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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0-1112. 원로위원회(기흥골드cc 일만호, 호원)

by 조흥식 2023. 12. 31.

2020-1112. 원로위원회(기흥골드cc 일만호, 호원)

水落山 鷺江書院(박태보, 박세강, 박태체)

 

 

 

 

 

水落山 鷺江書院(박태보, 박세강, 박태채)

@水落山의 유래?

.비온뒤 물이 계곡에 고이지 않고 낙수물처럼 떨어져

빗물이 지체없이 흘러 버린다는 뜻이다(계곡에 물이 없다)

.수락산에는 정재 박태보와 남계 박세체를 모신 노강서원과 박세당 古宅이 있으며,

梅月堂 김시습과 인연이 많은 곳이다

.동쪽편 계곡 靑鶴洞의 풍광은 비교적 수려한 편이다

 

@鷺江書院(박태보, 박세채)

.서계(박세당)2째아들(정재 박태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남계 박세체를 배향한 賜額書院으로 정조가 내린 懸板이다

 

*정재 박태보(박세당의 아들)

학문이 깊고 성품도 강직하여 인현왕후 폐위(숙종15, 1689)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던중 鷺梁津 부근에서 순절하였다(己巳換局, 우의정)

숙종21(1695) 서원을 짓고, 숙종23(1697)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鷺江이란? “백로가 즐겨찿는 강변을 의미하며,

*鷺梁津이란? “백로가 노닐던 곳, 물고기를 낚던곳을 말한다

명칭이 약간 변형되었다(노들길, 노들섬...)

., 박세당 고택은 韓國動亂(6.25)에 소실되어 최근에 재건하였다

.한때, 梅月堂(金時習)을 제사하던 淸絶寺로 이용하였으나,

興宣大院君(고종)에 의해 書院이 철폐된 수모도 겪은바 있다

 

@서계 박세당 종택(반남박씨 서계공파 종택)

.父親(박정)이 인조반정 공신 책록으로 조정에서 하사받은 땅에

5세손이 종택을 건축한것이 6.25사변에 불타고 사랑채만 남아있다

.앞마당 은행나무는 수령 400년이 지난 고목으로 매우 우람하다

.종택의 좌향이 서쪽인 이유는 도봉산과 중랑천을 바라본것이다

.박정의 4째아들 서계 박세당은 인조7(1629)에 태어났다

 

.현종~숙종시대 유학자, 중농주의 실학자로써 손수 농사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색경이 유명하다

.특히, 저서중에서 통설(사변록)에는 중국 고전을 담고 있는데,

大學中庸에 대한 견해가 두드러져 당대 주류세력(노론)들이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아쳐 유배되었으나,

후학 이인엽의 상소로 해배되어 돌아온후 3개월만에 죽었다

 

*斯文亂賊이란?

儒敎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비난하는 말이다

老論(집권층)政敵 南人少論을 정치적 탄압하는 명분으로 이용하여 숙적을 제거한것이다

.당시 少論(서계 박세당, 백헌 이경서, 남계 박세채, 약천 남구만...)

남구먼의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

 

*박세당이 죽은 이유는 백헌 이경석 신도비문과 관련이 있다

백헌은 청태종의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 비문을 쓴 장본인이다(丙子胡亂이후, 인조17, 1639)

사실은 마지못해 비문을 쓰게된 것이데,

이때 우암 송시열은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데 신경쓴 것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백헌은 송시열의 비난에 직접 대응하지 않았다

비문에서 이경석은 老成人, 君子의 상징인 鳳凰으로 비유했고

송시열은 不祥人, 봉황을 모욕하는 올빼미로 풍자하기도 했다

이에 老論이 발끈하였다

老論의 영수(우암 송시열)를 모욕했다고 생각한 老論파들은

서계 박세당을 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유배를 보낸것이다

.매월당(김시습)이 동봉에서 최초 은거하여 초기 아호(東峰. 동봉)이고,

박세당은 서쪽편 계곡에서 수련하여 西溪()로 정했다

 

@청풍정유지

.종택 위편에 있으며, 박세당이 김시습을 추모배향을 위해 청절사를 짓고

그 앞에 정자를 만들어 유생들과 학문을 강론했다

.맑은 바람(청풍)매월당의 맑은정신을 본 받는다는 뜻으로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박세당 고택앞에 샘은 石泉이라 동네이름이 石泉洞이 된것이다

.지금도 그곳에 石泉洞의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박세당이 즐겨 찿던 취승대(聚勝臺)가 있으며,

처남(남구만)의 금석문 水落洞川이 선명하다

넓은 바위에는 西溪幽居”(서계유거)의 암각서도 보인다

박세당이 후학을 가르치던 궤산정도 남아있다

 

@朝鮮6대 명문가의 으뜸은 청음 김상헌(안동김씨)”家門이다

.남계 박세체(반남박씨)~학봉 김성일(의성김씨, 屛虎是非)

~약봉 서성(대구서씨, 徐之藥峰 洪之慕堂)~사계 김장생~명재 윤증

.전주이씨(이성계)는 왕족으로 절대 권력의 중심이었다

 

@남계 박세체(1631~1695)와 명재 윤증(논산, 파평윤씨)

.벼슬길에 오른 명재 윤증과의 담판으로 박세체는 落鄕한다

.명재 윤증의 조건을 本人의 힘으로 풀어줄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재 윤증, 55(숙종9,1683,庚申還國이후)

.벼슬을 응하려 했었으나 상경도중에 포기하였다

.3(호조참의)를 제의받고 漢陽으로 上京하던중,

과천 나좌량(동문수학)의 집을 방문하였다

.당대의 名門世族論客(남계 박세채, 1631~1695)을 만났다

남계(박세채)의 가문에는 박세당~박태유~박태보(노강서원)...

남계의 孫子사위는 西人의 영수(우암 송시열)孫子(송순석)이었다

노론~소론의 懷尼是非(회니시비, 1684, 노론~소론이 갈라서다)

당파 속에서 남계는 중간입장에서 蕩平策을 주장하였고,

끝내 윤증의 입장을 두둔하여 少論쪽으로 기울었던 人物이다

.1683, 懷尼是非(회니시비, 1684)가 일어나기 1년전에 만난 이유는

윤증의 입궐여부를 놓고 밤새워 討論을 한것이다

.일부러 만난 이유는 숙종이 三人同事(삼인동사)를 하명했기 때문이다

三人同事? 3(송시열, 윤증, 박세채)에게 政權을 맡긴셈이다

성격이 전혀 다른 3명에게 협력정치를 주문한것이다

송시열 中心으로 윤증(左靑龍), 박세채(右白虎)...

 

.윤증이 요구하는 입각3대 명분(원칙)이 있었다

1)西人南人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2)外戚(외척)勢道를 막지 않으면 안된다

3)당이 다른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지금의 잘못된 인사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첫째조건은 南人(嶺南學派)의 차별과 地域感情解消하는 방안이었다

*박세채는 3가지 조건이 不可能하다고 結論을 내린다

.윤증은 지체없이 故鄕(논산)으로 되돌아 온다

3가지 조건이 不可能하다면 나도 벼슬에 들어갈수 없다

.남계 박세채도 이에 공감하고, 출사를 포기하고 집으로 落鄕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송시열도 속리산(괴산 화양동계곡)으로 落鄕한다

.다음해, 西人이 분열된다(노론 송시열~소론 윤증...)

 

@명재 윤증은 명분없는 벼슬을 20여번 거절한 선비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인생말년에 벼슬과의 戰爭이었다

.81, 右議政 사양 상소를 8회 올리고,

.83, 判中樞府事 사임상소를 9회 올린다

.인조~효종~현종~숙종: 임금 얼굴을 한번도 보지않고서

立身揚名한 유일한 선비가 남명 조식과 명재 윤증이다

 

@파평윤씨, 명제 윤증(86, 1629~1714)

.백의정승(선비정신)으로 名文家門으로 부흥시켰다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자락 玉女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玉女彈琴 明堂(옥녀탄금)으로 左靑龍이 거문고 지세로 유명하다

.古宅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어 숨길것이 없는 투명한 집안이다

현재 後孫이 거주하고 있으며, 뒤뜰 장독대가 일품이다

1년 전통문화 답사 인원 약 15,000여명이 古宅을 찿는다

.고을 서민들을 위해 집안에서 養蠶(양잠)을 못하게 하였다

*강릉 선교장, 함양 일두 정여창 고택(빈집, 1450~1504)도 유명하다

 

.6.25사변에 조종사가 폭격을 만류했던 고택이다(당시, 인민군 사령부)

.遺言을 남기다 제사상의 크기를 90cm이상 하지마라

 

묘비에 徵士(징사)만 써라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던 선비를 말한다

조선의 대표徵士는 명재(윤증), 대표處士는 남명(조식)이다

 

@명재(윤증)과 우암(송시열)思想的 대립관계로 볼수있다

.윤증의 父親(윤선거)墓碑 비문내용을 보면 알수있다

.송시열은 철저한 朱子學派이지만,

.윤증은 기호 儒學을 계승하면서 朱子學과 약간 다른 노선으로

보다 (마음)을 중심으로 판단한 心學으로 陽明學과 일맥상통한다

.朝鮮 陽明學大家 하곡(정재두, 1649~1736)선생을 지도하였다

.명재 윤증은 재야에서 종학당을 세웠다(후손 47명 대과 급제)

 

 

 

 

매월당 김시습(동봉)

@梅月堂(金時習)이 은거했던 수락산

.세종은 장차 조정에 큰일을 할 사내이니, 잘 키워라!”激勵하였다

.21, 癸酉靖亂三角山으로 입산하였다고 전해진다

.24, 死六臣屍身을 거두어 鷺梁津에 매장하고 隱者로 살아간다

.31, 金鰲山(경주 남산)에서 수도하던중 달밤에 핀 梅花를 보고서

(梅月堂)自作하였고, 金鰲新話를 집필하였다

 

@小說 金鰲新話(최초의 漢文小說)

.만복산저포기(총각 양생: 영혼의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눠...)

.이생규장전(1359, 홍건적의 난...이생: 개성처녀를 만나지만...)

.취유부벽정기(개성 기생: 평양 부벽정에서...)

.남염부주지(경주 박생: 염라대왕/염부주와 지옥토론...권력남용?)

.용궁부연록(개성 한생: 박연폭포에 용왕, 선물과 용녀를 부탁...)

 

@金時習은 얽힌 사연도 구구절절하다

.이후, 金時習(5神童)이 오세암(雪嶽山)에서 수도했다해서

명칭이 유래되었고, 훗날 만해(한용운)이 수도했던 암자이다

.38, 道峰山~水落山으로 옮겨왔다(성종)

.47, 再婚하였으나 폐비윤씨 퇴출사건후 다시 승려가 된다(연산군)

.수양대군, 정창손(領議政), 김질과 어색한 인연이었으며,

.부여(충남)의 묘비에도 五歲 金時習이라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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