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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형 총재(25-26)

2025-0828, APPLC 총재방문(4호)

by 조흥식 2025. 8. 27.

2025-0828,  APPLC 총재방문(4호), 강남 신사역 이야자키

제목: 송학선 전(宋學先傳)

 

 

 

제목: 송학선 전(宋學先傳)

*공의 이름은 학선(學先, 1897~1927)인데 또 다른 이름은 인수(仁壽)이며, 송성근(宋聖根)의 큰아들이다.

고양군(高陽郡) 연희면(延禧面) 아현북리(阿峴北里)에 살았다.

공은 집안이 가난하여 농기구 회사에서 일을 하여 부모와 형제를 봉양하였다.

공은 장성해서도 장가를 들지 않았고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결벽(潔癖)이 있었다.

정직하고 온화하여 남들과 다툰 적이 없었다.

 

*1926 4 26일 융희황제(隆熙皇帝 순종(純宗))가 승하하였고,

같은 달 28일 시골의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망곡대(望哭臺)를 설치하였다.

골목마다 곡하는 소리가 하늘에 넘쳐나고 거리마다 뿌려지는 눈물이 비와 같았으니,

이는 망국의 우울한 한을 쏟아 낸 것이다.

공은 이보다 앞서 안중근이 적도(賊徒)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을 흠모하여,

마음속으로 자부하며 내가 그 뜻을 이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하고 비수를 사서 집에 보관하였는데,

집안사람들과 친구들은 모두 공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날 공이 죽기를 각오하고 사이토를 찔러 죽이려 마음먹고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집안사람들은 장사하러 나가는 줄만 알았다.

 

*오후 1 10분에 금호문(金虎門)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높은 신사 모자에 예복을 차려입은 세 사람을 태운 자동차가 문밖으로 나왔다.

창덕궁(昌德宮) 앞 적국 경찰서 관사에 이르러 복잡한 군중 때문에 자동차를 돌려

돈화문(敦化門)을 향해 자동차가 선회하려고 하였다. 

이 보기에 세 사람 모두 고관이었다.

한 명은 국수회 부회장(國粹會副會長)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이고,

또 한 명은 상업회의소 의원(商業會議所議員)이자 동민회 이사(同民會理事)인 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고,

또 다른 한 명은 학교조합 평의원(學校組合評議員) 이케다 초타로(池田長太郞)였다.

세 사람이 반듯이 앉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왔는데

가운데에 있는 사토가 나이 지긋한 모습이 사이토와 닮은 듯하였다.

공의 생각에 적의 괴수 사이토인 줄 알고 마침내 칼을 뽑아 들고 곧장 그 앞으로 달려갔다.

다카야마가 저항하며 칼을 막아서자 공이 왼손으로 차문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먼저 다카야마를 찔렀는데,

가슴을 찌르고 재차 배를 찌르자 뒤로 넘어지며 죽었다.

다시 사토를 찔렀는데, 가슴을 찌르고 또 허리를 찌르자 두 적이 연이어 쓰러졌다.

그러나 공은 여전히 그가 사이토가 아닌 것을 몰랐다.

 

*마침내 태연하게 재동(齋洞)으로 가는데 적국 기마대장 후지와라 도쿠이치(藤原德一)

공을 보고는 호각을 불며 붙잡으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한국인 경찰 오필환(吳弼煥)이 공을 붙잡으려 하였는데,

공이 또 칼을 뽑아 들고 그를 찌르자 배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공이 또 유유히 지나가는데 뒤에서 추격하던 후지와라가 빠르게 달려와

휘문고보(徽文高普) 교문 앞에서 공에게 접근하였다.

후지와라가 칼을 뽑아 들고 말 위에서 공을 내려치려다가 칼을 떨어뜨리자

공이 그 칼을 빼앗아 도리어 말 위에 있던 후지와라의 머리를 가격하였다.

말이 놀라 사람이 떨어지자 공이 다시 가격하려 하였는데

적국 헌병들이 이미 몇 겹으로 둘러싸고서 공을 향해 총을 난사하였다.

공이 다시 칼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맞섰으니, 총탄과 칼날이 교차하며 서로 정신이 없었다.

얼마 후 공이 총탄을 맞자 적들이 공을 붙잡으려 하였다.

공이 다시 수십 명의 군경과 이리저리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결국 붙잡혔고,

사형을 판결받았다.

1927 5 17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공의 나이 31세였다.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로하였지만 일을 하였다.

공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관을 싣고 선영에 가서 주검을 어루만지면서도 곡을 하지 않고 말하였다.

우리 아들은 제대로 죽어야 할 곳에서 죽었으니 다시 무엇을 서운해하겠는가.”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e-gonghun.mpva.go.kr)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5 19일에 순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소앙(趙素昻) 유방집(遺芳集) 열전8

 

*1910 8 29일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강제조약이 공포되면서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였다.

경술년인 1910년에 이루어진 나라의 치욕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 한다.

그리고 35년이 흐른 1945 8 15일에야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여 다시 국권을 회복하였다.

여러 국제적 정세 속에서 맞이한 해방이었지만

수많은 우리 열사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일이다.

 

*“송학선이란 인물을 아는가?

1926 4 28일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도 아니며,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람도 아니며,

목적 달성을 위해 특수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생계를 위해 일을 하던 온순하고 조용한 청년이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평범한 청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식민지 조국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안중근을 흠모하던 청년 송학선은 한 자루의 비수만을 품에 품고 그날 아침 집을 나섰다.

세밀한 정보를 가지지 못했던 일반인의 처지라 이런저런 착오로

애초의 목적인 사이토의 처단을 이루지 못한 것만을 끝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있다.

여성의 몸으로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섰던 남자현(南慈賢) 열사.

65세의 고령에 사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姜宇奎) 열사.

중학교에 다니던 15~16세에 이미 임시정부의 비밀지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이덕삼(李德三) 열사.......

진실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조국의 해방에 이바지하였다.

 

*위의 글은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기초한

독립운동가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선생이 지은 유방집(遺芳集)의 일부 내용이다.

꽃다운 이름을 백세에 전한다는 의미의 유방백세(遺芳百世)에서 이름을 따와 책 제목을 지었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80여 명의 애국 열사에 대한 열전이다.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맡아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독립운동가가

직접 남긴 애국열사에 대한 역사 기록이다.

조소앙 선생은 1932년에 이 책을 저술하면서 저술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을사년(1905)부터 임신년(1932)까지 약 30년 동안

국난에 순국한 사람이 수백만 명 이상이고 이름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도 수만 명 이상이니,

지금 80여 명을 기록하여 일부의 행장을 전하는 것이 실로 누락이 많은 줄은 잘 알지만

이마저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이 지난 뒤에

 80여 명도 성명마저 전해지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중략-

나는 유방집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리고 빛나는 명예를 후세에 남긴 열사의 정신은 뽑아 버릴 수 없으며

그것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맴돌면서 혁명 동지로서 영원히 활약할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하여 나라가 이미 망했거나 장차 망하려 하거나 아직은 망하지 않았을 때와

한 몸이 살거나 죽거나 죽지 않거나를 마주 할 때,

그리고 중요한 일에 대해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하여야 할 때에 그 마음을 고동치게 하고 감화시킨다면

이는 유방집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조소앙 선생은 유방집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으나,

다행히 9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세에 잘 전달되었고 한문으로 기록된 글은 번역이 되어

오늘날 사람들도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올해는 광복 80년이 되는 해이다.

대부분 광복 이후에 태어난 지금의 사람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몸소 겪었던

우리의 할아버지 또는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들과는 분명 감회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80년 전의 광복은 순국한 수백만의 피로 이룬 것이며,

지금의 우리는 그 토대 위에서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식의 죽음 앞에 슬프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31살 아들의 주검을 어루만지면서도 곡을 하지 않으며

제대로 죽어야 할 곳에서 죽었으니 서운하지 않다고 말하는

송학선 열사의 부모님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송학선 - 신문기사(유방집 부록)

송학선 - 적국 법정에 섰을 때의 기개(유방집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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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