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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C지구(서울)

2015-0603.의전위원회 모임

by 조흥식 2023. 3. 19.

2015-0603.2014-2015 의전위원회 모임(은행나무집, 종로3가)

  *율곡 전셋집(조선시대 전세, 전전세) 

 

 

율곡 전셋집(조선시대 전세, 전전세)

@김일경(金一鏡)이 아뢰었다(승정원일기 경종4, 1724)

무고죄를 저지른 죄인 최수만(崔壽萬)의 집은 예전에 유심(柳諶)에게

세매(貰賣)하였는데, 유심이 또 이홍(李弘)에게 세매하였습니다.

그런데 최수만이 처형당한 뒤, 호조에서 그 집을 몰수하자

이홍이 호조에 민원을 제기하여 세전(貰錢) 120냥을 유심에게

받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유심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어쩔수 없이 자기가 살던 집을

이홍에게 주었습니다.

유심의 집에서는 공연히 세전을 잃은 데다 살 곳도 없어

연일 호조에 호소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고 또 몹시 억울한 일입니다

필부가 살 곳을 잃고 호소하면 왕도정치로 구제해야 합니다.

호조로 하여금 집을 팔고 최수만이 받았던 돈을 계산하여

유심의 아내에게 돌려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1910,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관습조사보고서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전세였다고 한다.

집값의 절반에서 7, 80%에 해당하는 돈을 집주인에게 맡기고

집을 빌려 살다가 나올 때 도로 받아간다는 것이다.

지금의 전세와 다름없다.

 

@전세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고려시대의 전당 제도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다만 조선시대에도 전세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윗글에 보이는 세매(貰賣)가 바로 그것이다.

세매는 세를 주고 팔았다는 말이다.

세를 주면 주는 거고 팔면 파는 거지, 세를 주고 팔았다는 건 무슨 말인가?

세매는 임대와 매매의 중간 형태로 지금의 전세와 같다.

세전은 다름 아닌 전세금이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최수만은 유심에게 전세를 주고,

유심은 다시 이홍에게 전세를 주었다.

요샛말로 전전세이다.

그런데 최수만이 죄를 지어 처형당하고 호조에서 그 집을 몰수하자

문제가 생겼다.

전전세 세입자 이홍은 전세 세입자 유심에게 전세금을 돌려달라 요구하였다.

유심의 아내는 일단 전세금 대신 살고있는 집을 내주었다.

유심의 아내는 집주인 최수만에게 전세금을 돌려받아야 하겠지만,

최수만은 죽은데다 재산까지 몰수당했으니 돌려받을 길이 없다.

꼼짝없이 전세금을 떼이게 된 것이다.

다행히 조정에서 전세금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몰수한 집을 팔아

전세금을 돌려주었다.

전세가 이 당시 이미 공인된 주거형태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율곡(栗谷) 선생의 집도 전세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

율곡은 서울에서 벼슬할 때 장동(壯洞)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종손이 이 집을 전세로 내놓은 모양이다.

집을 팔지 않고 전세로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의 종손은 형편이 어려워진 나머지 살던 집마저 내놓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듯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형편이 어렵기로서니 율곡 선생이 사시던 집을 감히

팔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율곡의 종손은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서

집을 비워준 것으로 보인다.

율곡집에서도 이를 세매라고 하였다.

 

@언젠가 전세금을 돌려주면 집을 되찾을수 있다는 점은 위안이 되었겠지만,

살던 집까지 비워준 처지에 집을 되찾기란 난망했을 것이다.

다행히 1763년 율곡 제자의 후손들이 돈을 모아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고 내보낸 뒤 종손에게 집을 되찾아 주었다.

이로 보건대 조선시대 전세의 임차 기간은 지금처럼 2년 단위가 아니라

길게는 수십 년까지도 갔던 모양이다.

전세 말고도 임대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문헌에 따르면 1년에 한번 집세를 내는 임대 형태가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1년 단위로 수확을 하는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월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매달 월급을 받는 이들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으니 월세도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주택임대 시장은 활성화된 편이었다.

 

@임대 시장의 활성화는 유동인구의 증가를 반영한다.

기실 조선 후기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서울은 벼슬하러 온 사람, 과거보러 온 사람, 장사하러 온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심각한 주택난 속에서 집 없는 사람들은 집을 통째로 빌리기도 하고,

방 한 칸만 빌리기도 하고, 땅만 빌려서 거기에 집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를 주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쩡한 남의 집을 빼앗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사대부가 백성의 집을 불법 점유하는 탈입(奪入)’은 조선 후기의 중대한

사회문제였다.

이 역시 서울의 심각한 주택난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이 가관이다.

주택 임대를 전면 금지해버린 것이다.

영조는 즉위 직후, 주택의 불법점유는 물론 임대 행위까지 모두 금지하였다.

임대를 빌미로 남의 집을 빼앗는 사례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백성의 정착이 중요하다.

백성이 마음대로 주거를 옮기면 농경사회의 기반은 뿌리째 흔들린다.

이로 인해 임대를 전면 금지하는 극약 처방을 내려

인구 이동을 억제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정책은 조선 후기 서울의 도시화라는 현실을 외면한 탁상공론이었다.

조선의 주택 정책은 농경사회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으며,

조선 후기 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심각한 주택난으로 인한 서민의 고통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조선 주택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서민 주거 안정이 아니라

체제 유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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