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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C지구(서울)

2013-0310.지구시산제(2013년도)

by 조흥식 2023. 1. 7.

2013-0310.지구시산제(2013년도 이기수총재), 도봉산 다락원

*萬石君(만석꾼이 되라)

 

 

 

@萬石이란?

.나라의 관제로써 승상, 태위(전국의 兵權장악), 즉 어사대부를 칭한다

.만석의 한달 녹봉은 350석이 관례적으로 지급되었다

 

@石奮(석분)皇帝가 만석군으로 부른 인물이다

.석분에게 경제(5대 황제)萬石~만석군()으로 호칭하였다

   평소, 만석군임에도 몸소 實踐하는 儉素(검소)率先垂範으로

   皇帝로부터 전폭적인 信賴尊敬을 받은 官吏로 평가되었다

.父親(석분)은 아들(初級官吏)歸家할때에 官服을 입고 마중하였으며,

   아들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4째아들(석경)이 술이 취하여 앞마당까지 수레를 타고 들어오자,

   父親(석분)食事를 극진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아들은 官服을 벗고, 무릎을 꿇고서 父親에게 정중히 잘못을 빌었다

.1째아들(석건): 무제 시절 낭중령으로 근무시,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에 자에 한획이 빠져 誤字가 생겼을때

   허둥대며 황송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고 한다

.2째아들(석갑): 나라 재상, 덕행으로 감동받은 백성들이 은덕을

   위하여 石相祠(석상사)를 세울 정도였다

.3째아들(석을)

.4째아들(석경): 가장 출세한 자손이다

   태복(황실의 말, 마차를 관리), 나라 재상, 패군 태수, 태자태부,

   승상, 목후구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4째아들(석경)은 승상재직시,

   자손들이 2천석의 관직에 오른자가 13명이나 되었으며

   조정에서 염후 시호가 하사되었다

   석경이 죽은뒤, 家風이 흐려지게 된다

.父親(석분)4명의 아들은 녹봉을 각각 2000석씩 下賜받았는데,

   5명의 한해 녹봉(연봉)이 만석이었기에 만석군으로 칭했던 것이다

  

@석분, 누나의 덕으로 고귀한 관리로 거듭나다!

.석분의 父親나라 출신으로, 멸망하지 ()으로 이주하여

   15, 하급관리로 고조(유방)을 섬기며 초한지쟁을 겪었다

.석분의 공손한 거동에 감동한 유방은 누나의 거문고 연주솜씨에

   감동받아 비빈(後宮)으로 발탁되어 관직에 입문한다

   中涓(중연: 궁중 시중드는 직책)을 거친후 비서실에 근무하게된다

.나라 개국이후, 누나의 덕으로 長安城(척리)에 살게되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中大夫(중대부)에 올랐다

.공손하고 신중함으로 추천받은 문제는 태자태부로 임명하였고,

.경제는 너무 겸손함으로 가까이 함을 꺼려함에 따라

   제후의 재상으로 삼게되었다

.석분은 退任후에도 계속 上大夫의 녹록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下級관리가 인사차 방문시에도 조복을 입고 마중하였다

   歲時에는 조정에 나가 皇帝를 알현하였으며,

   성문을 지날때에는 下馬하여 잰걸음으로 禮儀를 지켰으며

   황제수레를 보면 수레앞턱의 가로나무를 짚고 엎드려 를 표했다

.나라~나라 이름난 儒生들도 석분의 인품에 존경하였다

 

@이후, 만석군 가문이 4번 등장한다

.서한, 엄연년은 모친의 현명한 가르침으로 아들(5)이 모두

   크게 출세하여 만석엄구시호를 하사받았다

.동한, 풍양의 아들(8)1천석군 관직으로 만석군시호를 받았다

.동한, 진습은 아들과 조카 5명이 1천석군으로 만석진씨시호를 받았다

.당나라, 장문관은 아들(4)3품에 올라 만석장가시호를 받았다

 

@만석대(萬石臺)

.만석대는 도봉산 주변에는 유서깊은 인문학의 산실이 많은편이다

.특히, 道峰洞川(도봉동천)의 암석문은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다

.만석대를 지나면 漢陽제일의 道峰書院이 재건중이다

   정암 조광조와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있는 곳이다

.고산앙지(高山仰止) 암석문은 도봉서원 정문앞에 새겨져있다

  김수증(안동김씨)1700(숙종26)에 쓴 친필이다

  詩經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정암 조광조를 사모하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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