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2. 세종로라이온스클럽 서동영 접견
겸재 정선, 안동김씨 후원
겸재 정선, 안동김씨 후원
@겸재 정선(1676~1759. 숙종~영조): 그림의 성인(畵聖)
.지필묵(붓, 먹, 종이): 필법+묵법을 혼용
.조선 성리학의 정착된후, 조선후기에 진경산수 그림이 등장
.남중국 문인화를 탈피: 남방화풍(묵법)~북방화풍(필법)
.고려 충선왕(만권당, 주자학의 대가 조맹부 초청하여 학자들에 전수)
당송 3대 문인(저수량, 구양순, 우세남)
양 그림을 잘그렸던 조맹부, 충선왕
이제현(주자학 전수, 전주이씨, 28세): 제자 1300명(시문서화)
.안평대군(28세): 문사철+시서화(쌍삼절)
꿈에 무릉도원을 본후, 안견(몽유도원도)에게 그림을 주문
.창강 조숙(율곡의 후배)
.삼연 김창읍의 제자(겸재 정선)...8년 선배(공재 윤두서):해남 낙향
.겸재(14세): 부친상, 과거 포기...先 안동김씨 퇴출
@청운동의 유래?
.경복고(청운동~묵인동)거주...효자동, 청운동, 옥인동
.율곡 생가: 청운동(조선 성리학 텃밭, 과거9번 장원)
율곡의 스승: 우계 성혼(청운중학교 거주), 구봉 송익필(궁정동)
.율곡 옆집: 무속헌(청음 김상헌~손자 김수항~4창:창집,창협,창흡,창업)
.삼연 김창흡(정선의 스승): 주역, 詩,書,畵, 벼슬을 거절(산림으로 은거)
.호: 삼연(철원 삼부연)~금강산~용문산...
.겸재 정선(율곡과 동갑): 사대부의 인생(과거낙방, 시서화 공부)
.송시열, 김만중의 기사환국(인현왕후 젊다, 1689년)
@겸재, 외조부 후원으로 그림(과거낙방), 갑술환국 율곡학파, 西人 집권
.칠서완독(사서삼경)
.연잉군(영조)의 그림교사(세자궁, 창의궁), 영조의 후원
.순조의 외조부: 겸재에게 周易을 배워, 난방이 안되어 찿지 않았다
@정선(겸재,71세)의 동문조도(東門組道, 1746, 이화여대 박물관)에는
.落山(낙산), 동대문, 전농동, 답십리, 왕십리, 성곽의 모습...
.멀리 아차산(峨嵯山)과 용마봉(龍馬峰), 면목동이 담겨져 있다
@겸재 정선의 작품 “진경산수화”
.병자호란 이전(전기): 중국화의 영향으로 흉내를 묘사했는데,
대표적인 모방작품이 안견 “몽유도원도”이다
.조선의 독립적인 화풍이 시작(겸재~김홍도)
.36세(1711년): 금강산 진경수도첩(13폭)
단발령(묵법+필법의 혼합작품): 힌산(골산)+흑산(草山)...혼합
周易에 능통한 결과(陰陽을 적용한 그림)
.선비화가 관아재 조영석(10년 후배, 함양군수, 환쟁이 거절)을 위하여
인물화, 풍속화 양보(거절), 훗날 겸재사망시 哀詞를 쓰다
.장안사(내금강)
.불정대, 백천교(외금강): 관동별곡 “이백의 詩, 려산 폭포보다 좋아”
.옹천(낭떠러지기 길, 해안가)
.14세(1716년): 종6품으로 관직 등용(천문학 조교, 30개월간 특채)
.58세: 북원(효자동, 과거급제 60주년 원로들의 회방연...)
.영조 어진~도산서원(외가, 퇴계가문)~한벽루(영월~무주로 옮겨)
.60세: 모친상(90세)으로 사직~탈상(62세)후,
.62세: 관동팔경~단양팔경(청풍, 영천, 영월, 단양(단양팔경)
.63세: 관동 11경 완성(1경: 분실)
.1738년(63세): 청간정, 천불암(금강산)
.1739년(64세): 진경산수화 절정기.....청풍계(이종 사촌에게 선물)
.1740년(65세): 삼승정~삼승조망~옥동척강(이춘제 선물, 영조)
광주(구멍)바위(양천현령 승진발령, 종5품, 영조, 가양동 허준공원)
독백탄(양수리 수종사)
.인왕궁 이사(옥인동 군인아파트): 조영석, 심사정과 옆집
.1742년(임술년): 후적벽부(우화동산), 적벽부 우화동산(소동파)
.76세~84세: 백락천(여산도), 정양사
@인왕산(338m)
.조선개국 초기에 한양천도 경복궁의 위치설정의
논쟁의 장소였으며, 정도전의 이론이 무학대사를 압도함으로써
불교가 크게 위축되어 장자 왕위승계에 많은 피를 흘렸다
.북악산(백악)을 주산, 酡酪山(타락산, 낙산)은 左靑龍, 인왕산을 右白虎
최초 仁王山을 일본인들이 仁旺山으로 개명한 것이다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77세, 60년간 화필의 결정체로써 노화가의 완숙기 작품이다
아마 인왕산에 큰비가 내린뒤 비가 개어가는 풍경으로 생각되며,
검은색 바위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일 것이다
*孔子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마음이 내키는대로 쫓아도 저절로 법도를 넘지않게된 경지라고 할까?”
.강희언(1738~1782))이 그린 “인왕산도”를 감상하면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멀리 바라보고...”
마치 늦은봄 평화로운 인왕산의 전경으로 볼수있지만,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힘이 넘치고 용솟음이 치는듯하다
.만포 심환지(1730~1802, 순조 영의정)의 칠언절구(題詩)
겸재의 작품을 애호하여 인왕산제색도를 소장하였으며
매우 검소하여 초상화조차 남기지 못하여, 후손들은 조상(심환지)의
제시가 적혀있는 정선의 그림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것이다
@1751,5,29, 절친했던 친구 사천 이병현이 죽었다
.승정원일기, 당시 날씨를 살펴보면 장마철이었다
그렇다면, 사천 이병현이 죽은직후 그린 작품일 것이다
.이병현은 겸재 정선의 홍보역할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이규상(1727~1799)은 사천 이병현을 평하다
“키가 크고 수염이 훌룡했으며, 용모가 둥실하고 위엄이 있어서 여느 시인들의 민첩한 모습과 달랐다.
詩는 천성을 얻어 근량이 무거웠으며 시구는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시의 거장이 여럿있었으나, 삼연 김창흡 이후에는 사천 이병현 한사람 뿐이었다”
.두사람의 우정(겸재~사천)
1740년, 양천현령으로 떠난이후 그림과 시를 주고받았다
*사천 이병현의 詩 중에서...
“망천은 唐나라 대시인, 문인화의 창시자 왕유(701~761)의 별장, 왕망천은 곧 왕유를 칭한다... ”
.소동파의 극찬 “왕유의 詩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속에 시가 있다”
.詩佛 왕유의 詩畵를 할 수 없어 아쉬운 표현이다
@“시화상간도”
.겸재(정선)의 그림에 사천(이병현)의 제시가 있다
“千金勿傳(천금물전)”이라 적혀있다
“천금이나 되는 큰 돈을 준다해도 남의 손에 넘기지 마라...”
.늙은 소나무 아래 상투를 맨 두 노인이 정겹게 담소를 나누고있다
(늙은 소나무, 굳센 바위, 맑은 물...좋은 벗의 상징이다)
*고산 윤선도의 五友歌(가장 친한 벗: 松, 水, 石, 竹, 月)
물은 구름이나 바람과 달리 “맑고 그칠데 없는” 벗이요,
돌은 꽃이나 풀과 달리 홀로 “변치않는” 벗이다
소나무는 “눈 서리를 모르는” 기개가 있으니 “땅속 깊이 뿌리가 있는” 벗이로다
.신돈복(1692~1779, 사천 이병현의 친척)의 “학산한언”
“겸재 정선의 號는 元伯(원백)이다.
어느날 사천을 찿아갔는데 몇천권의 중국고서들이 쌓여있었다
이 모든책은 정선에게서 나온것이네...
선비는 책을, 화가는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법... ”
.창암 박사해(1711~1778), 겸재와 사천의 합작품에 제시를 달았다
“어느쪽에 무게를 둘 수 없어 二老詩畵라고 적었다...”
안동김씨 후원
@미켈란젤로(1475-1564)을 후원한 로렌쪼 대공(후견인)
.정원에 버려진 목신 조각상(牧神: 목축을 관장하는 神)을 대리석으로
복원(복제)하던중 후견인(로렌쪼 대공)이 한마디 툭 던졌다
“여보게 미켈란젤로. 老人의 앞니는 대개 몇 개는 빠지는 법이라네!”
.미켈란젤로는 지체없이 목신조각상의 이빨 1개를 부러뜨리자,
영락없는 老人의 얼굴로 변한것이다
@로렌쪼 일 마니피코(1449-1492)
.1469년~20년간 메디치카의 권력자(피렌체의 명문가)이었지만,
.관직은 일체 맡지않고, 막대한 자금력으로 피렌체 정관계의 막후 실세
.예술에 조예가 깊어 “대공”으로 불렀으며, 재능이 뛰어난 젊은 예술가
미켈란젤로를 불러 자신의 대저택에서 함께 살면서 후원했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모두 메디치가 지원했다
@척화의 상징에서 최대관료 집안, 조선시대 예술후견인 가문이 있었다
.안동김씨, 반남박씨, 풍양조씨...벌열가문, 경화사족(京華士族)이 漢陽의
예술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특히 안동김씨는 “조선의 메디치家”이다
.장동 김문(壯洞 金門)은 안동(소산)에서 漢陽 淸風溪(청운초교 계곡)
.김상용(1561~1637): 청풍계에 와유암(臥遊庵)을 짓고 書畵를 즐겨
감상하였고, 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동생 청음 김상헌(1570~1652)은 척화 삼학사(척화, 충의)로써
손자(김수항)~증손자(김창집)의 영의정(숙종)을 지낸 명문가이다
@김수항(노론)은 기사환국(南人이 재집권)후, 진도에 유배되어 죽는다
.김창집도 부친(김수항)이 죽은뒤 벼슬을 멀리하였다가 南人이 失權한
갑술환국직후, 재기(우의정~좌의정~영의정)하지만 신임사화에 죽는다
@겸재 정선(1676~1759), “진경산수화”
.병자호란 이전(전기): 중국화의 영향으로 흉내를 묘사했는데,
대표적인 모방작품이 안견 “몽유도원도”이다
@김조순(1765~1832, 김창집의 玄孫, 순조의 장인)
.後안동김씨(장동 김문)는 순조~헌종~철종(60년간) 세도정치를 주도
.대표적 화가(이정, 이징)를 김상헌도 그림을 좋아하였다
.士大夫의 기본 덕목에 “학예일치”를 중요시 했다
.정조는 김낙정(洛渟)을 조순(祖淳)으로 바꾸고 호(풍고,楓皐)를 내렸다
곁에 두고싶어 지방관으로 파견을 하지 않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1780년에 사돈(순조의 장인)으로 간택되고, 詩書畵와 音樂에 관심이
많아 판소리와 기악에 흥미를 느껴, 詩를 짓고 거문고를 배웠다
.정조는 김조순의 글씨를 궁궐내부 “芙蓉堂(부용당)” 현판을 달았다
.김조순은 겸재보다 중국풍이 짙은 심사정(1707~1769)을 선호했다
@김수증(김상헌의 손자)은 서예, 금석문에 명성이 높다
.동생(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벼슬을 버리고, 화천에서 농사지으며 은일한다
.은둔의 삶속에서 멋을 추구했던 朱子의 행적을 모방한 것이다
.谷雲이라 칭하고, 조세걸(평양출신 문인화가)에게 경치좋은 9곳을 정해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를 그리게 하였다
(띠집, 백성들의 농사짓는 모습, 닭, 개, 소, 나귀, 가축, 동물...)
.김수증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것인가?
일일이 지도하면서, 거울에 반사되듯 사실적으로 그리게했다
.당시 지식인 층에서 九曲圖도 유행이었다
.朱子를 흠모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의 無爲九曲圖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많은 사람들이 그린것이다
.栗谷도 해주 석담(황해도)을 담은 고산구곡을 그리게 하였으나,
구곡도에는 조선의 산천을 사생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김창협(김수증의 조카)의 곡운구곡도 발문을 보면,
“곡운구곡도를 통하여 김수증의 진경산수의 개념을 실천으로
보여줬다면, 김창협은 이렇듯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김창업(1658~1721,김창협의 동생),김창흡...6형제는 백악사단을 만들어
.18c 조선화단에서 각각 풍속화, 산수화 대표 화가들을 후원하였다
.사실주의를 구현했던 관아재 조영석(1686~1761), 겸재 정선...
.사천 이병연(1671~1751)...시인, 묵객들과 문학과 예술을 논했다
@삼연 김창흡은 겸재 정선을 대동하고, 묵객들과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금강산 초입, 금화현감(사천 이병연)도 여행에 동참하여
“해악전신첩” 금강산 화첩을 만들어 화폭마다 제시를 붙였다
@김유근(안동김씨 1785~1840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자하 신위, 권돈인, 추사 김정희와 절친하여 書畵를 즐겼다
@김이도(안동김씨, 1750~1813)도 예술활동에 후원하였다
.석농 김광국(中人 컬렉터), 신위(申緯 1769~1847 文書화가)와 친하여
.자하 신위는 집안에서 대대로 간직해오던 “부춘산거도(황공망 작)”를
김이도가 간절하게 원하자, 몰래 주었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紫霞 申緯
.고려말 신숭겸의 후손이다
.옹방강을 만난뒤 모든 작품을 태워버리고, 공부에 더욱 정진하였다
.감히 흥선대원군이 뽐낼수 없을 수준의 詩. 文章, 畵, 書에 뛰어났다
*申緯: 題錦城女史藝香畵蘭 (난초그림을 보면서...)
.畵人難畵恨 사람은 그려도 恨은 그리긴 어렵고
.畵蘭難畵香 난초는 그려도 香氣는 그리기 어렵네
.畵香兼畵恨 香氣를 그린데다 恨마져 그렸으니
.應斷畵時腸 이그림 그릴때, 그대 애가 끊겼을테지
.난초의 삼전지묘는 최고의 걸작이다
@김흥근(안동김씨 1796~1870, 헌종~고종)
.세도정치(안동김씨)를 믿고 반자하게 굴어 탄핵을 받아 유배된다
.특히 골통품 서화를 많이 소장하였고,
.소치 허련(1809~1893 진도 화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을 위하여
한양의 집을 마련해 주었고, 창작활동의 후견인을 하였다
.소치 허련은 김흥근의 서화 수장고 역할을 했던 별장에 놀러가서 컬렉션을 감상하고 감식하였다
.별장은 玄對樓(현대루, 삼계동 정자)는 훗날 흥선대원군(고종)에게 빼앗겨 石坡亭으로 개칭되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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