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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복합지구

2020-1223. 주선희총재, 354-D지구 이정희 송년오찬

by 조흥식 2024. 1. 7.

2020-1223. 주선희총재, 354-D지구 이정희 송년오찬(354-D지구 재무총장 분쟁조정 자료)

*북한강 양수리 황금시래기 코다리

정몽주 포은(개성 선죽교의 피)

 

 

 

 

 

 

정몽주 포은(개성 선죽교의 피)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영일정씨), 고려 최고의 충신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면 반대 정파의 핵심 인물을 제거한다

.이성계 세력은 회유를 계속하였지만 정몽주는 끝까지 거부하였다.

결국,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를 맞는 피의 보복이었다

 

@“태조실록 총서과연, 정몽주는 어떻게 죽었는가?

.연명(連名)으로 글을 올려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등이 목 베기를 청한것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몽주가 선공을 가하자, 5째아들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나섰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성계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직접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영규(英珪), 조영무(趙英茂), 고여(高呂), 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정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정몽주에게 누설하였다.

정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정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이방원에게 말하였다(정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부친께서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라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이방원이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부친께서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결국,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당시 태조는 정몽주 제거에 반대하였다

.이방원은 사병들을 동원하고 독자적으로 정몽주 제거에 나선것이다.

이방원는 다시 조영규에게 명하여 상왕(정종)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곧바로 정몽주의 집(동리)입구에 이르러

정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정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이방원은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염려되어 직접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밖에 나오니 휘하 군사가 말에 안장을 얹어 놓고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말을 타고 달려 상왕(정종)의 저택에 이르러

정몽주가 지나갔는지의 여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않았다고 하므로,

이방원이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정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조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정몽주가 이르매 조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정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조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정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정몽주는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등이 휘두른 철퇴에 맞았지만,

.단번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처음 철퇴를 피해 달아나다가 말에서 떨어진 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흘린 핏자국이 선죽교에 남아 있었다의 기록은 없다

 

@1401(태종1), 태종은 권근(權近)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은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증직하였다.

.자신이 정몽주의 참살을 주도했지만 유교국가 조선에서 정몽주의 충절은

체제 유지에 매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후대에도 정몽주는 표창의 대상이 되었다.

.16c 사림파는 그들의 사상적 연원에 정몽주가 있음을 강조하였고,

영조는 정몽주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이라 할 것을 칭했으며,

.1740, 선죽교 14글자를 개성유수로 하여금 비석을 새겨 세우게하였다

道德精忠亘萬古 泰山高節圃隱公

道德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 포은공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구나!”

.선죽교의 핏자국의 진실은 무엇일까?

아마 정몽주가 피살된 직후 선죽교에는 붉은 흔적이 있었고,

이것을 정몽주의 피라고 인식하는 믿음들이 후대에 퍼져 나가면서

거의 진실로 확정되었다고 판단된다.

 

@허균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포은(圃隱)의 구택(舊宅)을 지나면서 노래하다

.에서 선죽교의 피는 당연히 정몽주의 흔적임을 노래하고 있다.

.후대의 시인, 묵객들도 이러한 사실을 당연시하면서 시를 썼다.

*포은이라 정 선생은 고려 말엽 그 시절에 圃隱先生在麗末

충절이 늠름하다 어느 뉘 빼앗으리 忠節凜然不可奪

어찌 이학만을 전하였을까보냐 豈惟理學傳不傳

공이 조정에 계실 땐 나라도 살았거든 公在巖廊國幾活

송악산의 왕기는 오백 년에 끝이 나고 神嵩王氣五百終

몽금척(夢金尺)은 하룻밤에 수강궁으로 내려갔네 金尺夜下壽康宮

공께서 은띠 드리우고 태연자약 그 자세로 公也垂紳不動色

호랑이가 깊은 숲에 도사린 듯 앉아 있네 隱若虎豹蹲深叢

선죽교라 다리 위 뿌려진 한 줄기 피 善竹橋頭一腔血

이름은 우뚝 솟아 서산과 나란하니 名與西山並崷崒

성읍이 남으로 옮겨 조정과 시전은 비었지만 城邑南遷朝市空

옛 사당의 향화는 상기도 끊임없네 遺祠香火猶芬苾

나는 사내 형을 따라 집터를 찾아보니 我從四耐尋宅基

무너진 담장이라 풀 덩굴만 엉기었네 頹垣野蔓生離離

 

@18c 김창협(金昌協:1651~1708) “선죽교

시냇물은 콸콸콸 물가 풀은 파릇한데 溪水濺濺溪草綠

시냇가 작은 비석 고려 왕조 기록일세 溪邊短碣記麗朝

지금까지 장홍의 피 남아 있는 듯한데 至今疑有萇弘血

만고토록 예양교 그 슬픔과 마찬가지... 終古悲同豫讓橋...

 

@주영왕(周靈王)의 충신 장홍(萇弘)이 모함을 받아

.()으로 쫓겨나자 할복자살을 하였는데, 그때 흘린 피가 3년 뒤에 푸른 옥으로 변하였다

 

@戰國時代 ()나라

.예양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은 왕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비수를 품고 숨어 있다가 조양자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상황을 정몽주와 비교하고 있다

.장홍의 피나 예양교에 남아있는 피처럼 선죽교의 피도 정몽주의 피라며 당연시하고 있다.

.정몽주의 충절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민간에서도 지속되었음은

이중환의 택리지의 팔도총론(八道總論) 경기(京畿)에도 기록되었다

 

@예양이란? 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

.태원부(太原府) 양곡현(陽曲縣) 분수(汾水)위에 있던 예양(豫讓)다리는

戰國時代 ()나라 예양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은

본래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비수를 품고

숨어 있다가 조양자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곳이다.

.정몽주가 새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개를 고수하다 살해당한 선죽교가 예양교의 경우와 비슷하다.

.개성 선죽교는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곳이다.

 

@포은 정몽주(영일정씨)는 누구인가?

.공양왕 때 정공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혼자만 태조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이성계문하의 여러장수가 조영규를 시켜 다리위에서 철퇴로 때려죽였다

고려의 왕업(王業)이 드디어 옮겨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서 추증하여 본조의 직함인 의정부 영의정으로서

용인의 무덤앞에 비석을 세우자, 곧 벼락이 내려 부서져 버렸다.

정씨의 자손이 고려의 문하시중이라는 직명으로 고쳐 쓰기를 청했더니 지금까지 무사하다.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이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수있으니,

이는 또한 두려워할 일이다.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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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