.

의친왕은 김가진의 권유를 받아들여 망명을 결심하고

임시정부로 친서를 보냈다.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었다.

 

@191910, 김가진이 먼저 상해로 출발하였다.

그는 아들 김의한과 함께 일산역에서 단동(丹東)행 열차에 올랐다.

무사히 단동에 도착한 김가진 부자는 배를 타고 상해로 이동하였다.

김가진이 망명에 성공하자 의친왕도 뒤를 따랐다.

의친왕은 대동단의 안내로 1110일 수색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경이 수배령을 내리는 바람에

의친왕은 단동에 도착하자마자 붙잡히고 말았다.

의친왕의 망명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대동단은 의친왕의 명의로 위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거국적인 시위운동을 독려하였다.

이에 일제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 대동단은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김가진의 망명과 의친왕의 망명 시도가 지니는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대한제국 황실과 고위 관료들이 합방을 지지했다는

일제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제고되고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김가진은 임시정부로부터 국로(國老)’ 대우를 받았으며,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사임했을 때는 박은식과 함께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김가진은 병마와 가난에 시달린 끝에 77세에 상해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은 임시정부 주석 홍진(洪鎭)의 주관하에 치러졌으며,

안창호(安昌浩)가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그가 광복 사업에 남은 목숨을 바칠 생각으로 상해로 망명하여

조국 독립의 희망을 안고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중도에 세상을 떠났다.”

라고 밝혔다.

김가진이 독립운동에 공헌한 바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김가진의 서훈은 보류되었다.

일제로부터 받은 작위를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김가진은 상해로 망명하기 앞서 총독부에 들러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신고라도 했어야 하는 것일까.

일제는 김가진과 함께 작위를 받은 김사준, 김윤식, 이용직 등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자 모두 재판에 회부하여 징역형에 처하고

관련 법령에 따라 작위를 박탈하였다.

하지만 상해로 망명한 김가진은 재판정에 세울 방도가 없었다.

일제가 김가진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고 동태를 감시하면서도

작위를 박탈하지 못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지배층에 망국의 책임이 없다 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5백 년간 지속한 조선왕조가 아무런 저항 없이

일제에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었다.

의친왕과 김가진 같은 인물들의 존재를 간과한다면,

대한제국의 황실과 고위관료들이 모두 부패하고 무능하여

망국에 이르렀다는 일제의 주장을 인정하는 셈이다.

 

@김가진의 장남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김가진의 유지를 받들어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삼남 김용한은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고,

손자 김석동은 광복군에 가담하였다.

대한제국의 지배층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라 하겠다.

1993, 상해 홍교로(虹橋路)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혀 있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규 등 독립투사 5인의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들과 나란히 묻힌 김가진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김가진의 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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