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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복합지구

2019-0907. 채명철 한의원개업

by 조흥식 2023. 11. 16.

2019-0907. 채명철 한의원개업(우리마을 한의원, 성북구 석관동)

일제시대 밤문화(기생)

 

 

 

 

일제시대 밤문화(기생)

1.유곽· 공창을 도입한 이토 히로부미

@“색계로 한국을 타락시키다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

.일본은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娼妓)문화로 타락시켰다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것이란 계산이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을 많이 했다

.일본식 유곽문화가 기예중심이었고,

.조선의 밤문화는 매춘중심의 하급문화로 전락했다

 

2.공창(公娼)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했다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이 되었다

.1894(청일전쟁),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해군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도착후,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증파되면서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확대된다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화산에 주도한 인물 2명이 있다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진회 송병준(宋秉畯)

 

3.송병준 이야기

@개벽(開闢,1924,천도교발행 종합월간지) “경성의 화류계 기사

.송병준을 색작(色爵), 이토를 색귀(色鬼)라고 표현했다

.송병준이 자작(子爵)작위를 받았고,백작(伯爵)으로 승진(1920)

엽색(獵色)행각에 빗대 색작이라고 비꼰 것이다.

 

@1900, 송병준은 일본인 첩 가쓰오(勝女)를 시켜서

.요릿집 청화정(淸華亭)을 열었고, 개진정(開進亭,1906)으로 확장한다

.요릿집 개진정(충무로2)은 양식메뉴로 친일파 단골 회식장소였다

 

4.주한 일본인들도 이토 히로부미를 풍류 통감으로 불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다

.이토는 육군소장 무라다(村田淳), 해군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출신의 오카네()

표면상으론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였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5.남산동 천진루(天眞樓)를 개업...이토가 통감으로 부임직후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 닛다(新田又兵衛)가 주인이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대장과

무라다(村田淳)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新田)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 (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여자· ,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다

 

6.임종국(밤의 일제 침략사)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

.일제 식민통치에 비판적인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

(日本 統治下朝鮮:1971,번역서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

병합은 그 경과로 보더라도 일본군의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상층의 일부를 매수해서 이루어진 것이 명백하다라고 썻다

.한국상층 일부를 매수하는 방법이 술과 여자였던 것이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고위관료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때마다

.각각 게이샤 1명씩 앉혀 극진하게 대접했다

.경의선 부설권을 얻기위해 내부대신 이재완(李載完:망국후 자작수여)에 거금(5만원)을 준것도

이런 술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임종국(밤의 일제 침략사)1930년 무렵

.한국인은 43700여명에 한 명꼴로 기생이 있었지만,

.일본인은 1400여명에 한 명꼴로 30배 이상 많다고 분석했다

 

7.일본의 공창(公娼)을 허용하는 정책

@조선말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게 된다

.갑오개혁에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관기에서 풀린 기생들이 몸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것이다

 

@기생들의 신분으로 구분하기

일패: 과거의 관기, 몸은 절대 팔지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예인(藝人)이다

이패: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隱君子), 은근짜(慇懃-)이다

.그만큼 몸을 파는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수 있는 창부(娼婦)로써

.가무를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8.기생조합(한성,漢城~다동,茶洞~대정권번~경성권번)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3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일본의 저질 밤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官妓)출신들이 한성(漢城)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이다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다동(茶洞) 기생조합

.송병준이 평양출신의 남편없는 기생들을 주축으로 만든것이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다동 기생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이 된다

 

9.경성권번~한남권번~경화권번(조선권번)

@1929년 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에 수록

.경성권번(1923년 창립)은 자본금 2200원의 합자회사로 등재되어 있다

.사업 목적은 예기(藝妓)의 양성, 유흥업으로 적고 있다

.일제가 공창제도를 버젓이 운영했다는 뜻이다

.경성권번 대표 홍병은(洪炳殷):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사무보던 인물

 

@한남(漢南)권번: ·호남 출신 기생들이 주축있었고

 

@경화(京和)권번: 조선권번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대표 하규일(河奎一)도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감독으로 있던 인물

.송병준을 색작(色爵)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까닭이다

.경화권번은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安淳煥)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이다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통감(警視總監)와카바야시(若林賚藏)2대통감 소네(曾荒助)

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에 안순환은 궁중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상선(尙膳)으로 있을때 이용구·송병준의 일진회 가입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광화문(,일민미술관, 동아일보사)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을 풍미하던 명월관(明月館,1908)이다

 

@서울의 밤 문화는 이토 색귀통감과 송병준 친일색작이 주도하면서

.과거의 기예(技藝)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많았다

 

10.기생 철폐론(한청산, 韓靑山)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동광(東光) 28(1931)에 기고했다

옛날은 관기(官妓)라고 해서 군수,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던

기생이 하루아침에 양반정치가 무너지고 섬건너 양반정치가 된 뒤로

아주 철저히 민중화되어, 이제는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명기(名妓)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되었다고 비난했다

 

@“기생이 없어져도 내외 술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은군자(隱君子)가 있고, 유곽(遊廊)이 있고 무엇이야 없으랴.

그러하나 공공연하게 사회가 허락하는, 요리관 교제만 없애도

우리 사회의 능률이 얼마나 증진되랴면서 기생 철폐론을 주장했다

 

@양반· 쌍놈등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지만 예기중심의 고급문화가

.매춘 위주로 천박해졌다는 문제의식은 맞는 말이었다

 

@경성 화류계는

많은 권번을 일본인 또는 준()일본인이 경영한다.

그의 세력이 화류계에서까지 위대한 것은 참 주목할 일이다라고 했다

.일본인이 조선에 진출후 전개한 사업주류는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이다

 

@술자리 여자가 동석하는 잘못된 밤 문화의 뿌리는 일제잔재이다

.기생들이 3·1운동에 대거 동참한것은 밤문화를 잠식한 일제에 항거이다

 

11.명월관(明月)과 황진이

@명월관(1908), 안순환 개업(, 광화문 동아일보 일민미술관)

.1919년 화재로 종로3(,피카디리 극장)으로 이전하였다

최초 무대공연이 시작된 곳이었다

조선요리 원조 보조간판도 달았다...“원조용어가 등장

.옛땅은 개인소유가 아니었는데, 나중에 동아일보가 매입했다

명월관간판원본을 3만원에 팔랐다(현싯가; 6억원)

.1930년대에는 전국에 명월관이 있어, 흔해졌다

.특히, 일본의 명월관(도쿄)1960년 초기까지 영업했다

.워커힐 호텔 별관, 명월관(明月)은 갈비집이다

 

12.기생의 등장

@조선말기까지 기생으로 칭했으나,

.권번(기생조합)으로 불리웠고, 창기(창녀)는 전혀 달랐다

.평양, 진주 기생이 유명했으며, 1942년 축음기가 등장했다

.샤니생을 배웠으며, 그당시 기둥서방(스폰서)도 존재했다

.4~6인용 한식셑트 메뉴가격은 12(현싯가 24만원?)...

.기생 신분증(자격증?)+식사 영수증도 발부했다

.서서연주하는 북춤(공연)도 최초 시작되었고

.단발. 퍼머...현대식 헤어스타일도 처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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