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4. 분과위원장회 2019년도 송년의 밤(송쉐프, 야리성)
유구(琉球), 정말 미안하오
유구(琉球), 정말 미안하오
@인조시대,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王을 잡아 갔다.
.왕세자가 寶物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달라고
하려 하는데 배가 표류하다가 제주 바닷가 구석에 정박하였다.
.제주 목사 이란(李灤)이 사람을 보내 배안을 정탐하니
산을 덮을 만한 휘장 2부(浮), 술이 샘솟는 돌 1좌(座),
흰 앵무새 1쌍, 수정 알 2매(枚) 등의 보물이 있었다.
휘장은 거미줄로 짜서 약을 칠해 만들었다.
돌은 넓이 한자, 길이 한자 두치, 높이 네자 남짓으로
맑은 물을 담으면 술이 되었다.
앵무새는 왼발의 발톱으로 비파를 켤 수 있었다.
알은 거위 알과 비슷한데 밤에 방안에 두면 햇살처럼 밝은 빛이 났다.
그 나머지는 매우 신비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이란(제주 목사)은 욕심이 났는데, 사자(使者)를 보내 통보하였다
“나에게 술이 샘솟는 돌을 달라.
너희들을 왜에 들어가도록 보내 주겠다”
.세자는 거절하였다
“내가 보물을 아끼는것은 아니지만, 지금 부왕께서 힘없이 붙잡혀
갇혀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부왕을 풀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조국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대부(大夫)는 이를 슬퍼하소서.”
.제주목사의 사자가 3번 갔으나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또 귀국을 간청하고 중요한 보물을 바다에 띄워 보내주니
이란이 수군을 출동시켜 이를 포위하였다.
세자가 붙잡히자 종자 하나가 돌을 안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란은 배 안의 물건을 모두 약탈하고 마침내 세자를 죽였다.
따라 죽은 사람이 열 사람 남짓 되었다.
앵무새도 세자 곁에서 죽었다.
이란이 세자를 죽이고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조정에 아뢰었으나, 사실이 탄로나 이란은 연좌되어 죽을 뻔하였다
@세자는 죽음에 임해 혈서로 시를 지었다.
“요(堯)의 말 믿기 어렵다 하고, 걸(桀)의 옷차림이라
죽음에 임하여 하늘에 호소할 겨를도 없네
세 어진이 순장(殉葬)을 대속(代贖)할 이 누구인가
두 아들 배를 탈 때 도적이 불인(不仁)했도다
모래벌판 해골에 잡초가 얽히리니
이내 혼 고국(古國) 간들 슬퍼할 친지 있을까
제주도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
@유구를 추모하는 詩
“슬프고 슬프구나.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
세상에는 ‘세자가 작은 보물을 아껴 위로 임금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래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족히 일컬을 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또한 지나친 말이다.
이란의 형세를 보건대 보물을 주었어도 죽었고
보물을 주지 않았어도 죽었다.
똑같이 죽는 것인데 하필 보물을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자처럼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명철한 사람이
어찌 차마 보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살면 임금을 맞이할수 있고 나라를 보전할수 있음에랴!
그러나 세자는 반드시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릇 이란의 죄는 3가지이다.
1)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인 것
2)이웃 나라와의 외교를 망가뜨린 것
3)임금을 속인 것
신하가 이 가운데 한가지 죄라도 있으면 마땅히 형을 받아
죽어야 하거늘, 당시 군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포악한 난신(亂臣)이 편안히 복을 누리고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유구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 건너 서쪽을 향해 두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어떤 말로 대답할 것인가?
이란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충분한 일인가?
단지 다행히 유구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 왜놈의 난리 때문에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로부터 유구의 통신사가 끊어졌으니,
아, 이웃 나라에 들려 줄 이야기가 아니다.
을묘년(1795, 정조19) 겨울 유구 사람이 제주에 왔다.
임금께서 특명으로 서울에 부르는데 연로(沿路)에서는 말을 주고
경기 감영에서는 음식을 주었다.
동지사(冬至使) 상국(相國) 김희(金熹)가 사행을 가서
청(淸)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으로 갖추어 말하고
육로로 보내 자기 나라에 가도록 하였다.
아, 성인의 덕이 지극하고 크도다.
무릇 표류해 온 사람이 세 사람이었는데
배가 모두 파손되고 소지한 물건이 없었다.
그 중 공인(公人)은 성이 미정(米政)이고 두 사람은 사공 같았다.
그 나라 임금의 성씨를 물으니 성은 정(正)이라 하였는데
유구 세자때에 이미 왕조가 바뀌었다 한다.”
@1609년, 동아시아에는 바닷길이 3개 열렸다.
1)조선과 일본의 바닷길.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통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
2)네덜란드와 일본의 바닷길. 7년전 동인도 종합상사(VOC)를 설립한
네덜란드는 일본과 무역협정을 체결, 히라도에 무역관을 설치하였다
무역관의 초대 관장 자크 스펙스가 거느린 조선인 수종이
루벤스의 초상화(한복입은 남자)의 진짜 모델이라는 학설도 있다.
3)유구와 일본의 바닷길. 일본 살마(薩摩 사쯔마)의 도진가구(島津家久
시마즈 이에히사)는 유구를 침략해 도읍 수리(首里)를 함락하고
중산왕(中山王) 상령(尙寧)을 포로로 붙잡아 덕천가강(德川家康)에게
데리고 갔다. 유구를 복속시킨 일본은 유구를 이용해하여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획책하였다
@이때부터 제주도 해역이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1627년, 네덜란드 우베르케르크 호의 선원 웰트후레이(박연)는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고,
.1653년, 드 스페르버르 호의 선원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은 운이 좋아 13년만에 극적으로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대부분 한번 조선에 표류되면, 평생동안 조선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래서는 서양인을 처음 만난 조선 사람들의 두려움도 컸겠지만
제주도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공포스런 블랙홀이었다.
.제주도 해역의 악명(예측할수 없는 풍랑)이 자주 일어나고,
한번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면 평생 나오지 못한다는 악명이다
.1613년, 유구 상선이 제주도에서 만난 재난은 끔찍한 재앙이었다.
제주 목사와 제주 판관이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상선을 습격하여
선원을 모두 몰살하고 재화를 모두 강탈한 사건이었다.
.다행히 웰트후레이, 하멜은 제주도에 표류된후 죽이지는 않았다.
.제주 목사도 할 말은 있다.
1613년, 동아시아는 임진왜란 이후 냉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허황된 야망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는 부서졌고,
일본은 임진왜란이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어떤 재앙을 남겼는지,
그리고 차후 어떻게 이웃나라에게 평화를 약속할지에 대해
충분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선과 통상 재개에 합의를 보았으나, 아직 임진왜란 이전의 교린을
회복하지는 못했고, 명나라와 외교통상이 단절된 가운데,
유구의 조공무역에 일본 상인을 끼워넣어 배후에서 명과 통상하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유구의 조공무역이 2년 1공(貢)에서 10년 1공으로
격하되는 철퇴를 맞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상선에 상당수의 일본인 선원이
탑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뜩이나 전란의 기억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더구나 유구를 위장한 일본의 조공무역 시도가 명나라에 발각되어
저지된 상태에서 조선에 매우 위험한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제주 목사의 해적 행위가 정당화 될수 있는것은 아니다.
.유구는 조선이 중국 북경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교린 국가였고,
.임진왜란에 명(明) 만력제(萬曆帝)가 유구와 섬라(暹羅, 타이)의
수군 20만을 동원하여 일본 본토를 공격할것이라는 작전 계획이
선조에게 알려질 정도로 든든한 우방 국가였다.
.조선야담집 “동야휘집”의 “유구국 공주와 결혼한 신희복(愼希復)이야기”
유구는 조선의 민간사회에서 신비롭고 풍요로운 낙토의 이미지로
상상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구 상선이 조선의 제주에서 제주 목사에게
재난을 당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서 이 사건은 조선후기 상당히 충격적인 일로 기억되고 있다
@김려 “유구 왕세자 외전”
.유구 상선에 탑승했던 유구 귀인이 “광해군일기”에서 말하듯
단순한 사신(使臣)인지? “인조실록”에서 말하듯 유구의 왕자인지?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김려가 문제발단의 제주목사를 이란이라고 한 것은
실제 인물 이기빈(李箕賓)을 잘못 기록한 명백한 오류이고
사건의 시기를 인조대라고 했으나 광해군대의 일을 잘못 전한것이다
.그 밖에 산을 덮을 만한 휘장, 술이 샘솟는 돌...
모두 문학적 윤색으로 보이는데 실제 정황을 살펴보면
“광해군일기” 황견사(黃繭絲)와 명주(明珠)와 마노(瑪瑙)였을 것이다
@김려의 논(論) “미안하오, 유구! 정말 미안하오”
.정조시절,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사람을 중국으로 안전하게 보내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치 과거사를 진심으로 사과하는 뜻에서 취해진 조처인 것처럼...
.중요한 것은 “미안함”이다. 그리고 미안함의 역사적 구조이다.
당시 유구와 네덜란드만 재앙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제주도에 명나라 사람들이 표류하면,
조선은 해외 반청운동을 의심하는 청의 강압 때문에
돌아가면 그들이 죽을줄을 알면서도 어쩔수없이 청에 보내야 했다
효종때도 그랬고, 현종때도 그랬다. 살기위해 미안한 일을 일삼았다
춘추대의(春秋大義)가 있었기에 의식을 배반한 존재의 부끄러움을
결코 잊지는 않았다.
역사에 희생된 부끄러운 주체의 윤리적인 재건,
그것이 곧 조선 후기 존화(尊華)의 역사적 함의였다.
@유구 왕세자사건을 전설로 치부해 버리는 박지원의 냉소적인 눈길보다
.이를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선린을 추구하는 김려의 따뜻한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
.현재 동아시아에 필요한것은 이러한 “미안함”의 지성사적 전통들을
서로 공유하고, 그 위에서 진정한 선린에 이르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미안함’의 역사학, 근사하지 않을까?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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