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31.부산 유엔공원 기념식수 및 전국총재단 간담회
추사 김정희 세한도(해남대흥사,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조선 유배문화
추사 김정희 세한도(해남대흥사,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조선 유배문화
@해남 대흥사 피안교를 건너 두류산 대흥사, 扁額...아는만큼 느낀다
.圓嶠 李匡師...대웅보전, 천불전, 沈溪樓(침계루)
.정조대왕(이산)...표충사
.秋史 金正喜...무량수각
.창암 이삼만...鴐虛樓(가허루)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와 동갑나기, 다산 정약용, 자하 신위와 친밀
.선사가 보내준 茶를 받고, 추사는 폐백으로 “명선, 茗禪”작품을 남긴다
추사는 病居士 낙관으로 “차를 마시며 참선에 든다”
.漢나라 비문을 본뜬 글씨체이다
“몽정(중국의 유명차)과 노아보다 덜하지 않다”
.금석학과 고증학이 무너지고 등장한 성리학의 뿌리를 검증하는데,
父親을 따라 청나라 사신단(24세)에 따라간다
.스승 박제가의 훈도(신학문을 청, 오랑케 학문으로 봐서는 안된다)
.동국진체(원교 이광사)는 鄕色, 님족적색체로써 유행햇던 필체를
漢나라 고전, 비문체를 주장한것이다
.30년후(54세), 형조참판으로 사적단 부단장으로 북경에 다녀온뒤,
정변으로 사형을 받지만 영의정 조인영(친구)의 도움으로 제주로
유배길을 떠난다
.귀향길에 전주~남원~해남 대흥사~완도~제주...
.전주에서 창암 이삼만을 불러 서예를 본뒤 평가절하하여 다투는데
창암 이삼만의 몽당붓을 보고 놀란다
.지리산 천은사 일죽문을 보고 감탄한다
.초의선사를 만나, “대웅보전”(원교 이광사) 편액을 떼라고 한다
“원교는 조산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사람이다”
.추사는 “무량수각”을 써준뒤 붙이라고 하지요(현재, 승방의 현판)
.9년간(7년3개월) 유배중에 부인이 죽고, 회갑을 맞는다
찾아주던 후배도 뜸해졌는데, 변함없던 이상적에게 “歲寒圖”를 선물한다
.1848, 12월(63세) 귀경길에 대흥사 초의선사를 만나,
.원교의 “대웅보전”을 부착토록 한다(그땐 내가 잘못봤어...)
.추사체가 완성되어, 반성과 후회를 한것이다
.평양감사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 셔먼호 사건)는 극찬한다
“바다를 건너간후 스스로 一家를 이뤘다”
.원교 글씨체는 획이 가늘고, 바싹 마른 화강암의 골기이다
.추사 글씨체는 살이 찌고, 윤기있는 미감이다
추사의 말년시절의 작품 “명선, 茗禪”은 불필요한 기름기를 제거하고
氣와 韻(운)을 세운 경지의 필체이다
@추사 김정희는 정약용보다 24살 연하로써 존경했다
.호(100여개)를 보담재(寶覃齋)는 스승(覃溪 翁方綱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옹방강은 소동파를 “보배롭게 모신다”는 의미로써,
서재를 보소제(寶蘇齊)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추사 김정희(1786~1856), 경주김씨
.예산 고택, 曾祖父(월성위 김한신 1720~1758)
:화순공주(영조의 둘째딸)와 혼인, 토지와 53칸 대궐 하사
:高祖父 묘소 白松나무(김흥경, 병자호란), 중국에서 가져왔다
:추사집안의 사찰, 화암사(오성산자락)
:화암사 뒤편 바위글씨(詩境, 天竺古先生宅. 천축고선생댁)
(詩境은 중국사신단 시절 宋애국시인 육방옹의 필체이다)
(天竺은 인도를 상징, 古先生宅은 부처가 계신곳)
.1m 석주(石年 글씨)기둥 그림자로 시간을 체크했다
.주련: 추사체의 변화를 알수있다
.추사의 11촌 대고모(정순왕후, 영조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호조참판, 사촌오빠: 김관주 영의정)
.한양 曾祖父(월성위 김한신)에서 생활
.스승 박제가(1750~1805)
.父親(동부지사 김노경 1766~1840), 북경 사신단 합류(자제군관)
.중국 고증학 탑구(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시구사..실용학문 관심)
.北學(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으로 규장각 설치(비원 주합루, 부용지)
.연경에서 조강(曹江), 서송(徐松), 담계 옹방강(1733~1818),
운대 완원(1764~1849)를 만났다
.1840년, 안동김씨(대사간 김우명, 김흥근)에 밀려
10년전 “윤상도 옥사사건”을 빌미로 父親(故人)을 공격하여
예산에서 체포, 의금부로 압송, 제주에 유배(9년간 위안리치)
@조선4대 서예가는 안평대군+한석종+이광사+김정희...
.안평대군은 숭례문(남대문)+세종영릉비...작품을 남겨
.한호 한석봉(임진왜란 전후)는 워낙 유명하고,
.원교 이광사는 조선최고의 서예 이론가였다
;노론과 대립으로 1755년(영조)유배되었다
;고령~진도~신지도(16년간~), 1705~1777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글씨남겨는데...1768
#유배길,김정희는 “무량수각”을 남긴뒤에...
현판글씨(이광사의 “대웅보전”)를 비판...떼어내라
먼훗날,후회하고 다시 부착하여 현재까지....
“지리산 천은사” 일죽문도 남겼지요
@추사 김정희와 제주도의 인연
.김정희(~1856);헌종,안동김씨의 세도정치...제주도 유배
;남원(유배길)에서 늙은장수 인물화“모질도”남겨...
;독서+서예...“완당세한도” 1844년(9년차)가 유명하다
;청(중국)서적을 제자 우선 이상덕(역관)이 가져와
;잣(측백)나무는 변함없는 곧은정신(2그루)+젊음의 상징
;오두막집은 초라한 자신을 상징이지요
;늙은 소나무고목+어린 소나무=스승+제자의 우정이며
;그래서 歲寒圖를 남겼지요
그 외.영영백운도+해남 대흥사 “무량수각”글씨 남겨...
.추사 김정희는 청나라(연경)사신단 부친을 따라갔다가,
;완원,옹방강을 만나 성리학등을 배워...
.歲寒後 知靑松...“歲寒圖”의 어원은
;공자,논어(자한)편;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조)
“추워진 후에 소,전나무가 더디 시듦을 알다”
;원본, 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 彫也(조야)
彫,凋(조); 시든다
;결국,여름에 소나무가 푸른줄 몰랐다가,추운 겨을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푸름을 알게 되었다
“있을때 잘해라,내가 없으면 먼훗날,생각날것이다”
;청,서적을 가져온 우선 이상적에게 그림을 그려줬다
보답한것이,지금의 명작이 된것이다
뭘,주고싶지만 여유가 없었기에...
;역관출신 이상적은 대원군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때
19명의 학자들이 감탄,16명이 감상의 시를 지었다
@세한도;종로 묵호일식,그곳에 가시면 세한도를 볼수있어요
안국역2번출구,헌법재판소 옆...
;백기호 대인(대표)은 종로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지요
;사람들 마음의 문을 열게하는 아름다운 향기를 가진분...
@동계정온(거창)의 필체인가?
백파논쟁(고창 선운사)
@백파선사의 비문을 추사 김정희가 쓰다
.매표소옆 전나무 숲속 부도밭 중앙에 백파선사 碑가 있다
.추사필체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1855)
.비석은 추사가 죽은뒤 2년후 세워졌는데(1858)
.뒷면글씨는 완당학사 김정희...제자의 필체인듯 하다
.추사는 56세에 쓴 “백파망증 15조”와 달리 지극히 공손함과
존경심의 심금이 담겨있다
귀향살이(9년) 이후 圓嶠書訣後도 그러했다
律師로써 일가를 이룬이가 없었는데, 그렇게 표현하였고
大機大用은 백파가 80편생 가장 힘든곳인데...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가난하기는 송곳꽃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별호: 과로(果老: 과천에 사는 노인)
.백파(1767~1852, 고창출생, 86세, 지리산 화엄사, 법랍 68)
.수미산은 세계중심에 솟아있는 상상의 산이다
(황금/북쪽, 은/동쪽, 유리/남쪽, 수정/서쪽으로 되어있으며
중턱에는 사천왕, 정상에는 제석천이 있다고 한다)
.고대 인도인들이 상상한 천하중심으로
대륙(4개)+산(9개)+ 바다(8개)+산의 높이(해발 8만km)
@백파와 추사의 禪논쟁
.18세 선운사 입산 “한 자식이 出嫁하면 九族이 모두 天上에 난다”
.23세 스승 설파스님(지리산 영원사 1707~1791)에세 구족계를 받아
율종의 계맥을 이어받고, 禪文手鏡(50세)를 지어 논쟁을 일으킨다
.백파의 禪사상은 선종의 8대조 마조(709·788)가 본격적으로 제항하여
.11대조 임제(~876)이 祖師禪 우의사상으로 발전시킨다
@석전(石顚)과 추사 김정희
.정호스님(1870~1948)의 법명이 석전(돌머리, 박한영)이다
.질마재 선운사 백파에게 추사는 종이쪽지에 아호를 적어주었다
“石顚” ...“누구 주고싶은 사람이 있으면 줘라”
.서랍속에 보관하던중 박한영(19세, 전주 태조암)에게 준것이다
.조선불교 敎正을 지낸후, 정읍 내장사에서 보냈다
.최치원의 사대비명, 석전 노인주는 백파의 제자 한영스님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 경주김씨
.예산 고택, 曾祖父(월성위 김한신 1720~1758)
:화순공주(영조의 둘째딸)와 혼인, 토지와 53칸 대궐 하사
:高祖父 묘소 白松나무(김흥경, 병자호란), 중국에서 가져왔다
:추사집안의 사찰, 화암사(오성산자락)
:화암사 뒤편 바위글씨(詩境, 天竺古先生宅. 천축고선생댁)
(詩境은 중국사신단 시절 宋애국시인 육방옹의 필체이다)
(天竺은 인도를 상징, 古先生宅은 부처가 계신곳)
.1m 석주(石年 글씨)기둥 그림자로 시간을 체크했다
.주련: 추사체의 변화를 알수있다
.추사의 11촌 대고모(정순왕후, 영조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호조참판, 사촌오빠: 김관주 영의정)
.한양 曾祖父(월성위 김한신)에서 생활
.스승 박제가(1750~1805)
.父親(동부지사 김노경 1766~1840), 북경 사신단 합류(자제군관)
.중국 고증학 탑구(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시구사..실용학문 관심)
.北學(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으로 규장각 설치(비원 주합루, 부용지)
.연경에서 조강(曹江), 서송(徐松), 담계 옹방강(1733~1818),
운대 완원(1764~1849)를 만났다
.1840년, 안동김씨(대사간 김우명, 김흥근)에 밀려
10년전 “윤상도 옥사사건”을 빌미로 父親(故人)을 공격하여
예산에서 체포, 의금부로 압송, 제주에 유배(9년간 위안리치)
@채제공(좌의정,1792)은 참판 김노경(김정희의 부친)에게 충고를 했다
.두사람은 朋黨(붕당)이 달라 사적인 만남은 별로 없었던 사이였다
.7살(김정희)의 立春帖(입춘첩)의 대문의 글씨를 보고 놀랐다
“명필이 되면 명도(命途,운명과 재수)가 궁할 터이니,
글씨(서예)공부는 시키지 말고 글을 읽히시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결국 파란만장한 운명이 기구했다
@가문은 宗戚(종척,왕의 인척)+문과 급제...제법 권세 가문이었다
.왕희지체+동국진체를 두루 읽혔던 김정희(추사)는
.23살(1809,순조9년),부친따라 청나라 연경을 방문하여,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書學이론을 배운다
“碑文(비문)글씨을 공부해서 글씨의 예술성을 발견해라”
.스승 완원(阮元)을 사모하여 阮堂(완당)을 호로 사용했던것이다
.함흥 황초령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풀었으며,
.북한산의 無學의 碑가 아닌 진흥왕의 정계비(定界碑)를 밝혀냈다
@윤상도옥사(1840,헌종6)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에 유배된다
.秋史體을 완성하였고, 국보(180호) 歲寒圖를 그렸다
.제자였던 이상적(역관)이 연경에서 책과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시제는 論語의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는 일품이다
“여름에는 소나무가 푸른줄을 미처 몰랐으나,
추워진후에 비로소 소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알게된다”
.일부 정치인의 “내가 있을때 잘해라,
내가 없어지면, 생각날 것이다”는 의미이다
.청나라 문인 16명이 감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약503개의 예명(호)중에서 秋史(추사)를 즐겨 사용했다
.호남에는 윤선도,정약용,김정희,초의선사의 숨결이 남아있지요
@조선 3대 명필은
.이광사(1705-1777)+이삼만(1770-1847)+김정희(1786-1856)
@추사 김정희는 전통 중국체+왕희지 글씨체를 폄하했다
.수행원에게 “저기 훌룡한 글씨가 누구 작품인지? 보고오거라...”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보고받은뒤 “형편없는 글씨로구나...”
.유배길에 대흥사(전남 해남)의 초의선사에게 대웅전을 써주었다
.원교의 대웅보전을 떼어내고, 추사의 대웅전을 걸어놓은것이다
.9년간 유배후에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대흥사에 들려,
원교의 대웅보전의 현판을 다시걸게 하였다
지금, 대흥사에는 원교의 필체 “대웅보전, 무량수각”이 걸려있다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은 불후의 명필이다
@제주 유배를 가던중에 전주에서 창암 이삼만에게 글씨를 쓰게한뒤,
.명필이 아니라고 질책하자,
.청암은 대들면서 당신이 써보라며, 창암의 붓을 넘겨주자,
.붓털이 없는 몽당 연필같은 붓을보고 추사는 깜짝 놀랐다
.벼루 3개가 구멍날 정도로 병든 이후에도 하루에 천자 이상을 썻다
.미안했던 마음으로 유배복귀중에 전주에 들려,
묘비를 직접 써주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추사 깁정희도 제주유배중에 벼루 10개가 구멍날 정도였다
.9년간의 진통으로 추사체가 완성된것이다
.한석봉도 후대에 알려진 조선의 대표적인 명필이었다
조선의 유배문화
@歸陽(귀양)...햇빛을 향하다...歸鄕으로 불려진다
.조선의 법률은 대명률을 적용하였지요
.유배 형벌은 한양에서 이격된 곳이다(함경,평안,전라,울진,제주도...)
.유배는 종신형이 원칙이지만...추방형으로 변형된다(훗날, 사면복권)
a)태형...매질
b)장형... 곤장
c)도형...징역형
d)이형...유배형
e)사형...사약
.유배형...2000리~2500리~3000리 이상...
a)환도; 100리 이상 격리, 남에게 피해를 입힌 죄인
b)부처; 유배지 관리가 직접 관리하도록 위임된 경범죄자
c)안치...본향안치; 기초범(고향으로 안치)
...절도안치; 중범죄자
...위리안치...가택연금(가시덩쿨 봉쇄)
.유배...흉악범~세금 포탈범
....사형 완화를 위한 처벌법
....격리를 원칙으로 고충, 반성토록 유도/재충전시켜...
.관찰사가 관리...형사범+잡범은 관찰사 직권으로 유배처벌 가능했다
.암행어사를 통하여 감시하였고,
.임금은 정치사범(정치인, 지식인 위주 처벌)...훗날 복권시켜....
.과거제도 문란으로 유배인원이 증가한다(중국은 처형을 원칙)
@ 평민과 여성 유배자(5~6명)도 있었다
.인목왕후(노씨)는 제주에 유배, 생계유지 목적으로 모주를 담았다
.정난주(정약용의 조카)는 황서영사건에 연루되었다
@제주도 유배자는...조선시대 200명(총;4000명)
.제주 백성은 궁중의례를 경험하다(광해군 장례식/경기도 남양주)
.제주오현단
@제주 오현단(현, 오현고교)
.김정, 송인수,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청음 김상헌) *추사 김정희
제주도와 세한도
@제주도는 유배지의 명소였다
.귀양살이(햇빛이 적은곳+햇볕을 볼때까지..뜻인가요?)
.가택연금(위리안치)~오지로 추방~낙향으로 분류되지요
.제주,삼수갑산,진도,강진,부령(두만강),영덕...오지로 추방
.조선 문과급제자(선비)15000명중 1000명이 유배되었다
.유배거리도 3등급(2000리,2500리,3000리)이었다
.환도는 고향,1000리,형사범도 많았다
@제주도 유배여정은 1개월 소요(도보이동,3000리)되었다
.조선, 제주에 200명 유배(조선,총 유배자;4000명)...
@대표적 유배자
.김만중;숙종,대제학(장희빈의 왕후책봉 반대)...남해
.추사 김정희...제주
.원교 이광사(서예 이론가)
.고산 윤선도;정조,예송논쟁...삼수갑산~영덕~강진
;어부사시사를 집필하였고
.다산 정약용;정조,신유박해~강진~흑산도(18년간),1844
;윤선도 6대외종손,목민심서,자산어보...500권 저술
;1801년,정약용의 형;참사(천주교 박해)
;초의선사(해남 대흥사)와 친분이 두터웠지요
.연암 박지원;고문에 반기,자유분망한 문체구사...연암
.우암 송시열;윤선도를 유배후 귀향...제주,정읍/사약(2사발)
.조광조;중종,개혁실패...사약을 받았으며
.연산군;강화도에
.광해군;강화도~제주도
.단종;영월/사약을 받아...
.전두환;백담사로 유배
.김대중,김영삼,김종필;가택연금(현대식 유배)
유배생활의 업적
@원교 이광사(영조)는 신지도(완도)에 유배되었다
.서결(혼례이론서 전/후, 서예비평서, 1768년)을 남겨...
“동국필체” 唐시대 이전서법으로 전통 중요시 하였고,
.진서풍으로 조선 독자성을 강조하였다...정약용이 극찬하지요
@추사 김정희(明,靑나라 서법)의 최신 서예법이 등장하지요
.김정희는 왕족 외가 권세가문 출신으로 오만한 성격 소유자였다
.대흥사(해남)의 대웅보전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으나,
.주지스님 초의선사를 불러 현판을 떼어버려...
.귀향해제, 귀경시 대웅보전의 현판을 원위치시켜..후회,반성한다
#60년만에 원교의 필체가 드디어 햇빛을 만나지요...
.추사 김정희(완당)는 최고필체 극찬했다가 원교(이광사)의 필체를
알고난뒤 혹평하였던 것이다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원교 이광사)...마부시켜 극찬했다가, 혹평..
.제주 귀향후 부인별세등 아픔을 겪어...사람이 변하여(초의선사)
.전주에서 창암 이삼만의 붓글씨를 평가절하후 싸운적도 있어..
귀향복귀시 전주에 들러, 창암 부인의 묘비를 써준다
@황초령(黃草領) 진흥왕 순수비
.갑산(함경도)에서 5일간 소요되는 산속에 황초령비가 있었다
.북병사 신립 장군이 발견하여 탁본을 해오자,
.조정관료들이 심부름을 계속시켜, 비석을 깨트려 버린다
(이미 40년전에 없어졌다)
.추사 김정희는 권돈인(함경도 관찰사)이 비석조각을 탁본해 보냈다
@아계(이산해)..900리 울진 평해(3년 유배...임진왜란을 막지못한 죄)
.망양정,월송정...시문학에 기여...지역 제자양성의 공적을 남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1801년,정조)~18년동안~제자 18명을 가르켜
.강진 四宜齋(사의재, 최초 오두막에서 살았던곳...
.1817년(10년간 집필),경세유포(실학의 기초)...미완성 작품이다
.1808년(6년후)...다산초당...옆 건물(보정산방)+연못 만들어...
;천일각(누각)...강진만,구강포(고기잡던 물가)를 내려다 보인다
(丁石;정석)...친필이 남아있다...참나무+편백+녹차나무....
.목민심서(1818년)+흠흠심서(1819년)
.백련사 혜장스님(후배)를 만난후..정신적 안정으로 집필에 전념한다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와 교감을 이루다
@정암 조광조(화순 능주)
@우암 송시열
@단종(영월)~광해군(강화~제주도)~연산군(강화도)
@연암 박지원
@서포 김만중(남해 노도)
@전두환(백담사)
8. 紫霞 申緯(자하 신위, 순조): 고려말 신숭겸의 후손
.옹방강을 만난뒤 모든작품을 태워버리고, 공부에 더욱 정진하였다
.감히 대원군이 뽐낼수 없을 수준의 詩. 文章, 그림(畵,) 글씨(書)...
.申緯의 漢詩: 題錦城女史藝香畵蘭 (난초그림을 보면서...)
.畵人難畵恨 사람은 그려도 恨은 그리긴 어렵고
.畵蘭難畵香 난초는 그려도 香氣는 그리기 어렵네
.畵香兼畵恨 香氣를 그린데다 恨마져 그렸으니
.應斷畵時腸 이그림 그릴때, 그대 애가 끊겼을테지
.난초의 삼전지묘는 최고의 걸작이다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조흥식
0204mpcho@naver.com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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