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7. 금강라이온스클럽 류광열 회장 자녀혼례(회기역 엘리스)
공재 윤두서(陳摶墮驢圖)
공재 윤두서(陳摶墮驢圖)
@공재 윤두서의 生涯(생애)
.恭齋(공재)의 깊은 뜻은 무엇일까?
*子思(자사)의 中庸에서 인용하였다
“君子가 恭을 두텁게 하면 天下가 평온하게 돤다”
“그러므로 恭이란? 君子가 시작과 마침을 이루고,
위와 아래로 두루 통하는 道인 것이다...”
즉, 恭이란? “君子의 길”이며, 恭齋는 “君子의 길을 닦는 공부방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 漁父四時詞)의 증손자이다
해남 孤山(윤선도, 博學多聞 학자선비) 고택의 갑부집안의 宗孫이며
다산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손자이다
.윤두서는 다방면으로 博學을 추구하여 성리학, 천문, 지리, 수학,
의학, 음악, 화화, 서예, 地圖(지도), 工匠(공장)...을 통달하였다
.아들(윤덕희)~孫子(윤용)들의 그림솜씨도 좋았다
.탄생 7일후, 큰집으로 입양되어 가문의 종손이 되었다
15세, 혼인하였으나
22세, 부인 사망(2남1녀)
26세, 진사시 합격(南人에게 불리한 朋黨政治)
27세, 부친 사망(養父)
29세, 3째형이 당쟁에 휘말려 다음해 사망
30세, 큰형이 모함에 연루되어 낙향
32세, 生父 사망
37세, 生母 사망
39세, 절친했던 친구 이잠 사망(흉서를 상소했다가 맞아죽어)
43세, 친한 벗 심득경 사망
45세, 母親 사망(養母)
46세, 해남으로 낙향(1713년)
47세, 큰형 사망
48세, 사망
@윤두서가 남긴 時調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더니, 오는이 가는이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이 있을지니 흙인듯이 있거라...”
@아들(윤덕희)이 行狀을 쓰다
“15세, 혼인하여 키가 훤칠하여 어른다운 풍도가 있었다...
30세(1679년), 생부를 찿아 해남에 갔을때, 모친이 시골 장원의
빚을 받아오라고 하자, 궁핍한 형편을 알고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글일기, 글짓기, 학문, 경전, 군사서적, 병법등을 공부하였고...
定義라는 글 한편을 지어 장수의 도리를 논하고...
부자 종손으로 베푸는 정이 많았으며, 빈곤함에도 티를 내지않았고
당파색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으며, 시종들에게 함부로 하지않았고
30세, 백발이 힌색으로 변하고
48세(1715년), 감기증세로 백련동 옛집에서 죽었다...
용모와 말씨가 중후하고 존엄했다
운명이나 관상등은 일체 묻지도, 입에 담지도 않았다”
@성호 이익(실학자 1681~1763), 윤두서가 죽은뒤 그리워하다
“이제 공께서 돌아가시니 친구를 사귀는 길이 외롭게 되었고,
그를 좇아 미처 듣지못했던 새 지식을 들을수 없게 되었다... ”
@恭齋 尹斗緖(공재 윤두서 1668~1715)의 자화상
.자화상이란? 자기 얼굴을 자신이 직접 그린것을 말한다
눈매가 무섭고 활활 타오르는 듯한 수염, 섬짓한 공포감을 느낀다
정면상으로 역대 최고의 걸작(명작)이다(국보240호)
.외형이 아닌 정신을 그린 작품으로 선비의 삶과 정신세계를 볼수있다
@傳神寫照(전신사조)란? “精神을 전하기”위하여 “그대로 배껴 그린다”
.조선 초상화의 정신은 사실주의 원칙을 고수하였으나
“터럭 한올이라도 다르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
특히 안경을 착용치 않았으나, 황현(1855~1910)은 착용하였다
.20년간 7차례 초상을 치르는 기구한 운명으로 초상화에는
눈시울이 붉은 기운이고,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윤두서 작품(자화상, 나물케는 아낙네, 밭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
*大學(6장) 윤두서의 자화상은 자신에 대한 성실의 산물로 볼수있다
“그뜻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는것이다...
그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때 삼간다...”
즉, 자신에 대한 강인한 인내심과 냉엄한 성찰이 끝까지 요구된다
@이하곤(윤두서와 절친했던 친구 1677~1724)
.윤두서 자화상에 붙이는 찬문을 보면(당시 윤두서의 號: 孝彦 효언)
“여섯자도 되지않는 몸으로 온세상을 초월하려는 뜻을 지녔구나...
홀로 行實을 가다듬는 君子이로다...
진실하고 삼가고 물러서서 겸양하는 풍모...”
*孔子(효경편)
“신체는 터럭과 피부까지 다 父母님으로부터 받은것이니,
감히 다치고 상하게 할수없다.
몸을 세워 道를 행하여 후세까지 이름을 드날림으로써
父母님을 드러나게 하라, 이것이 孝道의 마지막이니라”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
.윤두서는 “인물, 동물, 식물을 그릴적에 반드시 하루종일 뚫어져라
관찰해서 그 참 모습을 그대로 얻은 후에야 마쳤다... ”
.외손자 정약용도 “윤두서의 孫子(윤용)는 호랑나비와 잠자리를
등속에 잡아다가 수염과 분가루같은 미세한것 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여 묘사하여 기어이 실물과 똑같이 그린후에 마쳤다”
.윤두서, 정약용은 사실정신에 입각하여 작품을 그린 것이다
@옥동 이서(1662~1723)는 윤두서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서는 동국진체, 조선고유의 書風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하늘이 이 세상을 편안케 하고 싶지 않으셨는가?
공을 빼앗아 감이 어찌 이다지 빠른가?
하늘은 이미 공에게 재상의 국량을 주고,
또 적을 방비할 장수의 재주를 주지 않으셨던가?...”
.윤두서와 절친했던 3형제이다(이잠~이서~이익)
윤두서 陳摶墮驢圖(진단타려도)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당나귀에서 落馬하면서 즐거워하는 선비한테 달려가는 어린동자,
지나가는 과객의 함박웃음은 무슨장면인가?
.숙종의 題詩
“희이 선생 무슨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취함도 아니오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 있었다네.
夾馬營(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이제부터 온천하에 근심걱정 없으리라!”
.印文 “宸章(신장)”은 “임금의 글”이다
1715년(숙종 41년, 윤두서가 죽은 해, 48세)
위 제시는 조선 역대 임금들의 시문집(列聖御製, 열성어제)에도 똑같은 제시가 기록되어 있다
.임금에게 그림을 올릴때에 기본 예의를 갖춰야 한다
“臣 아무게 恭繪(공회)~敬繪(경회)”를 기록하여
공경의 뜻을 표하는것이 원칙이나, 윤두서는 일체 쓰지 않았고 顆(과)만 찍었다
.채색도 주제와 걸맞는 소청록법으로 산뜻하게 그렸다
소청록법이란?
수묵담채를 바탕으로 석청과 석록등 광물성 안료를 사용하여 매우 화사하면서 고상하다
@왜? 윤두서는 “진단타려도” 를 숙종에게 올렸는가?
*宋태조(조광윤)의 유훈을 알려준 것인가?
“士大夫의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절대로 죽이지 말라...”
*孟子 “責難於君謂之恭”(책난어공위지공)
“임금이 어려워해도 옳은 일이라면 힘써 행하도록 질책한다”는
의미가 유두서의 號(恭齋)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윤두서가 강조한 내용은
“君主 앞에서 좋은 얼굴로 비위나 맞추는 것은 공순함이 아니다
군주 본연의 힘든 임무를 늘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이
올곧은 신하의 참된 공순함이다”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落馬하는 도사는 누구인가?
.陳摶(진단 872~989 唐말기~五代十國~宋초기), 號(희이 希吏先生)
.혼란기 53년간, 唐나라 멸망(907년)~宋나라 개국(960년)
중원의 왕조가 5회 교체되고, 군소국가도 10개국이 넘었다
백성들은 전쟁에 시달려 핍박, 고초, 살육이 심하였다
.진단(의이선생)은 혼란기에 20년간 무당산에서 도를 닦았다
복식 호흡, 단식, 신선술, 한번 잠들면 100일간 잠자지 않았고
신선의 경지에 오른 많은 신비로운 일화를 남겼던 인물이다
.仙佛奇蹤(선불기종: 온갖 신선들의 이야기)에 “陳希吏(진희이)”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마치원(元나라 희곡의 대가)은 “陳摶高臥(진단고와)”에서 진단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여러 왕조의 임금들이 진단에게 벼슬을 하사하지만 끝내 거절하였다
.진단(118세)은 仙人으로 금단술을 좋아했던 後周 세종이 불러 신선술을 질문하였는데
“폐하는 만백성의 주인이니 정치에만 전념하시고
금단술 같은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세종(後周)은 오대황제 중에서 유일하게 경륜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에 벼슬(大夫)을 주었으나 물러서서 산속으로 돌아갔다
.宋나라 태종은 2회 조정으로 불러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재상이 신선술을 물었더니 “그런것은 잘 알지 못한다”고 응수했다
진단은 “가령 제가 대낮에 하늘을 오르는 재주가 있다 한들, 이세상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송태종은 훌룡한 임금이니 군신의 덕으로 하나로 해서 좋은 정치나 펼쳐 주십시오... ”
송태종이 인품에 감복하여 재상이 주청하여
“希吏(희이선생)” 칭호가 내려졌다
.여러왕조가 등장할 때 “참된 군주”가 아닌 “거짓 군주(무력, 힘)”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힌 당나귀를 타고 하남성 개봉(송나라 도읍)으로 가던중에 행인한테
“송나라를 조광윤이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평소, 진단은 조광윤이 황제의 재목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拍掌大笑(박장대소)하며 너무 좋아서 落馬를 한것이다
다급한 와중에도 즐거워 “이제 天下는 安定되리라” 외친 것이다
“어진이는 세상을 먼저 근심하고, 자신의 일은 뒤로 한다...”
올 곧았던 선비, 진단은 봄날의 상서로운 조짐을 예상했다
宋나라가 300년간 유지되는 순간이었다
@宋태조(조광윤)은 名君으로 알려진다
.洛陽 夾馬營(협마영)이란 진영에서 태어나, 진영에서 성장하였다
.절도사를 역임하고, 後周 세종이 죽고 空帝(공제, 7세)가 즉위할 때
遙(요)나라 침공으로 조광윤이 대장으로 방어작전을 하였는데,
.개봉성 밖 진교역에서 야영중에 군인들이 어린 황제는 안된다며
술취한 조광윤에게 황포를 입히고 황제로 추대한 것이다
.송태조(조광윤) 개국과정이 피바람없는 건국한 유일한 정권이었다
힘의 권력이 아닌 중앙군을 강화하여 지방군의 반란을 예방하고
군대 세력을 약화시키고 문관정치로 변화시킨다
.송태조의 石刻遺訓(석각유훈)
자손을 위한 유언을 돌에 새겨 궁전 깊숙이 간직하였는데
1127년, 금나라 침공시 개봉이 함락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후주의 왕족 시씨(祡)를 끝까지 돌보라!
2)士大夫의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절대로 죽이지 말라
.유훈으로 宋(신법당~구법당)의 정치싸움이 격화되었을때 패배한 권력은
유배로 그쳤고, 양대세력(왕안석~사마광)에 죽은사람이 없었다
@희이선생은 인물을 보는눈이 예리했다
.송태조(조광윤)가 하사했던 號(希吏 희이) “심오한 도리를 깨우친 분”
.老子(道德經 14장)에서 인용한 명언이다
夷(이) “그것은 보고자 하여도 보이지 않는다”
希(희) “그것은 듣고자 하여도 들리지 않는다”
微(미) “그것은 잡고자 하여도 잡히지 않는다”
“위 3가지는 말로 따질수 없으니 합하여 하나 道(도)라고 한다”
.희이선생의 안목과 학문이 얼마나 심오했는지 알수있었다
@道士, 隱士, 詩人, 學者로써 중국철학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周易에 통달하여 우주관은 천지만물이 일체라는 것과
宇宙(우주)는 氣를 主로 하지만,
理가 여기에 함께 갖추어져 있다는 性理學 理氣說의 선구자였다
.주염계의 “태극도설”과 소강절의 “선천후천역리”가 그에게 나왔으며
그의 학문은 도교, 유교, 성리학, 사상계에도 유명하다
.조선 성리학의 태동은 송나라의 이론으로 인본주의, 문치주의
북송의 문물제도의 모범을 본 떠온 것이다
.희이선생은 난세에 진사시험에 낙방하여 은자로 살아간다
윤두서 行狀을 쓴 아들
@윤두서 아들(윤덕희)가 쓴 行狀을 보면 따스한 인간미를 알수있다
“30세(1679년), 생부를 찿아 해남에 갔을때, 윤두서의 눈물겨운 언행은
모친이 시골 장원의 빚을 받아오라고 하자, 농민의 궁핍한 형편을 알고
빚 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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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허재갑총재(2020-202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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