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7. 회장동우회 2020년도 신년교례회(파노라마, 청춘열차 인사동)
춘천 의암 1905년,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하다
춘천 의암 1905년,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하다
@유인석 (柳麟錫 1842~1915) 의암집(毅菴集)
*중국에 가는 백경원을 보낸다(송백경원입중국 送白景源入中國)
지나간 미래처럼 흥미로운 것도 없다.
한사람의 인생사는 끊임없이 삶의 갈림길에서 무언가를 선택해 온
이야기이다. 그의 경험은 그가 선택한 것으로 짜여진 것이지만
그의 기대는 그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경험만 알아서는 안 된다.
기대를 알아야 한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나간 미래로 남아 있는,
사실(fact)이 아닌 반사실(counterfact)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흥미진진한 가상의 세계에 푹 빠져 새로운 리얼리티를 추구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이성계의 고려군이 위화도를 넘어 요동에 들어갔다면?
만약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이러한 반사실적 질문이야말로 경험에 한정된 사안(史眼)을 고쳐
시대의 기대 지평을 통찰하게 인도하는 훌륭한 길잡이일지 모른다.
아래에 우리나라 역사의 어떤 지나간 미래 이야기를 한 토막 적어 본다.
제목은 ‘1905년,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하다’로 잡아 보았다.
*아아! 원통하다. 분하다.
하찮은 섬나라 오랑캐가 중국과 우리나라에 해를 끼친것은 예부터 그랬지만
근래 이른바 개화란 것이 생긴 후에는 설쳐 대는 것이 더욱 끝이 없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일본은) 갑신년(1884)에는 김옥균, 박영효 등
역적들과 모의하여 변란을 일으켜 우리 임금을 협박하고 귀척과 근신을 많이 죽였다.
화변이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중국 대인 원세개(袁世凱)가 구원하러 와서 모면할 수 있었다.
갑오년(1894)에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종묘의 중요한 보물을 훔쳤고,
을미년(1895)에는 저들이 김홍집, 유길준 등 역적들과 결탁해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 군부를 욕보이고 우리 조종의 법제를 모조리
멸하고 우리 인민의 의발을 서둘러 훼손하였다.
화변이 다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다행히 의병이 일어나고
조신(朝臣) 두 세 사람이 이로 인해 계책을 내서 역적 몇몇을 죽여 형세가 변해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저들 두 세 사람은 충신으로 역신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이익을 탐해 권세를 빼앗은 것이었다.
더욱이 나라의 충신은 당시 모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부끄러움도 없이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었다.
저들에게 복수하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힘껏 저들에 붙어 오늘의 큰 화를 키웠다.
오늘 저들은 먼저 일국의 동학(東學) 비류(=일진회)를 선동하여 우리 정부를 흔들고 이권을 빼앗았다.
이미 흔들고 빼앗더니 마침내 군신을 억눌러 손 쓸 데가 없게 되었다.
정령과 관작, 재리와 민사를 하나같이 아울러 자기들이 주관하고 본국인은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기타 간악하게 굴고 흉악하게 굴었던 것이 끝이 없어서
일일이 거론할 수 없으며 형세가 장차 전국을 빼앗고야 말 것 같다.
*중국으로 말하자면 갑오년(1894) 저들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더니 끝내 화약을 이루어 배상금 4억을 징수하고 대만 수 천 리 땅을 할양받았다.
이후 모욕하고 경멸하고 다시 중국을 넘보는 뜻을 가졌다.
저들은 항상 동양 삼국이 함께 바깥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하는 짓이 이러하니 이 어찌 반푼이라도 신의와 법리를 말할 게 있겠는가?
저들은 임금부터가 아비를 죽이고 자립한데다 다시 대국과 친한 이웃에게
끝없이 악독한 짓을 하여 죄악이 가득하니 장차 반드시 천지와 귀신에게 주살되고 진멸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오랫동안 제어를 받아 왔다.
비록 임금이 마음 속 깊이 원통해하고 일국의 신민이 분해서 죽고자 하나
점점 수치가 깊어지고 화변이 커지는 것을 보기만 할 뿐 혼자서는 계책을 낼 수 없다.
중국같은 나라는 수십배나 되는 땅과 사백조나 되는 인민으로
사람과 물자가 많고 무비가 튼튼한데 만고에 드문 치욕을 당하고도
아직껏 무엇을 해 보려고 하지 않으니 참으로 알지 못하겠다.
내가 근래 중국 소식을 들으니 원대인(袁大人)이 지금 북양대신이 되어
위망이 혁혁하고 백만 군대를 호령하며 마대인(馬大人)이 군사를 잘 거느려
명성이 화동(華東)에 진동하는데 지금 역시 대병을 옹위한다.
또, 장지동(張之洞), 이병형(李秉衡) 등 순수한 충성과 달통한 식견을 지닌
공들이 있고, 게다가 천하의 선비들이 대부분 강개한 의논을 꺼내고 있으며
병제를 새롭게 경장해 아주 정예롭고 튼튼하게 되었으니
만약 중국이 수치를 씻는 일을 한다면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아 다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물며 원공은 일찍이 흠차관(欽差官)으로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머무르며
군신과 두터운 안정을 쌓았고 난리를 구원해 큰 은혜를 미쳤으니
우리나라의 위급한 형세를 들으면 어찌 측은히 여겨 구해 주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우리나라의 위아래 인심이 오직 원공을 사모하고 원공에게 희망을 건다.
*나 같은 사람은 본디 임하의 천품으로 지난 을미년 통분을 이기지 못해
의병을 창도하였다가 필경 낭패가 되어 원통함을 참으며 지낸 것이
이제 10년이다. 국사가 망극한 데 이른 것을 목도하고 죽고자 하였으나
죽을 데가 없고 또 임금과 팔도 사민이 은연 중에 미천한 이 몸에
희망을 두고 있는데 형세가 어찌할 수 없어서 한 마음으로 단지 원하는
것은 속히 원공의 휘하에 가는 것이지만 형적에 혐의가 있어 갈 수 없다.
백경원(白景源) 군은 나와 친하고 미더우니 보내서 호소할 만하다.
*무릇 전쟁은 때를 기다리고 형세를 타고 명분을 쥐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저들이 막강한 나라[=러시아]와 상대하며 서로 버틴 것이 해를 넘겼고
밖으로는 억지로 힘이 있음을 보이지만 안으로는 사실 병사와 돈이 바닥나
오직 우리나라를 빼앗아야만 계속 갈 수 있다. 만약 중국의 대군이
우리나라에 오면 저들은 병사도 늘릴 수 없고 재물을 장만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니 이 때야말로 정히 놓쳐서는 안 된다.
지금 중국은 저들의 용병과 술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알고 있으니 쉽게 제어할 수 있다.
만약 비축한 정예 부대로 저들 갈라진 약병을 눌러 주고 거기에 더하여
우리나라가 함께 온 힘을 다하면 형세를 타는 것에서 어찌 현격한 차이가 나지 않겠는가?
비록 때와 형세가 있어도 명분이 없으면 어렵다.
지금 중국이 씻어야 할 수치를 씻는 것인데 누가 안 된다고 하겠으며,
저들이 이미 조선을 중국과 둘로 나누어 자주독립이라 했다가
마침내 다시 저들의 속국으로 삼았고 단지 속국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두 빼앗으려 하니 이와 같은 것으로 명분을 삼을 만하다.
이것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찌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이룰 만한 일이
아니겠으며 경사가 중국과 동국에 흘러 만세토록 죽백(竹帛)에 빛날 것이다.
만약 그 명분을 쥐지 않고 형세와 때를 버려 행하지 않는다면
이전의 수치를 무릅쓰고 영영 안고 가는 것이며 후일의 근심을 길러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니 사태가 과연 어떠한가?
나는 원공의 현명함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선택이 있을 것이다.
나는 비록 늙었고 또 지모도 없지만 장차 일국의 충신 의사와 더불어
원공의 하풍(下風)을 극력 주선하고자 한다.
▶춘천시 의암공원 내에 있는 의암 유인석 동상
*강원도 춘천에는 의암호가 있다.
춘천 출신 의병장 유인석의 아호 의암을 기린 것이다.
호수 의암은 잔잔하다. 하지만, 의병장 의암은 역동적이다.
시대의 격류와 씨름하며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건너고 또 건넜다.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유교를 재건하기 위해.
그는 처음 제천에서 복수보형(復讎保形)의 깃발을 올렸다.
때는 을미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포고된 바로 그 때,
그는 김평묵(金平黙)과 유중교(柳重敎)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화서학파의 중심 인물이 되어 14년 전 위정척사운동의 불꽃을 기억하며 다시 힘을 모아 거병하였다.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며 세를 확장했으나 끝내 제천성을 잃은 그는 서북으로 달려 압록강을 건넜다.
회인(懷仁)에서 중국 관원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비극을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통화(通化)에 정착하여 한인 교민 사회에 유교를 부식하였다.
오늘날 글로벌과 디아스포라의 감각에서 보면 그는 초창기 해외 한국 유교의 지도자였다.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압록강을 건너 양서 지방을 순회하며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화서학파의 결집력을 다졌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이 대의를 밝힌 이야기 소의신편(昭義新編)이 출간되어 대한제국에서 그의 명망을 높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07년의 고종퇴위는 그를 다시 해외로 내보냈다.
이번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그는 다시 항일의 깃발을 올렸다.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결성되었고
그는 도총재로서 전국 동포에게 엄숙한 역사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1896년의 제천과 1910년의 블라디보스토크,
그 곳엔 다같이 의병이 있었고 의병의 최고 지도자는 유인석이었다.
*우리나라는 독립을 회복할 수 있을까?
유인석의 기대는 그의 생전에 경험으로 실현되지 않았지만는 그 기대를 평생 버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미래였으며 그의 기대는 결코 그의 경험에
압도되지 않았다. 그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1905년 입동이 지난 어느 초겨울 한밤중에 일어난 을사늑약은 끊임 없이
역사의 트라우마가 되어 후인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그는 독립을 잃은 이 때가 도리어 독립을 회복할 적기라고 보고 있었다.
중국에 가자. 원세개를 설득하자.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지쳐 있다.
한중연합군이 일본과 싸우면 된다.
청군이 들어오고 의병이 일어나면 된다.
물론 이 미래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지만 많은 유학자들이 유인석의 이와 같은 기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기대는 개인적인 기대를 넘어선 집단적인 기대였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당시 호서 산림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으로 경상도 삼가 지역의 유학자였던
권명희(權命熙)는 노사학파 정재규(鄭載圭)와 만나 의병 항쟁을 논의하였다.
논의의 내용은 이렇다. ‘민영익(閔泳翊)이 상해에서 10만 대군을 길렀고
원세개 휘하에 40만 중국군이 있으며, 이용익이 민영익과 연계해서
시베리아에 갔다.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패배한 원인이 청군을 도울 조선의
의병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꼭 청군의 진입과 의병의 내응으로 일을
성사시켜야 하니 유인석과 합심하여 동서에서 기각지세를 만들고 청병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유인석의 기대나 권명희의 기대나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유인석이 자신을 대신할 밀사로 백경원(白景源)을 선택했듯
권명희 역시 중국에 떠날 밀사를 생각하고 있었고
특히 밀사의 손에 쥐어줄 공신력 있는 편지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경우 율곡의 봉사손으로 명망 있는 이종문(李種文)의 편지가 유력하게 고려되고 있었다.
*하지만, 원세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군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의병이 일어났고, 최익현은 태인에서 민종식은 홍주에서 거병했지만
그것은 한국의 의병이었지 한중 연합군은 아니었다.
한중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한다는 기대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미래로
흘러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20세기 전반 중국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의 깊은 내면에는 한중연대가 숨쉬고 있었다.
1909년 하얼빈의 총소리와 1932년 상해의 폭탄은 한중연대의식의 중요한 에너지가 되었다.
‘1905년, 한중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하였다는 진술은 반사실이지만,
그 역사적 반사실의 이면에는 20세기 전반 한국독립운동의 어떤 정신적
원천의 하나를 읽어 내는 힌트가 담겨 있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daum blog "늘빛사랑 조흥식"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회장동우회(2014-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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