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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0-1016. 지구봉사단 회의

by 조흥식 2023. 12. 26.

2020-1016. 지구봉사단 회의

예천 이야기(慶北)

 

 

 

 

 

예천 이야기(慶北)

1.예천(물맛이 좋아...)

@초간정(초간 권문해, 1582)

.최초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 11년간 국정/개인일기(초간일기)

.49세 낙향, 금곡천변에 초간정사 건축(부인장례 90일장을 지냈다)

 

@용문사(신라48대 경문왕)

.두운조사는 용문사를 창건후, 희방사(소백산)도 창건하였다

.나무둥치 사이에서 은병(16만냥)을 캐내어 용문사를 지었다

.왕건이 잠시 머물때, 길목바위 위에 이 앉아있다가 반겼다

.왕건은 천하평정후 크게 중창을 약속을 했는데(936년 통일)

훗날 용문사를 중창하고, 매년 쌀150섬을 하사하였다

 

@금당곡은 병화가 들지않는 땅으로 임진왜란에도 온전하였다

.당나라 장수가 극찬하였다

(입구는 고개, 우측에 고개, 金鷄가 앞에, 玉犬이 뒤에...마치, 중국 양양 金谷과 같구나...)

.금당실 뒷산 무쇠장등에는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쇠말뚝이 있다

(금당실에는 인재가 많아, 중국에 폐가 될것이다)

 

@금당실 함양박씨의 집(태랑금의 집)

.태안군수(박정시)의 꿈에 낭자가 나타난다

제 묘앞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세요...”

.거문고를 만들자 켜지않아도 소리가 저절로 울려 태랑금이다

.경상감사(이유인)가 빼앗아 줄을 바꿨는데 소리가 나질않았다

.이유인 가문은 망하였고, 줄없는 거문고는 함양박씨 가문에서 보관한다

 

@낯선 곳에서 同名異人(동명이인)을 만나면 쉽게 가까워진다.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잔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金殿(금전): 금당이 있는 대웅전

*碧宇(벽우): 푸른 하늘

 

@이은상의 , 홍난파가 을 붙여 歌曲으로 널리 애창되면서

.金剛山 장안사는 분단 이전 사람들에게 생전에 꼭 다시 찾아봐야 할

꿈의 대명사요, 분단 이후 말만 들어본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들리는

이상향으로 자리잡았다.

.통일이 되면 모두 가보고 싶은곳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가슴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서산대사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장안사는 우리 민족에게 정겨운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장안사라는 이름은 종교를 초월하여 어느곳에서 만나도

반가운 사람의 얼굴처럼 다정하게 느껴진다.

.부산 장기의 불광산에서 유서깊은 장안사를 만나 반갑게 느꼈던 기억은

바로 알고있는 이름을 만났기 때문이다.

@낯설지 않은 느낌, 낯익은 이름

.천안의 성남, 강진의 대구, 장흥의 부산, 예천의 장수, 제주의 남원,

진주의 금산, 부여의 마산, 영동의 양산, 서천의 판교...

.경상도 북부 내성천 주변에 용문사와 장안사가 있다.

.내성천이 마을을 휘돌아 안고 흐르는 물돌이 마을이다


@예천의 의미
.인삼은 금산이나 풍기, 고추가 영양, 수박이 고창, 모시가 한산,

녹차의 보성, 똥돼지 제주도...특산물과 이미지가 있다

.지명에 금()자가 있으면 금이 나고, ()자가 있으면 구리가 나고, ()자가 있으면 온천수가 쏟아진다.
.예천(醴泉)은 지명으로 보아 술이 맛있는 곳이다.

단술 예()~샘천(): 술맛을 달게하는 샘이 있는 고장이라는 뜻

술이 맛이 있으려면 우선 물맛이 좋아야 하는데

예천군에 감천(甘泉)면 고을이 있어 천연적인 조건을 갖췄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금천이 시원한 계곡과 바위틈에서

몸을 불려 낙동강으로 흘러가며 지하에 흘러들었다

.2000년 개장한 예천 온천은 국내 최고의 알카리수를 자랑한다
.좋은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 목표 지향의 집중력이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천에 국궁의 명수들이 많은것이다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고추 대신 활을 매단다는 이야기는 예천 지방에만 유행하는 말이다

예천 각궁(국궁)4개월간 만들어 400만원에 판매한다


@삼국시재 신라의 최북단, 물과 술의 합성어 地名 수주(水酒)현은

.통일신라, 경덕왕 16(757)부터 예천으로 불렀으며,

.고려시대, 여러번 다른 이름으로 개명되어

.조선 태종 16(1416), 예천으로 옛이름을 회복하였다


@예천의 자랑, 낙동강 1300리길

(1)내성천과 회룡포

영주~안동~문경~예천에 분지를 만들고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흐르는 물의 양도 많고 넓이도 넓은데도 강이 아닌 천이다.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 합류하는 삼강나루에서 내성천이 끝난다

내성천에는 의성포라는 섬아닌 섬이 있다.

조선시대 귀양지였으나 조선말 고종대에 의성 사람들이 처음으로

삶의 터전을 닦으면서 의성포라 했다.

 

고대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부여와 닮은 지형을 찾아

나라라 이름짓고 자기들이 살던 느낌을 받으며 향수를 달랬던 것이다

의성포는 지방자치제도의 냉정한 현실속에서 그 이름을 잃었다

외지 사람들이 의성포는 의성에 있는것으로 오인하기 때문에

최근에 회룡포라 이름을 고치고, 이정표도 회룡포로 바꿔 달았다

중부 휴게소음성 휴게소로 바뀐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회룡포는 용이 승천하기 전 힘을 받기위해 휘감았던 몸을 힘차게 틀어 펴는 모습이다.

맞은편 비룡산 정상의 1전망대에서 내려보면 물방울 다이아 목걸이가

다소곳이 초록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목에 걸려있는 모습이다.

영주의 무섬마을을 크게 반원으로 휘감아 힘을 받은 내성천이

이 곳에서 산을 안고 한바퀴 깎아질러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 모양을 만든 것이다.

손아귀로 꽉 쥐면 금방 끊어져 동그란 섬이 될것같은 회룡포 마을은

그 많은 세월을 흐른 물줄기도 겨우 10도 정도의 한뼘을 뚫지 못하고 350도만 에돌아 뱀처럼 흘러 간다

2전망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은 또 하나의 신비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산태극 물태극의 극치를 자랑하고 있다

이 곳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은 어머니 자궁속 태아의 모습이다.

비룡산을 향해 뻗어있는 마을은 태아의 머리,

물이 뚫지 못해 육지로 이어진 가는 생명선은 태아의 목이다.

그 앞산으로 뻗어나간 줄기는 태아의 몸통인데 사람이 살지 않은

산중 2전망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이라 움직임이 없이 진중하고,

움직임들은 뱃속 태아의 활달한 생명력이다.

산태극 불태극이 이루는 생명의 신비는 볼수록 심오하다.

이 태아를 감싸고 흐르는 내성천의 물은 생명을 키우는 양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맑아야 한다.

내성천은 눈이 부시도록 맑고 깨끗하다

 

(2)비룡산

의성포가 회룡포일수 있는것은 비룡산 때문이다.

비룡산에서 회룡포를 조망한후, 회룡포마을에서 비룡산을 올려다 보라

외형에 나타난 형세만으로도 비룡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해발 200m의 낮은 산으로 장안사, 원산성, 봉수대 군사유적지가 있다

산비탈 도량(道場) 장안사는 민초들의 처절한 삶의 역사 현장이다

마한(삼한시대)이 백제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시대 신라의 최북단으로 고구려, 백제와 숱하게 싸운 접전지역이다

그래서 예천 곳곳에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찰이 있다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 남편을 잃은 아낙네,

 

아버지를 잃은 어린것들의 아픔을 달래 줄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장안사는 전쟁터 원산성 가까이 알맞은 곳이다

장안사는 의상대사의 제자 운명선사가 설립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둥근 원으로 쌓아 원산성인데, 토석혼축(土石混築 +)이다

성벽은 높지 않지만, 천혜의 요새를 이룬다.

산 정상에서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고 내성천이 감싸고 돌아

방어에도 도움이 된다. 굳이 해자가 없어도 내성천이 1차 방어의 역할을 충실히 해 준다.

산의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봉화대: 고려중엽부터 통신수단으로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

연기와 횃불의 로 위급한 상황을 알렸는데, 평상시 1(),

적이 나타나면 2,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 국경을 넘어오면 4,

적과 접전을 하면 5거를 올렸다. 그래서 봉돈에는 다섯개의 구멍을 내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봉돈에는 항상 말똥 쇠똥 늑대똥 등을 준비해두었다.

빗물에 젖어도 잘 타서 장마철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재료였다.

만일 비상사태 연기나 불로 연락하지 못할때에는

봉수를 관리하는 봉수꾼이 직접 달려가 연락을 취해야 한다

 

(3)예천권씨 宗宅과 초간정

권씨를 말하면 안동권씨를 떠올린다.

大邱의 공산에서 김락, 신숭겸의 희생을 치르며 극적으로 살아난

왕건이 후백제를 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

고창(古昌 안동의 옛 이름)의 세 호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내린 성씨가

안동 김씨(김선평), 안동 장씨(장길) 안동 권씨(김행)始祖이다.

견훤(후백제)의 막강한 힘에 눌려 수세에 있었던 자기(왕건)에게

안심을 시켜 준 고장에 대한 영원한 정표로 고창군을 동쪽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안동(安東)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안동권씨는 그렇게 왕건의 사성(賜姓)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천권씨는 안동권씨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예천권씨는 원래 흔()씨였다.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예천의 호장이었는데 안동권씨의 집안으로 장가들었고,

그의 3세 흔창수와 5세 흔승조 역시 안동권씨와 혼인을 맺었다.

6세 흔섬에 이르러 고려는 제29대 충목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묘하게도 충목왕의 휘()가 흔()이었다.

국왕의 이름을 성씨로 사용하는 것은 불경죄나 다름없기 때문에 부득이 성씨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흔섬(昕暹)은 외가가 안동권씨이고 시조와 선대 할아버지도

안동권씨와 혼인을 맺었기 때문에 권씨 성을 택하고

본은 세거지(世居地)명을 좇아 예천으로 하여 안동권씨와 구별하였다.

예천권씨는 손이 귀하여 번창하지 못하다가

5세 권선(權善)대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한다.

다섯이라는 숫자와의 인연을 예감했음인지 권선은 다섯아들 이름의

항렬을 다섯오()자로 하여 오행, 오기, 오복, 오윤, 오상으로 지었다.

5세손의 다섯아들 이름에 들어있는 다섯 오().

이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조정에서는 또 다섯 자를 이용하여 五福門이라 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권오복이 무오사화(1498)에 김종직의 문인(門人)이며

김일손과 친하다는 이유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극형을 당했다.

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가 안동 권씨로 흡수되어 잠시 아픔을 겪었지만

권오상의 손자 권문해는 다시 가문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권오상은 용문면 죽림리에 예천권씨 종택을 지을 때 후손 중에

만석꾼의 富者가 나는 터당대의 學者가 나는 터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학자가 나는 자리를 택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손자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최초의 한국학 백과 사전과 초간일기라는 친필 일기를 남겼다.

대동운부군옥은 세종18(1436)에 원나라 음시부(陰時夫)

운부군옥을 번각한 것을 모방하여 엮은 백과사전이다.

단군 이래 선조대까지의 사실(史實)을 모아 지리, 국명, 문학, 예술,

국호, 성씨, 효자, 열녀, 화초, 동물에 이르기까지 11개항의 분류법으로

운자에 맞추어 배열한 이 책은 2020책으로 문학은 물론 조선시대 인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초간 일기는 작가의 개인 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놓은 일기이다

.당시 政治, 社會, 壬辰倭亂의 상황도 소상히 기록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권오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鼈)

대동운부군옥의 자매편이라 할수있는 해동잡록을 집필하였다

 

@예천은 안동과 풍속이 같아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많다

.용궁면 소재지에 고래등 같은 권오상이 건축한 예천권씨 종택이다

.입구에는 50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로써

神仙과 어울려 노는 선인농학(仙人弄鶴)의 명당이라 한다.

 

@일두 정여창 생가(함양)는 집터도 넓고 부속 건물도 많아,

.웬만한 강원도 산골마을보다 커보여 건물간의 위계를 중시하는 구조다

.건물의 위치와 배열이 ㅁ자구조로써

경상도 북부지방의 가옥은 본채와 익사(翼舍)의 관계로,

또는 건축물의 기능에 의해 위계가 나타난다.

.백승각(百承閣)에는 대동운부군옥의 판목 677매와 옥피리,

자치통감강목 전질 120, 초간일기, 해동잡록 등이 소장되어 있다.

.평지위에 우뚝 선 절벽이 병암정도 명소다.

.부근에는 초간정의 현액은 정면의 초간정사보다 개울을 향한 석조헌(夕釣軒)이 더 운치있다

선조 15(1582)에 지은 건물이 壬辰倭亂과 광해군 때 소실되어 1870년에 중수하였다

.49세에 낙향하여 많은 저술을 남긴 고상한 느낌이다.

@초간정의 재미있는 전설

.왼쪽 두번째 기둥에 있는 선명한 도끼자국 때문이다

.장고춤을 추던 기생이 물에 떨어져 죽자, 그의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
죽림리 예천권씨들이 정자주위에 100바퀴 도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하자, 어느 초립동이 99바퀴 돌고

물에 떨어져 죽었다. 그 후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가 초간정을 100바퀴 돌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을 듣고 난간을 돌다가 물에 빠져 죽자, 그 부인이 도끼로 찍었다.


(4)용문사

.예천의 진산 용문산(해발782m)과 천년고찰 용문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예천군 산천조에 용문산을 기록하였다

(신라 고승 두운이 용문산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나가는 길에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

동구에 이르니 홀연히 이 바위위에 나타나 맞이하므로 용문산이라고 불렀다)

.태조 왕건은 두운선사의 법력(法力)을 잘 알고 있었으며,

.소백산의 희방사를 창건한 신라말기 두운선사~두운선사를 위하여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후 칙명으로 절을 중건하고 매년 쌀 150석을 하사하였다.

.이후 용문사는 고려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크게 번창하였고,

대장전(보물 145), 윤장대(보물 684), 용문사 교지(보물 729)

목각탱(보물 989)...유서깊은 사찰의 사격(寺格)을 자랑한다.

.대장전(보물 145)은 사찰, 서원, 종가에는 장서를 보관할 전각이 있다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서각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고,

예천권씨 종택 백승각~장서각에 초간 선생의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다

.용문사에는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수장하기 위한 전각이 있는데

이것이 보물 145호인 대장전으로 현종 11(1670)에 중수하였다

.윤장대(보물 684)에 유일하게 회전식 윤장대가 있다

.목각탱화(보물 989)는 불교에서 부처, 보살의 초상, 경전의 내용이다

용문사 벽에는 그림이 아니라 나무에 조각한 것이다.

숙종 10(1684)에 조성한 가장 오래된 탱화이다

.보물 729(교지, 敎旨)

조선 임금이 4품이상 문무관에게 내리는 사령(辭令)인데

용문사에는 세조3(1457)에 내린 사패교지(賜牌敎旨)가 있다.

사패교지란? 고려~조선시대 왕족, 공신에게 전지(田地)나 노비를 하사하거나,

전공을 세운 향리에게 부역(賦役)을 면해주는 것을 임금이 확인하여 내린 문서를 말한다

 

(5)석송령(천연기념물 294)은 수령 600년이가

.600년의 풍상을 겪어온 소나무는 아직도 청춘이다.

.막걸리를 좋아해 주민들이 매년 10말이 넘는 막걸리는 부어 준다

.석송령은 용이 되어 승천할 날을 꿈꾸고 있는 듯 용의 몸통을 닮은 반송(盤松)의 날개가 싱싱하다.
.이천 백사면 수령 270년의 반룡송(蟠龍松천연념물 381)도 유명하다

반룡이란?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디

.석송령은 600여년 전 홍수로 석간천(石間川)에 소나무가 떠내려오자,

석평(石坪)마을 사람이 건져 이 곳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신령스런 기운까지 품어 석평의 신령한 소나무란 뜻으로 석송령이다

.1920년경 이수목(李秀睦)이라는 노인이 후사가 없자,

자기 땅 1500평을 나무에게 기증하여 나무는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국가에 매년 1만원 가량의 재산세를 납부하며,

그 땅의 소출로 마을 학생들에게 석송령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인재 양성의 덕을 쌓고 있다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 수령 500년 팽나무가 있다

4000여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천연기념물(400)로써 황근목(黃根木)으로 칭하고 있다

 

@예천에는 없는것이 없다

.내성천~금천이 흐르면서 생산되는 쌀이 풍부하고,

.산비탈 경작지에서 생산한 마늘, 고추는 예천땅을 부유하게 하였다

.경사가 급한곳은 사과나무를 심어 일교차가 심한 산중의 특산물이며,

옛부터 식량 생산이 용이한 곳은 강자들에 의해 유린당하기 쉬웠다.

.삼국의 혼란기에 죄없이 죽어간 병사들이 많았고

버려지듯 묻힌 무덤은 무심한 세월에 마멸되어 숲속에 버려져 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지도자들은 도량(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예천의 구경거리

.국보급 문화재: 보문사, 명봉사...용봉향교, 무이서당...

.용궁서원: 전학후묘의 전통과 건물의 위계에 따라 일자로 배치한

서원 구조의 전범을 엿보기에 좋은 곳이다.

퇴색한 기둥에 단청을 하지 않아 옛스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옥천서원: 최근에 개축하여 화려한 맛과 경제적 여유를 느끼게 한다.

공방전, 국순전 등 가전체 소설을 쓴 임춘 선생의 문학적 업적과

생애를 음미하기보다는 임()씨들의 최근 행적을 알아보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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