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30. 사무총장 조흥식(9월의 마지막 날, 지구본부 표정)
남명 曺植(함양), 智異山 유람
남명 曺植(함양), 智異山 유람
1.남명 曺植(1501~1572, 합천출생)
@左안동 퇴계(이황)~右함양 남명(조식): 동갑내기, 道學의 쌍벽이다
.智異山 덕산(德山)의 위대한 處士, 서재(山天齎), 德川書院
“王妃를 배출시킨 가문보다 대제학 가문이 높고,
대제학 가문보다 문묘 배향자 가문이 더 높고,
處士를 배출한 가문은 가장 높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제자이자 孫子사위 의병장 곽제우도 임진왜란에 크게 활동하였다
.남명(조식)의 평상시 휴대품: 방울(경계심)+칼(욕심을 제거)
생각+행동의 一致를 강조한 것이다
@父親이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여 한양으로 진출한다
.己卯士禍(조광조 사건)로 叔父(조언경)가 죽고, 父親은 파직된다
.妻家(김해, 외가)로 내려와 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양성한다
.회재 이언적과 退溪의 추천으로 등용되었으나, 거절한 백면 서생
정통유학, 백가사상, 노장사상을 통달하였다
“한유(閑遊)하는 孔子” 별칭을 얻는다
@묘소는 명당(二水三山),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제자들이 호화로운 비문을 4개를 세웠으나, 3개는 쓰러져 있다
.평소 겉치레, 허명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不出仕(불출사)를 고집하던 5년후, 한양으로 상경하였는데
.思政殿에서 명종에게 간하여 물의를 일으킨다
“임금이 成年이 되어 親政을 해야지, 아녀자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거두라는 뜻이다)
.小說 임꺽정(벽초 홍명희)에 삽화로 자주 등장되는 인물이며,
栗谷(이이)이 평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德川書院: 산청군 시천면(남명 曺植의 위패를 봉양한 곳)
@1576년(선조9)에 창건, 1609년(광해군1) 賜額을 받았다
.칠어절구(기둥7개, 주련)
.덕천書院과 마주한 덕천강변에는 洗心亭과 너럭바위(濯足臺)
.훗날, 제자 최영경(崔永慶)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기축옥사, 정여립사건으로 고문옥사, 1589년)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小說 南部軍(이태의 작)에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가 덕산이다
3.남명 曺植의 自己 修養法은 實行과 實踐을 중요시 하였다
@명월 황진이는 智異山 유람후, 남명 曺植(영남학파)을 찿았다
.제자에게 “天下에서 제일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 무엇이냐?”
“花柳關門(화류관문, 여색의 관문), 쇠와 돌도 녹여버린다”
“여자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계시켰다
@칼과 방울을 찬 선비
.惺惺子 방울을 차고 다녔다(성성자: 스스로 警戒하다)
.경의검(敬義劍)을 휴대하여, 敬과 義를 목숨처럼 여겼다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敬이요,
밖으로 行動을 결단하는 것은 義이다)
@패검명(佩劍銘)에 글씨를 새겨 넣은것이다
.革帶名(혁대명): 舌者泄 革者結 縛生龍 藏漠沖
(설자설 혁자결 박생용 장막충: 혀는 새는것이요,
가죽은 묶는것이니, 살아있는 龍을 묶어서 깊은곳에 감추라)
“장부란? 모름지기 세치의 혀를 제대로 가눌수 있어야 한다!”
.座右銘(좌우명): 庸信庸謹 閑邪存誠 岳立淵中 燁燁春榮
(용신용근 한사존성 악립연중 엽엽춘영)
“언행을 신의있게 하고 삼가며, 사악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옴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4.남명 曺植과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이 남긴 남명 曺植(해인사 창수시서문)
.고향길에 충북 보은에 대곡(성운)한테 잠시 들렀는데,
.고을 원님(동주 성제원)과 합석하여 初面에 농담을 하였다
“老兄은 참으로 한 벼슬자리에서 오래도 계시오, 그려...”
.원님은 성운(대곡)을 가르키며 대꾸했다
“이 늙은이에게 붙잡혀 그랬소만, 금년 8월 보름날에
내가 海印寺로 가서 달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릴것이니,
노형이 그리로 오실수있겠소?”하며 제의하자, 쾌히 응답했는데
.남명 조식이 소를 타고 海印寺에 갔더니, 박지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남명 조식, 智異山 遊覽(유람)
@1558년 여름(명종13), 南冥 曺植은 제자들과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좌퇴계 우남명” 이황과 함께 16세기 대표 사림파 학자로써
경의(敬義)를 사상의 핵심으로 학문의 실천에 주력하였다
.2012년, 지리산 둘레길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274km)
.지리산은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불려왔고,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0번 이상 지리산을 다녀왔고,
말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잡았다
그의 묘소 또한 지리산 자락에 있다
@450년전, 지리산 기행문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가정(嘉靖) 무오년(1558) 첫 여름,
진주 목사 김홍(金泓) 홍지(泓之),
수재(秀才) 이공량(李公亮) 인숙(寅叔),
고령 현감 이희안(李希顔) 우옹(愚翁),
청주 목사 이정(李楨) 강이(剛而)...
나(남명)는 함께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산 속에서는 나이를 귀하게 여기고 관작을 숭상하지 않으므로,
술잔을 돌리거나 자리를 정할때에도 나이로서 하였다
혹 어떤때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10일, 우옹이 草溪에서 내가 있는 뇌룡사(雷龍舍)로 와서 함께 묵었다
11일, 내가 있는 계부당(鷄伏堂)에서 식사를 하고 여정에 올랐는데,
아우 조환(曺桓)이 따라왔다
원우석(元右釋)은 일찍이 중(스님)이 되었다가 환속하였는데
지혜롭고 깨달음이 있으며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불러서 함께 길을 떠났다.
@이공량(1500~?)은 조식의 자형(姊兄)이며,
.이희안(1504~1559)과 이정(1512~1571)은 조식의 문인이었다
.뇌룡사와 계부당은 합천에 소재한 강학처이다
(남명이 48세~61세까지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길렀던 곳)
.중(스님)으로 있다가 환속한 원우석을 깨달음이 있고
노래를 잘 부른다는 이유로 동행한 것도 주목된다
.이후의 여정은 진주를 거쳐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쌍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저녁 무렵 진주에서 묵었다.
.일찍이 홍지와 약속하여, 사천(泗川)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蟾津江)을
거슬러 올라, 쌍계(雙鷄)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말고개(馬峴)에서 우연히 종사관(從事官) 이준민(李俊民)을 만났다
이준민은 호남에서 부친을 뵈러 오는 참이었는데,
그의 부친은 바로 인숙이다.
홍지는 벼슬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인숙의 집에 투숙하였는데, 인숙은 바로 나의 자형이다
.12일, 큰 비가 내렸다.
홍지가 편지를 보내어 머무르게 하고 아울러 음식을 보내 왔다
.13일, 홍지가 찾아와 소를 잡고 음악을 베풀어 주었다
우옹과 홍지와 준민이 함께 다투듯이 마음껏 술을 마시고 파하였다
.14일. 인숙과 더불어 강이의 집에서 묵었다
강이가 우리를 위해 칼국수, 단술, 생선회, 찹쌀떡,기름떡을 마련했다
.16일, 섬진강에 도착, 악양현을 지나 삽암(鍤岩)에 도착했다.
삽암에서 조식은 고려시대 최충헌의 집권기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절개를 지킨 한유한(韓惟漢)의 충절을 기렸으며,
도탄(陶灘)에서 선배 사림파 학자 일두 정여창(鄭汝昌)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16일, 새벽 빛이 조금 밝아질 무렵 섬진(蟾津)에 다다랐다
잠을 깨었을 때에는 벌써 곤양(昆陽) 땅을 지나 버렸다고 한다.
아침 해가 처음 떠오르니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 듯하고
양쪽 언덕 푸른 산에 그림자가 물결 밑에 거꾸로 비치었다.
음악을 연주하니 노래와 퉁소 소리가 번갈아 일어났다.
멀리 구름 낀 산이 서북쪽 십리 사이에 나타났는데
이것이 두류산의 바깥쪽이다
@서로 가리키며 바라보고 기뻐하여 뛰면서
“방장산(方丈山)이 삼한(三韓) 밖이라 하더니,
이미 이곳이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 라고 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현을 지났는데 강가에 삽암이 있다
.이곳은 녹사(錄事) 한유한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 왕조가 장차 어지럽게 될것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징소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으나,
하루 저녁에 숨어 달아나 간 곳을 몰랐다고 한다.
아!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데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낮쯤 되어 배를 도탄에 정박시켰다
.도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일두 정여창의 옛 거처가 있었다
정여창은 바천령(天嶺) 출신의 유종(儒宗)이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었으나 나중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나아갔다가
교동주(喬桐主,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과 십 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학자의 행~불행(幸不幸)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교동주? 1506년(중종반정)에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된 연산군을 칭함
*일두 정여창(鄭汝昌)의 별장을 그린 이징(李澄)의 그림이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이다
.19일, 조식은 청학동(靑鶴洞)으로 들어갈것을 계획하였다
호남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합세하는 장면이 보이며,
.21일, 호남에서 온 여러사람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절의 누각에 앉아서
불어난 시냇물 구경을 하였다
지리산은 영남선비와 호남선비들의 소통시키는 공간이었다
.19일, 아침을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인숙과 강이는 모두 병 때문에 그만두었다.
이것으로 보면 진실로 십분 뛰어난 승경(勝景)은 참된 연분이 없으면
신명(神明)이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호남선비(4명)과 백(白)~이(李) 양군이 동행하였다
북쪽 오암(㹳巖)을 올라 나무를 잡고 잔도(棧道)를 타면서 나아갔다
원우석은 허리에 맨 북을 두드리고, 천수(千守)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이들을 따라가면서 전대(前隊)를 이루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것처럼 줄지어 전진하여 中隊를 형성하였다
강국년(姜國年)과 요리사와 종들과 음식을 운반하는 수십명이
後隊를 만들었다. 중 신욱(愼旭)이 길을 안내하면서 갔다
.조식은 불일암(佛日菴)을 청학동으로 보았다.
.향로봉(香爐峯), 비로봉(毗盧峯), 학연(鶴淵)...청학동을 둘러싸고 있는
경치들에 대해서도 붓을 아끼지 않았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서서 서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벼랑을 깎아내어 만길 낭떠러지로 우뚝솟아 있는 비로봉
.청학(靑鶴)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다가 하늘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다
.조식은 유람중에도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과 군졸이 유망(流亡)하는 것이
현실인데 자신은 한가로이 유람함을 자책을 하기도 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류산 중심에 있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daum blog "늘빛사랑 조흥식"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늘빛사랑 조흥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0930. 추석명절 메시지(9,30~10,4) (0) | 2023.12.24 |
---|---|
2020-0930. 추석연휴 도봉산 종주 (0) | 2023.12.24 |
2020-0919. 양평 청계산 (0) | 2023.12.24 |
2020-0829. 북한산 의사봉코스 (0) | 2023.12.23 |
2020-0729. 북한산포럼 (0) | 2023.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