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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사랑 조흥식

2015-1218.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기회 2015년도 송년의 밤

by 조흥식 2023. 4. 4.

2015-1218.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기회 2015년도 송년의 밤(교대역)

북한산의 가을

 

 

 

북한산의 가을(이덕무)

@이덕무(1741~1793) 북한산으로 독서하러 가는 이중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좋아하지 않는 글이 없으나 오로지 문충공 구양수(歐陽脩)의 글이 가장 좋다.

또 좋아하지 않는 산수가 없으나 백제왕의 옛 도읍지인 북한산이 가장 좋다.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글과 산수가 구양수나 북한산에 그치지 않을 터인데,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고 가장 좋아한다고 하니 이 분야의 고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본래 고루하고 견문이 적어 태어나 22세가 되던 해에야 처음으로

이웃 사람을 따라 구공(歐公)의 글을 얻어 보게 되었다.

읽어보고 크게 즐거워 남에게 자랑하며

이것을 즐기기를 종신토록 해이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난과 병약함을 견디지 못해 조용히 대문을 닫아놓고

나막신을 신고 외출하는 게 10리를 넘지 못하였다.

 

신사년(1761) 가을에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와 함께

음식을 장만하여 손을 끌며 처음 북한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12개의 사찰을 유람하니 즐거우면서도 마음이 뿌듯하였다.

모두 3일을 다니다가 돌아왔지만 오히려 석별의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 천하의 산수가 모여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면 가끔 북한산이 꿈에 보였는데, 지금도 그렇다.

이때 북한산을 본 게 처음이어서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까

 

@북한산은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산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집계를 보면, 2015년 북한산을 찾은 사람은 637만명으로 국내의 산 가운데 1위였다.

다음은 무등산(361), 지리산(293), 설악산(282) 순이었다.

지난해뿐 아니다. 지지난해에도 그랬고, 그 이전 해에도 변함없는 1위였다

 

@북한산의 인기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정귀, 허목, 이익 등 내로라하는 조선의 문인들이 북한산에 오른 뒤

기록을 남겼다. 예나 지금 할 것 없이 북한산은 봄철에는 꽃놀이로, 가을에는 단풍놀이로 이름이 높다.

북한산이 인기인 것은 서울이라는 큰 도시를 끼고 있는데다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청장관 이덕무는 176121살의 젊은 나이에 북한산에 올랐다.

남복수, 남홍래와 함께 23일 북한산에 머물면서 12개의 사찰과 암자, 정자, 누각을 돌아보았다.

이덕무의 여행 경로는 세검정을 지나 문수사를 거쳐 북한산성으로 들어가

태고사, 중흥사, 산영루, 상운사 등의 사찰과 누정을 두루 돌아본 뒤 대서문을 나와 진관사에서 끝이 났다.

 

@산행이 끝난 뒤 이덕무는 북한산 유람기를 썼다.

산행의 일정과 함께 거쳐 간 암자, 사찰, 정자에 대해서는 각각의 기문을 남겼다.

북한산의 유명한 누정인 산영루(山映樓)’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 같기도 하고 배[] 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태고사에서는 고려의 보우국사비를 참관하면서

이성계(李成桂)라는 이름을 발견한 뒤

비음(碑陰)에 우리 태조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라고 적었다.

이덕무는 북한산 유람기와 별도로 산행에서 얻은 감흥을 시로 썼는데, 41편이나 된다.

 

@산영루를 읊은 시도 들어 있다.

차가운 숲 깊은 산 가을이 서렸는데 돌다리 동쪽 언덕 높은 누각 서 있구려

샘물에 양치질하니 속세를 벗어난 듯 이같은 신선놀음 남에게 말하지 마소

 

북한산 유람의 명소 산영루(1925년 홍수로 유실, 2014년 복원)

 

@생애 처음 북한산을 유람한 이덕무는 꿈에 보일 정도로 북한산에  매료되어 북한산에 다녀온 뒤 2년이 됐을 때,

친구 중오 이시복(李時福)북한산에 공부하러 가겠다며 같이 갈것을 청한다.

친구가 읽고자 가져간다는 책은 마침 전 해에 읽었던 구양수의 글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갈 수가 없다.

이덕무는 대신 북한산 예찬을 담아 송이중오독서북한서(送李仲五讀書北漢序)라는 글을 써서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이덕무의 한 세대 뒤 문인인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이 북한산 산행에 나선 것은 1793년 가을이었다.

이옥은 23일의 일정으로 세검정~승가사~산영루~중흥사~대서문~진국사~보국사~보국암문~혜화문 코스를 밟았다.

일정과 코스 모두 이덕무의 때와 대동소이하였다.

이옥 역시 산행을 마친 뒤 중흥유기(中興遊記)’를 남겼는데 사찰과 누정 뿐 아니라

북한산성의 성곽, 행궁 건물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전하고 있다.

18세기 북한산성에 대한 짧은 인문지리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옥은 중흥유기의 말미에서 북한산 산행을 아름답다’[]라는 한 글자로 총평하였다.

조선 후기 문단에서 스타일리스트로 꼽혔던 이옥의 글쓰기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산도 아름답고 물도 아름답고, 단풍도 아름답고 돌도 아름다웠다.

멀리서 조망해도 아름답고 가까이 가서 보아도 아름답고,

불상도 아름답고 승려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안주가 없어도 탁주가 또한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람이 없어도 초가(樵歌)가 아름다웠다.

요컨대, 그윽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밝아서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탁 트여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높아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담담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번다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고요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누구와 함께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이 이처럼 많을 수 있단 말인가!”(한영규 옮김)

 

@1603년 가을,

서실에 외로이 앉아 있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행장을 꾸려 길을 재촉했다

북한산 중흥사의 성민 스님이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지금 산중엔 늦서리가 내려 단풍이 한창입니다.

하지만 며칠만 지나고 나면 시들고 말 것입니다.

만일 뜻이 있으시다면 지금 이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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