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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라이온스클럽(354-C지구)

2020-1123.세종로라이온스클럽 정기봉사

by 조흥식 2023. 12. 31.

2020-1123.세종로라이온스클럽 정기봉사(양주 소년심사분류원)

간송미술관 전형필

 

 

 

 

 

간송미술관 전형필

@간송 전형필(1906~1962, 정선전씨)

.채미헌(전오륜, 고려말 杜門七居)17대손이 간송 전형필이다

.10대손 시절부터 漢陽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

.9 대손 전의룡(1602~1661)은 의금부도사

.12대손 전성순(1760~1815), 배오개(종로4)에서 商業을 시작하였다

.13대손 전홍주(전성순의 長男, 1786~1838) 시절부터 번창하여

조선말기 최대 갑부(10만석)로 번창한다

.14대손 전홍주의 아들(3형제)의 등장한다

전계훈(차남, 1812~1890)은 무과 급제, 2(가선대부 경상중군)

3형제는 한양상권을 장악한다(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창동)

부동산을 집중적으로 구입한다(한양 인근, 황해도 연안, 공주, 서산)

 

@한양의 상업 활성화

.당시, 한양상권은 허가제 독과점 형태로써 관리들의 기득권이었다

장안의 질서유지 차원에서 배타적 독점 상권이었다

六矣廛(육의전)”은 정부에서 세운 시장으로 고객은 왕실, 관청이었다

.정조15, 채제공은 무질서한 난전으로 매점매석 때문에 5배로 물가 폭등했다고 상소했다

禁亂廛(금난전)” 함부로 상점을 열지 못하도록 통제

()”이란? 상점, 가게를 말한다

.()의 혼란과 질서유지 차원에서 武人출신들에게 기득권을 준것이다

선조시절, 훈련도감이 설립되면서 武人, 軍兵들에게

상업허가증(市牌)을 발급하고 수입의 1/5를 세금으로 징수하였다

또한, 부족한 재정으로 軍人들의 봉급 지불이 어렵게 되자,

더욱 활성화시켜 스스로 생계유지를 유도했던 것이다

.간송의 증조부(전계훈)의 두아들(창엽, 창열)

1째아들(창엽)은 두아들(영기, 명기)을 두었으나,

영기(무과출신, 통정대부 중추원의관), 명기(3, 궁내부 참서관)

2째아들(창열)은 아들이 없어, 2째아들(명기)을 양자로 받아들였다

.전명기는 슬하 24녀를 두었는데, 아들(만득)이 낳은 막내아들(孫子)이 간송 전형필이다

 

@10만석의 유산을 상속받다!

.간송(전형필)은 양가의 유일한 재산상속자(10만석)가 된것이다

*당시 한양 3대갑부

인촌(김성수): 10만석 갑부(고려대, 동아일보)

박흥식: 화신백화점(자택: 가회동)

백부자: 광산 개발업자(자택: 성북동)

.이북에서 광산개발 부자 방계초는 조선일보를 창간하였고,

.광산재벌 최창학의 집이 京橋莊이다(경교장: 백범 김구)

 

@성북동 시대를 열다

*성북동 백부잣집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산골)에 대궐같은 집(99)을 지었다

길상사(, 대원각)의 터가 원래 백부자의 집이었다

 

*대원각 김영한여사(주인)과 법정스님(길상사, 1000억원 시주, 1997)

궁궐밖 여성들의 기생정치는 고관들+백성들의 소리를 전했다

김영한 여사(평양기생학교 출신)는 평생 독신이었다

무소유(김영한, 법정), 보시는 이 많고, 사랑이 부족한 여자가 많다

백석(월북 시인)3년간 동거했다고 전해진다

자유당~3공시절까지 비밀요정은 외교구락부, 삼청각, 대원각이다

.1934, 간송(전형필)1만여평 규모의 땅을 구입하여

北壇莊(북단장, 현 간송미술관)을 건축하게 된다

.인근 先蠶壇(선잠단: 누애농장)의 명칭을 인용하여 ()으로 하였다

1930년대, 돈암장, 경교장, 이화장, 마포장, 혜화장, 삼청장...

.성북동은 구준봉을 흘러내린 지맥이 내룡을 타고 내려온 풍수적인 명당,

結局(결국, 자리)의 혈터인 것이다

 

구준봉의 ()? “개가 쭈구리고 있는 형상의 지형

외청룡(안암산)은 고려대학교, 내청룡은 북악산 매봉에서 흘러 낙산

북단장은 양쪽 계곡물이 만나는 두물머리(합수 지점)인 셈이다

.蠶頭穴(잠두형, 누애머리 모형의 지세)에는 氣運하게 뭉쳐있어,

터가 세다고 알려진다 이 여러마리가 꿈틀 거리는 곳

.韓國戰爭 직후에는 판자촌이었으나, 난곡으로 강제이주를 시킨것이다

 

@文化財를 찿아라!

.간송은 재복, 인복, 스승복이 유난히 많았던 유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화재에 대한 혜안, 관심, 감식법을 익힌것이다

.춘곡 고희동(1886~1965)의 영향으로 문화재, 골동에 입문한다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유화) 졸업후, 귀국후 동양화를 공부하였고,

휘문고 미술교사 출신이다(간송의 휘문고교 스승, 종로 거주)

.위창 오세창(1864~1953)은 간송의 멘토, 안목을 넓게 해주었다

詩書畵三絶이라 부르며, 조선말기 근대서화의 대가이다

오경석(역관 출신)의 아들로써 관철동에 거주하였다

부친(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써, 제주도(유배)에 찿아가 책을 구해드린 心統弟子 출신이다

조희룡(우봉)은 스승(추사 김정희)에게 인정받지 못하여 아쉽다

.위창 오세창(당시, 65)근역서화징(1928)”를 집필하던 시절,

춘곡(고희동, 당시 43), 간송(23, 대학3)

.이순황이 간송의 골동품 수집 대리인을 전담하고, 위창이 감식하였다

.또한, 書畵는 한남서림(관훈동, 백두용 사장)에서 구입하였는데,

한남서림은 종로 학자들의 사랑방(살롱, 1930년대)으로 사장이 죽자,

1932, 간송이 인수하여 이순황이 관리(운영)를 하였다

.경성 미술구락부에서 경매도 적극 참여하였다

 

@골동품을 구입하다!

.켈릭터 개스비(고려청자 수집가)로부터 高麗靑瓷를 구입하였다

영국출신, 30년간 동경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지식인이다

1937, 40만원으로 고려청자(20)를 구입했는데,

간송은 한푼도 깍지 않고 청자를 모두 사들인다

당시 기와집 40채값, 현 시세 2160억원(아파트: 54천만원)

황해도 금싸라기 땅을 팔아치운 것이다

개스비의 집터(동경 천황궁 뒤편) 연못에는 왕궁의 이 날아와 금붕어를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1914, 혜문스님은 朝鮮王朝實錄(오대산본)이 일본 도쿄대학에서

발견하여 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愛國者이다

.촉잔도권(심사정 작품)은 거액(기와집 5채값)을 투지하여 구입후,

일본(교토) 전문가에게 수리했던 비용도 많았다(기와집 6채값)

 

@澗松美術館은 전형필(1906~1962)이 남겨준 역사적 유산이다

.1938, 성북동 북단장에 寶華閣(보화각)을 설립하였다

한국 최초 사설 박물관(고려청자, 고서화, 골동품, 문화재 보관)

1966, 澗松미술관으로 상호를 바꾼다

.바닦은 이태리 대리석으로 한국최초 주문 제작한 석물이다

.보화각 1층 응접실은 프랑스제 인테리어, 최고급 건물이었다

6.25사변(인민군 기마대 숙영지), 1.4후퇴시(중공군 의무대가 주둔)

.훈민정흠 목판본을 포함하여 國寶(12), 寶物(10)을 소장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의 위험했던 사건도 많았다

6.25전쟁(1)에 미술품의 강취시도를 간신히 모면하였고,

1.4후퇴시 부산 영주동(일본갑부 하자마 별장)에 임시 보관하였다

서울로 짐을 옮겨온 후, 영주동일대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이다

(갑부 하자마: 김제평야 미곡상으로 저택이 무려 3000)

.1962, 간송이 죽은뒤 상속세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8000만원)

제미슨 교수의 충고 연구소를 만들어라!”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창립

(당시, 5억원) 때문에 종로4(배오개) 99칸 한옥을 정리하였다

보성학교의 채무 5억원도 큰 골치거리였다

.1972, 공한지세 부과(부동산법)되어 폐쇄위기를 맞는다

당시 청로회 맴버(간송의 제자들의 모임)들이 문화재 위원이었다

 

@간송의 후손들

.澗松은 휘문고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1937, 젊은 나이(26)에 조선 최고갑부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全東南朴: 동대문의 갑부는 전씨~남대문의 갑부는 반남박씨(박종하)

.보성학교는 1940년에 인수하였으며, 최근 惠化洞에서 송파로 옮겼다

.간송의 부인(김점순)은 김창섭(화가,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 졸업)의 딸

최초 파라솔과 핸드백을 사용했던 여인(29, 1924)

.澗松의 장남(전성우, 전 서울대 미대교수)은 보성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부인(김은영): 매듭연구가, 개성 갑부의 딸(父親: 김광균 시인)

.澗松의 차남(전영우, 전 상명미대교수)은 서울대 미대~고고학과 졸업,

현재 간송미술관 관장, 부인(최원남)父親은 최영희(국방부장관)

.간송의 장녀, 사위는 연세대 병원장이다

.1956TV시대 개막후, 인터뷰는 일절 사양하였고,

.간송은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을 하였으나, 아들은 거절하였다

 

@개성 4대음식

.개성 대표음식은 보쌈김치와 순대, 향료(산초, 고수)가 유명하다

1)순대: 개성대표 음식, 絶脹(절창: 개성 칭호), 순대(함경도 칭호)

2)무찜: 추운 겨울철 음식

3)밀천신: 닭국물로 만든 요리, 국물이 노랗다

4)조랭이 떡국: 구슬같이 둥글게 만든 떡으로 국을 끊인다

.닭볶음: 활계찜(개성 호칭)이라 부른다(남도지방: 닭도리탕)

.고수: 빈대냄새

 

@간송학파를 남기다

.혜곡 최순우는 조선판 김한태와 비슷한 인물이다

최순우()本名은 최희순으로 간송이 개명시킨 것이다

황수영의 蕉雨(초우)”도 간송이 지어준 아호이다

()”는 간송의 아들 항렬(전성우, 전영우)이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은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작품 연습실이다

.가헌 최완수는 독신 미술가이다

*조선갑부 김한태(영조~정조)는 역관(중인)출신으로 소금 사업가였다

관수동~수표동에 대저택을 건축하였다(울타리 안에 10여채)

春家, 夏家, 秋家, 冬家(춘하추동에 거주하는 집이 따로따로 지었다)

김한태는 단원(김홍도)의 문화예술성을 각별히 좋아하였다

김홍도는 한동안 김한태 가옥에 머물면서 살았다고 한다

*4대 강호학파(간송학파, 야산학파, 다석학파, 장일순학파)

 

@동대문의 추억(文化財에 대한 애착)

.간송이 죽기 직전에 동대문 보수공사를 하였지만(고종시절),

한번도 손대지 않았던 숭례문(남대문)의 정비를 걱정했을 정도로 우리 문화재를 아끼던 애국자였다

.배고개~배오개~이화동(배꽃 피는 시장)~동대문시장으로 이름이 변했다

 

 

 

간송 미술관(20115)

@년중 2회 개방하는 5월 전시회(2011.5.29.)四君子이다

.김홍도 新竹含露(시죽함로), 새 대나무가 이슬을 머금다

.김청희 贈晴嵐蘭(증청람란), 청람에게 드리는 란초

.홍진구 傲霜孤節(오상고절),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의 외로운 절개

.윤용구 蘆渚橫行(노저횡행), 黑竹아래 게

.안중식 秋鞠佳色(추국가색), 가을국화의 아름다운 빛깔

.허목 月夜三淸(월야삼청), ,,(三淸)..달밤에 세가지 맑음

.윤득신 月下暗香(월하암향), 梅花, 달빛아래 그윽한 향기

翡翠跳勢(비취도세),

.김정희 斂華就實(렴화취실), 꽃을 거두고고 열매를 맺다

山上蘭花(산상란화), 산위에 핀 란초꽃

人天眼目(인천안목)

積雪滿山(적설만산)

.심사정 怪石荊蘭(괴석형란), 괴석과 란초

煙霞成竹(연하성죽), 안개속의 굳은 대나무

傲霜孤節(오상고절)

折枝胡蝶(절지호접)

雲根凍竹(운근동죽), 바위틈에 얼어있는 대나무

.강세황 靑竹含露(청죽합로)

.심사정 梅月滿庭(매월만정), 매화와 달이 뜰에 가득하다

.방희용 梅梢春色(매초춘색), 매화가지의 봄빛

.이도영 玉貌仙姿(옥모선자), 옥같은 얼굴과 신선같은 자태

戞玉淸聲(알옥청성), 옥 부딪치는 맑은 소리

世外香盟(세외향맹), 세상밖의 향기로운 맹세

.조희룡 蘭生有芬(란생유분), 란이 돋아나니 향기가 있다

.신위 便姸脩竹(편연수죽), 아리따운 긴 대나무

.이남식 寒楂弄踈(한사농소), 식은 등걸이 성긴꽃 희롱하다

.이공우 淸香芬馥(청향분복), 맑은 향기 자욱하다

 

@간송미술관 주변에는 성북초교, 길상사(법정스님), 장승업의 화방...

.先蠶壇址(선잠단지, 1473, 성종), 누애 생산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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