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8.북한산 진달래능선(우이동~진달래능선~대동문,대성문,대남문~구기동)
유자광은 庶子 출신이다!
유자광은 庶子 출신이다!
@유자광(1439~1512, 영광유씨)은 庶子(서자), 첩(妾)의 자식이다
.유자광의 부윤 父親(유규)는 과거급제후 평탄한 관료생활을 하였다
.유자광은 私生兒 출신으로 家族의 일원이 아니었다
.朝鮮時代에는 “家父長” 제도를 강조한 것은 性理學(儒敎) 때문이다
.國家의 통일성을 위하여 강력하게 추진했던 기본원리로 볼수있다
.家父長의 정점은 唯一(오직 하나: 權威의 상징),
家庭의 父는 한명인 셈이다(國家의 王은 한명의 이론을 강조)
이미 주어진 條件으로 선택이 불가능하다
.宗(마루, 으뜸: 높다)~廟(사당묘)의 제사는 매우 엄격한 것이다
즉, 死亡 이후에도 上下關係가 계속 維持된다는 논리이다
.妾(첩)~賤民(천민)의 자식을 庶子(서자)~庶孼(서얼)로 칭한다
庶子는 법적으로 父親이 없기 때문에 父親의 責任도 없었다
한때, 서자 온정론이 잠시 있었으나, 승진에는 한계가 있었다
*홍길동전(허균 小說):
집을 떠날 때, 父親(초당 허엽)을 찿아간다
“제가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養父~養子제도가 도입되어 血緣관계(代)를 法的지위(권한)유지한다
*영화 “홍등” 일부다처제의 봉건사회의 고발(장예모 감독, 1920년)
@유자광은 5명의 王을 보좌하였다(세조~중종, 1등공신: 2회)
.정암 조광조(1482~1519, 道學정치)는 중종(7년)
.유자광은 훈구파의 중심인물로 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한 뒤 권력을 장악했다
.戊午士禍(연산군4년, 1498)의 유자광과 이극돈
弔義帝文(楚 항우, 조카 황제/진 의제를 죽이고 王位 찬탈)
점필재 김종직, 김일손,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甲子士禍(1504), 폐비윤씨~戊午士禍의 잔당을 제거한다
@세조(수양대군)과 인연
.이시애의 亂(세조13년, 1467): 회령부사가 주동하였을때,
세조는 토벌군을 모집하였다(정부군, 관료들과 내통을 우려했다)
유자광을 발탁하여 큰 공헌을 세운뒤, 승승장구하게 된다
.세조는 유자광의 직설적인 話法에 감탄하여,
.建春門을 지키던 甲士로서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토벌군으로 자진하여 출전하여 세조에게 발탁되었다
병조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다
文科별시 응시자격을 부여하여 合格시킨 스캔들이 있다
庶子출신으로 핵심 보직에는 등용되지 못한다
훗날, 당시 과거시험 자체를 무효화 시킨다(세조 사망이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후, 兵曹판서로써 新進勢力의 기수로 등장했다
@예종, 남이 장군(1441~1468, 태종 외손자)을 처단한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장군의 詩를 문제삼아 政敵을 제거한다
남이(南怡)~강순(康純)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탄핵하여 제거한 뒤,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정국공신1등”으로 책봉된다
@중종반정의 성공으로 “정국공신1등”에 책봉된다
.성종: 폐비윤씨 퇴출반대로 임사홍과 유자광은 유배조치 되었다
쫏겨난 폐비윤씨 대문에서 큰절을 올린 올바른 시절도 있었다
유자광은 정의감으로 임사홍에게 항의를 해봤지만...
인수대비는 상소가 많아, 결국 賜藥을 내리게 된다
.연산군: 戊午士禍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정계복귀를 하였으며,
.중종: 반정의 1등공신으로 변신한다
.1506년 연산군 재위기간 동안의 잇단 士禍와 실정에 반감을 품은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등이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할 때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이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에 봉해졌다
@유자광의 최후
.1477년(성종8)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으나,
.1478년(이듬해)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고,
공신적(功臣籍)을 삭탈당한 뒤 동래에 유배되었다
.1481년 공신의 봉작을 회복하고,
정조사(正朝使)~등극사(登極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91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493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있으면서 성현(成俔)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했다.
.무오사화 이듬해(1507년)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훈작을 빼앗기고 관동으로 유배되었으며,
이어 경상도의 변군(邊郡)으로 이배(移配)되어 눈이 먼 뒤(장님)
귀양지에서 아들과 함께 生을 마감한다(1512년)
@유자광의 역사적 評價(戊午士禍)
.성종이후, 신진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게 되자
훈구세력은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의 제거를 꾀하게 되었다
.유자광도 한때 김종직(金宗直)과 사귀고 그(김종직)가 죽었을 때는 그를 추모하는 제문을 짓기도 했으나,
일찍이 함양에 놀러가서 시를 지은 뒤 현판(懸板)하게 했던것을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떼내고 불태운 일이 있어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던 터였다.
.1498년(연산군4)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있던 이극돈(李克墩)으로부터
스승의 문인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음을 듣고,
이를 세조의 찬위(簒位)에 대한 비유로 간주하여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윤필상(尹弼商)~신수근(愼守勤)등
사림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던 훈구세력과 외척을 모은 뒤,
김종직~김일손이 대역죄를 범했다고 연산군에게 고했다.
.김일손의 심문과정에서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 전체로 사건을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죄명과 형량 책정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오사화를 계기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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