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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로타리클럽(국제로타리 3640지구)

2022-0530, 고 조흥수 큰형님 참배, 3640지구 국립현충원 봉사

by 조흥식 2024. 3. 19.

2022-0530, 고 조흥수 큰형님 참배,  3640지구 국립현충원 봉사(동작동 국립현충원)

한양 땅을 내려다보다

 

 

 

 

 

한양 땅을 내려다보다

@신유한(申維翰 1681~1752), 청천집(靑泉集) 목멱산기(木覔山記)

목멱산에 올랐다. 산의 높이는 수천 길이요, 서북쪽으로는 백악산(白岳山),

삼각산(三角山), 인왕산(仁王山)의 여러 산들이 바라보이는데

높은 산들이 모여서 하늘에 서려 서로 읍하는 듯 서로 껴안는 듯하다.

동쪽으로는 백운산(白雲山)의 뻗어 나온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가

남산과 합하였다. 산등성이를 빙 둘러서 성가퀴와 망루가 있어서

종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들린다.

 

이 성안의 지세는, 가로 10여 리, 세로는 그 3분의 2가 된다.

이곳에 종묘사직, 궁궐, 곳집, 창고, 성균관, 정원이 다 들어서 있다.

그 외에 고관대작과 온갖 벼슬아치들의 관아이고

그 나머지는 수만 채의 가옥, 수백채의 가게, 수십 개의 저자거리이니,

이 모든 것이 또렷하게 손바닥 안에 있는 듯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나라 수도 풍호(豊鎬)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서에서 나라 수도 임치(臨淄)에는 사람이 하도 많아 사람마다

땀을 훔치면 비를 이룰 정도였다 하고,

나라 수도 언영(鄢郢)에 엄청난 크기 운몽호(雲夢湖)가 있다고 하는데,

이들 수도에 비하면 한양은 훨씬 못 미칠 것이다.

그럼에도 이 한양 땅에는 인재들이 넘쳐난다.

덕업으로는 이윤(伊尹부열(傅說),

지혜와 능력으로는 관자(管子제갈량(諸葛亮),

문장으로는 사마상여(司馬相如사마천(司馬遷),

고을 수령으로는 공수(龔遂황패(黃霸탁무(卓茂노공(魯恭)과 같은

이들이 모두 한양 땅에서 나오지,

머나먼 시골 촌구석 집안에서 취하는 경우는 백에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한양 땅 안에서 취한다 하더라도, 갑은 옳다 을은 그르다하며

어느 한편이 이기고 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전에 갑의 말을 옳다 여기면 갑의 사람을 귀하게 쓰지,

을을 쓰는 경우는 백에 하나도 없다.

이후 을의 말을 옳다여기면 을의 사람을 귀하게 쓰는 것을

마찬가지로 한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인재들을 열에 둘, 셋도 쓰지 못하는 근심이

늘 있게 된다.

 

(중략)

아아, 이것이 어찌 땅 신령이 인재를 기를 적에 안쪽은 풍성하게 하고

바깥쪽은 인색하여서 그런 것이겠는가.

나라 관제에서 대대로 녹봉을 받는 제도가 만들어진 지 오래되자

부형이 가르치고, 자제가 본받아 단련을 따로 하지 않아도,

익숙히 보고 들어서 집집마다 보불(黼黻)의 높은 벼슬감이고

경륜(經綸)의 재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구하고 비루한 곳에 거처하는 선비는 밭두둑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보아도 그 재주가 미관말직 하나도 얻을 수 없는지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천 리 먼 길을 오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아무런 뜻을 얻지 못하고 물러날 적에는 또 황황하게 길을 떠나니

, 슬프다.”

 

*18세기 신유한은 목멱산, 지금의 남산 아래를 내려 보았다.

물론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당시 한양은 큰 도시로 성장하던

무렵이라 도성 안은 빼곡하게 궁궐과 관아, 민가, 가게들로 채워져 있다.

김수철이 그렸다고 전하는 한양도성도와 신유한의 시선에 포착된 풍경은

지금의 포화된 서울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유한은 시골 서얼이라는 도성 밖 출신이었기에

도성 안을 조금 더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었다.

그가 전한 한양의 인상은 빽빽하고도 좁은곳이다.

한양 땅은 역대 중국 수도와 비교할 수가 없이 좁은 곳인데

이곳에서 덕업, 지혜, 문장이 훌륭한 자, 어진 수령들이 모두 배출된다.

자신과 같은 먼 시골 출신은 인재 안에 낄 수가 없다.

애초에 타고난 재능이 다를 리가 있겠는가.

문화와 교육이 경화에 집중되어 있는 탓에 한양 선비들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성장하여 원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한편 지방 선비는 아무리 애쓴들 도저히 장벽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경화와 시골은 그 차이가 이미 현격하여 좁히는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더구나 당시 선비들이 갑과 을로 나뉘어 치열하게 당쟁을 일삼던 때였다.

특정 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 그쪽 인재만을 수용하였다.

좁디좁은 땅에 장벽을 겹겹이 친 곳이 바로 한양이다.

 

*신유한으로부터 300년이 지나 그가 느꼈던 겹겹장벽이 과연 사라졌을까.

지역과 가문이라는 장벽은 아닐지라도 오늘날 또 다른 장벽이 곳곳에

놓여있다. 청년들은 원하는 일과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높은 진입 장벽을 호소한다.

여성들도 여전히 뚫지 못하는 견고한 유리천장을 머리에 이고 있다.

혹자는 구조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의 능력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장벽 안의 삶에 익숙하여 장벽 자체를 망각한 것은 아닌지,

장벽밖에 놓여있는 목소리를 조금 더 귀 기울여 보아야 할것이다.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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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