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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사랑 조흥식

2013-0926.고대산

by 조흥식 2023. 1. 19.

2013-0926.고대산(연천 신탄리역, 철원평야, 백마고지)

*金剛山 유람기(蓬萊,백일홍)

 

 

金剛山 유람기(蓬萊,백일홍)

1.日月五峰圖(日月五嶽圖 )

.白頭山()~智異山()~金剛山()~묘향산()~三角山(중앙)

.어진정치를 베풀어 온 백성이 편하도록 선정을 하라!

.명산 金剛山文人들이 한번 유람가는 것을 평생 소원이었다

.수많은 문인들이 금강산을 찾았고, 遊覽記가 매우 많다

.(金剛山), 여름(蓬萊山), 가을(楓嶽山), 겨울(皆骨山)

 

2.최북(崔北),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호생관(毫生官)~칠칠이(七七...을 쪼개서 표현)

.애꾸눈 화가(고흐: 귀를 잘르다)

.왜 물은 그리지 않았느냐? “그림밖은 모두 물이요...”

.사나이답게 명당에서 죽어야 한다(金剛山 비룡폭포에서 투신소동)

.고함소리에 깜작 놀란 새들이 정신없이 도주할 정도였다

 

3.금강산 4대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금강산 3고탑(외금강 신계사, 내금강 장연사, 내금강 정양사)

(유명 단탑: 문경 봉암사, 함천 영암사, 원주 거돈사, 철원 도피안사)

.김일성이 복원한 사찰: 묘향산 보현사~내금강산 표훈사

 

4.사명대사 유점사(楡岾寺)

@울산전투,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과 담판으로 항복권유를 거절한다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을때 친필을 내린바 있다

.수양대군은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지정후 유점사을 방문했다

 

5.금강산 미인송(금강송) *영남별곡(봉화)참고

.동북형(함경도): 곧은 모형으로 아래가지는 넓고 위쪽은 좁다

.금강형(강원도): 원산~울진어간 줄기는 곧고,

곁가지는 짧아 좋은상품으로 통한다

.春陽木은 울진 통고산 자연휴양림~소광리 소나무숲~불영사 계곡에

500년 수령의 금강송이 매우 많다

.울진 금강송은 조정에 사용되는 棺材(관재)로 사용되므로

封山(봉산: 벌목을 금지시킨 산림)으로 지정한 黃腸木(황장목)

春陽(경북 봉화)에 집결시켜 도성으로 옮겨온다

.안강형(경북 경주): 줄기가 심한 굴곡으로 뒤틀린 쓸모없는 소나무로써

반듯하고 좋은목재는 이미 베어 사용하였고, 이후 가꾸지 않았다

.중남부형(남한일대): 눈에 가지가 꺽이는 雪害木과 고급 금강송은

무주 덕유산에 집중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6.불교정책(고려시대 후기)

@유점사, 高麗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는다

.1168, 유점사에 500칸의 사찰을 중창하였고,

.1344, 유점사의 불교행사를 지원하는 관청을 신설하였다

.1408, 유점사에 은 2000냥을 하사하여 3000칸 중창 불사한였다

 

@구룡연의 전설(유점사터)

.연못을 메워 창건한 사찰(경주 황룡사, 고창 선운사, 문경 봉암사)

.9마리 ~53佛體와 자리 다툼에서 패배하여 구룡연에서 살았다

.토속신앙의 성지에 불교가 들어와 토속신앙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부석사의 전설(선묘 아가씨가 돌을 들었다 놓아, 잡귀를 쫓았다)

.기독교 교회도 마을 당산나무 자리에 세웠다

 

@1424(세종6), 7개 종단을 2(선종, 교종)로 통폐합하였다

.36사로 절간을 국한시켰는데, 금강산에 2(유점사, 표훈사)이다

.유점사(선종사찰)元屬田(205)인데, 95을 추가(거승 150)

.표훈사(교종사찰)元屬田(210)인데, 90을 추가(거승 150)

.1456(세조2), 유점사를 국왕의 원당사찰로 지정하였고

.1466(세조12), 유점사,표훈사,장안사,정양사를 참배하였다

.강원도는 세금중에서 매년 쌀100, 소금50섬을 절에 날라주었다

.세헌미(歲獻米)는 성종(5, 1474)까지 계속되었다

.서산대사(휴정)은 표훈사 백화암에서 주석하고

사명대사(유정)은 임진왜란에 유점사에서 승병을 일으킨다

.1789(정조), 신계사 어향각을 짓고,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었다

.1796(정조), 표훈사 어실각을 지었다

.1894, 사찰이 55개로 줄었다(임진왜란 화재로 소실)

.1942, 28개로 줄었다

.2000, 3(표훈사, 정양사, 보덕굴)이며, 스님은 표훈사에만 상주한다

 

7.신라 마의태자는 금강산에서 통한의 생을 마감하였다(삼국사기)

.935, 고려에 항복후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였다

.내금강산 신라 마의태자릉”(위패비: 인제 김부리)

.전설처럼 태자성, 용마석, 삼억동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8.문화속의 금강산(문사철~시서화)

@4계절 명칭(:금강~여름:봉래산/풍운조화~가을:풍악~겨울:개골)

.진경산수화: 정선(외금강)~김홍도~변관식(내금강)~고유섭

.정선(영조): 금강산의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소정 변관식(1899~1976)30,50,63세 옥류동 그림을 그리다

.안동김씨 장동(3) 가문에서 즐겨 찿았으며,

그림에서 겸재와 에서 사천(이병현)을 병칭하였다

.탐승길(옥류동, 구룡폭포)~등산길(만물상)~답사길(내금강 만폭동)

~유람길(삼일포)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나는법이다

배가 고파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소식(북송 시인)“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것이 소원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이 산은 천개의 봉우리가 눈처럼 서서, 높고 절묘함이 으뜸이며,

또한 불서(佛書)에 담무갈 보살이 거하던곳이란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인간정토(人間淨土)라 이른다.

중국사람들이 고려국에 나서 친히 보기를 원한다

.정철(선조): 關東別曲에서 관동팔경~금강산의 절경을 노래하였다

.이사벨라 비숍(영국): 1890년 금강산을 여행하다

여기 11마일에 걸친 금강산의 자태는

세계 여느 명산의 아름다움을 초월하고 있다.

대협곡은 너무나 황홀하여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지경이다

.이광수(금강산유기):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

.북한 보천보전자악단

:금강산타령,가고싶은 금강산(가곡),금강산을 찾아서(영화)

.육당 최남선(금강예찬)

하늘나라 수미산상(須彌山上) 제석궁에서 중의 으로 등극한다

쿤륜산(중국)~히말라야산(인도)~록키산(미국)~알프스(유럽)

.조선 제일은 대동강변 연광정(練光亭)과 금강산이다(홍한주)

평가 절하했던 최익남(영조,1724~1770), 훗날 참수되었다

.가곡(그리운 금강산):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

.동요(금강산):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

 

@봉래 양사언(1517~1584) *강원별곡(삼척)참고

.서자출신으로 호(봉래)는 스스로 만들었다

.봉우리 이름을 많이 지었다(육화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안평대군(행서)~한석봉(해서)~김정희(추사체)~양사언(초서)

.父親(양희수)는 안변에서 말먹이를 얻으면서 16살 소녀를 만난다

.사례를 사양하는 소녀에게 향합(香盒)을 풀어줬는데...

훗날, 찿아와 수발을 허락했으나 상처하여 재혼하였다

.자하동 별장에서 왕세자(소년 성종)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父親이 죽고난뒤, 3일후 母親이 자결하였다(전처소생 아들에게 부탁)

.회양군수 시절, 바위에 글씨를 쓰자 사흘간 산울림이 멈추지 않았다

蓬萊楓嶽 元化洞天 (봉래풍악 원화동천)

만폭동 입장료 1000원중에, 양사언 필체관람료가 500원이다

만폭동은 양사헌 필체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사직후 삼일포에서 봉래대, 봉래굴, 비래정을 지었다

.봉래 양사언은 안변부사로 발령(1582)이 났는데,

.지릉(智陵. 이성계 3대 증조부 무덤)에 산불로 황해도에 유배되었다

.2년후 금강산으로 돌아오면서 죽었다

.평소 묫자리를 격암 남사고가 정했다(포천 영평, 금오산 기슭)

그때, 폭풍으로 서첩이 날아가 회수했으나, 자는 멀리 날아갔다

 

@금강산의 전설

.나무꾼과 선녀(동화)

.가곡(그리운 금강산, 최영섭)

.동요(금강산 찿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즐겁구나...)

.삼태기 메들리(유점사 법당뒤, 칠성당에 모두모여 아들 딸 낳게 해달라)

.명태원산지(함북 명천~원산~태천 앞바다), 바다(명태)~()

(애국태: 명태국, 명란젓, 창란젓, 명태순대,명태식해)

.溫情里 온천: 온양(溫陽), 온혜리(溫惠: 퇴계 안동고향), 溫水里...

.금강산은 한달에 40일간 비가온다고 한다

 

 

외금강산()

1.외금강산(탐승~구경거리)

.창터솔밭 극락재: 원호고개(361m), 군사물자를 지원한 곳이다

.매바위봉(255m), 달걀바위, 닭알바위()

.온정각 명당(:매바위, :닭알바위, 주산:관음봉, 조산:비로봉)

.수정봉(773m)은 명승지(22개소)

.바리봉(448m, 치마바위), 사발은 엎어놓은 형상과 바리떼 닮은 봉우리

.관음연봉(상관음~중관음~하관음: 노장바위)~온정령 고개마루

(하관음, 노장바위: 늙은이가 짐을지고 가는모습)

 

@온정령 고갯길(857m): 내금강산으로 가는 언덕길이다

.106굽이 60리 고갯길은 6.25전쟁에 군사도로를 개설하였다

 

@박석길, 옥류동, 내금강, 만물상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박석길(돌밭길)

(1957년 조성, 피키오니오스 건축가)

.독선암: 장기를 심하게 훈수하여 쫒겨난 바위

.귀면암: 누구는 신선대접, 귀신대접에 화난 솔로바위

.안심대: 말안장처럼 편안하게 쉬는 벼랑턱 공간

.만물상: 만물초(각 물체의 상을 잡아 온 모습

.천선대: 천녀화장호는 선녀가 화장을 하던곳

 

2.神溪寺(신계사)

@新溪寺神溪寺로 변경된 전설

.신계천에 많은 연어잡이로 淸淨法界 사찰경내에 비린내가 진동하여,

동해 용왕님께 부탁하여 연어가 올라오지 않았다

.성종(동국여지승람)에는 이었으니, 조선후기에 으로 추정된다

 

@보운조사 창건(519, 신라 법흥왕)

.금강송 창터솔밭이 웅장한 풍경이며,

.倉垈里는 창고 터이다(창대리: , 양곡과 물자보관 창고)

 

3.鉢淵寺(발연사): 진표율사(신라 경덕왕)가 창건

@최초의 금강산 스님(개산조, 開山祖)

.진표율사는 만경현(완주)출생으로 금산사 숭제스님에 입산(12)

.27, 변산 부사의암에 입산하였다

.지장과 미륵을 만나 戒本(계본)木簡(2)”를 받았다(762)

(목간에는 가 쓰여 있어,

뜻은 始覺本覺을 의미하니 果報(과보)를 알것이다)

.진표는 7년간 법회를 열고, 백성을 구제하였다

앉아서 열반하여 시신을 수습치 않아,

시신위에 위에 소나무가 자란것이다

.홍예교(아치형), 구유소(구유 닮은 ), 큰바위 글씨 발연절터

.1711, 영남의 스님(소요당 청요대사)이 주석하였다

.정조, 호남의 스님(해룡당 행밀스님)이 주석하였고,

재우스님~승찬스님(신계사)이 크게 중창후 한국동란에 소실되었다

 

@효봉스님(1888~1966)

.평남 양덕군 갑부아들로 출생(이찬형, 수안이씨)으로 신동이었다

.평양보교~일본유학~와세다 법대졸업~조선인 최초 고등고시 합격~

서울법원~함흥법원~평양법원(사형선고후 사직)~엿장수~3년간 방랑

.38, 입산(신계사, 석두 임보택)

.면담과정 이야기(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는고? 걸어서 왔읍니다)

.신계사 보운암에서 10년간 수행후,

.송광사 지눌(조계종의 宗祖, 보조국사)의 법통을 이어 받는다

(보조국사의 16法孫, 고봉국사를 꿈에 만나 효봉이라 하였다)

.해인총림 방장으로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으로 추대(1962)

.효봉의 제자: 구산(송광사), 법정, 一超(일초: 시인 고은)

 

4.옥류동 오선암

@五仙岩(넓은 바위): 신계천 船潭(선담, 배소)의 영롱한 비취색

.신선놀음(금강산 5 고을원님: 고성, 통천, 흡곡, 회양, 금성)

.관음연봉(상관음~중관음~하관음: 노장바위)~온정령 고개마루

(하관음: 노장바위~늙은이가 짐을지고 가는모습)

.연주담: 2개의 큰연못이 진주를 이어붙인 모습이다

(전설: 선녀가 2개의 구슬은 흘리고 간 연못)

.비봉폭포: 139m봉황의 깃털모양으로 봉화담으로 떨어진다

 

5.지원(志遠): 김일성의 가훈(父親 김형직), 생의 좌표

@옥류동 오선암에 김일성의 친필

@앙지대(仰止臺: 머물러 우러러 보는곳)

.앙지대 앞 바위~내금강산 만폭동 금강대

.志遠의 유래(삼국지 제갈공명 三顧草廬”)...“먼뜻을 가져라

제갈량의 서재에 걸어놓은 글씨(큰뜻을 품은 사람, 비장한 각오)

안중근(여순감옥)~백범 김구의 글씨도 남아있다

.비담박 무이명지 비영정 무이치원(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遠)

맑은 마음으로 뜻을 밝히고, 편안하고 고요한 자세로 뜻을 이룬다

@북경 천안문광장: 분투, 奮鬪...열심히 싸우라!)

 

6.비룡폭포: 주렴폭포는 김일성이 명명하였다(珠簾)

@해강 김규진 글씨(1868~1933): 구룡폭포에 彌勒佛 미륵불

.총석정 현판, 창덕궁 희정당그림(외금강 만물상, 해금강 총석정)

(심왕산 개심사, 가야산 해인사, 삼신산 쌍계사...)

.평남출생, 9년간 중국 수학중 민영익을 만나, 고종과 명성왕후를 알현,

영친왕의 스승으로 천연당(최초 사진관)을 개장하고,

근대적 화랑을 최초로 개설(고금서화관)하고,

3년 과정 사설 미술학원(서화연구회)을 만들고

제자를 양성하였다(고암 이응로, 청강 김영기...)

 

7.조선3대 폭포: 금강산 비룡폭포, 개성 박연폭포, 설악산 대승폭포

.폭포주변 바위글씨: 최치원, 송시열

 

8.상팔담(上八潭) “나무꾼과 선녀

.1(창터솔밭)~2(옥류동)~3(구룡폭포)~4(상팔담)

.옥녀세두분(玉女洗頭盆): 선녀가 머리를 감던 연못

 

9.만물상

.1788, 정조는 김홍도와 김응환에게 금강산을 그려오게 한다

.금강산 고을 수령들에게 경연관 대신처럼 극진히 대하라고 했다

 

 

내금강산()

1.단발령이란? “차라리 머리를 깍고 거기에서 살고 싶다

.한양~장안사까지 6일 소요(가마운송은 스님에게 임무를 부여하였다)

.40리길(단발령~일만이천봉)

 

2.괘궁정(掛弓亭)이란? “이성계가 잠시 활을 걸어뒀던 곳

.이성계는 망군성을 축성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1383)

.비로봉에 사리함(백사발에 쿠테타 성공기원 발원문을 새겨)을 묻었다

.위화도 회군 직전 두차례(1390~1391)

.남원 인월면 여원치 고개에도 괘궁정이 있다(왜구토벌)

(최명희, 혼불1부 흔들리는 바람, 인월댁: 강수의 모친)

 

3.정양사(왕건)

@고려 태조(왕건)拜再領(배재령)에서 큰절을 올렸다

.고갯마루 도착하자, 법기보살(담무갈)이 그의 권속 12000명을

거느리고 나타나 광채를 방사하여, 즉각 엎드려 절을 올렸다

.發光臺은 법기보살이 빛을 발한곳에 정양사를 창건(뒤산은 법기봉)

노영(1307, 칠병그림, 법기보살현현도, 신증 동국여지승람)

 

4.장연사(도산사)

@장연사 3층석탑(금강산 3대고탑)

.금강산 모든 사찰을 총괄하고, 순례자의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나라 기황후(순제: 1333~1367, 고려 충혜왕)의 전폭적인 지원

(황제, 황자를 위한 원당으로 정하고, 장안사~유점사를 세웠다)

 

@조정에서 보호받는 막대한 收租地(수조지)를 갖고 권력을 행사한다

.부근 백성들은 사찰(대지주)에서 큰 시달림을 받는다

.관료, 사신이 행차할때마다 길안내, 가마 메기, 짐운반, 식사준비

.불교행사시 쌀,,참기름,소금,천을 거두는 불교의 부패가 극심했다

(또한, 초입에 위치한 도산사는 행차를 돕는임무를 맡은것이다)

 

5.장안사와 삼불암

@장안사

.나라 기황후는 장안사를 원당사찰로 지정하여 거액의 내탕금을

투자하여, 장인을 보내 중건하였다(53체불, 15000불 봉안)

.946, 고려왕실은 쌀 2000석을 세수로 거두어 들이고

.982, 토지 1050과 고성군 임도염전을 떠어주었다

 

@만천교(向仙橋)는 신선이 사는곳으로 들어가는 교량

.問仙橋는 신선이 사는곳을 물었다는 교량이다

.진표율사(515, 신라 법흥왕)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 진표는 8세에 불과하다

.벽하스님(대선사)이 대시주를 받아 영원한 선방을 개설

.영원원창설비: 총운 혜근스님이 짓고, 영호스님의 필체

.김진홍여사 공덕비: 김돈희 필체, 영호스님(구산선문)이 지었다

 

@영호스님(박한영, 정호스님: 1870~1948)

.19, 전주 태조암에서 입산

.1911, 이회광이 일본불교(조동종)와 합병을 추진하자,

임제종의 전통론을 내세워 결사반대(만해 한용운)하였다

.장안사 만세루에 현판 臨濟宗第一伽藍(임제종제일가람)

.동국대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다(현 동국대학교)

 

@石顚(석전) 아호를 받아 사용한다 *호남별곡(고창선운사)참고

.추사 김정희는 논쟁의 상대였던 백파스님(고창 선운사)에게

石顚아호를 선물하면서 마음에 드는 제자가 있거든 줘라...”

.백파스님은 아호를 넘겨주지 못하고 입적하면서 유언을 했다

이것은 추사가 내개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에 임자가 있으면 찿아가라

.영호스님이 절간 서랍에서 발견하여 자신의 아호로 사용한것이다

 

@추강 남효온(생육신): 교종을 비판, 선종의 진정성을 강조하였다

 

6.장안사와 표훈사의 갈등

*表訓洞天(표훈동천)~長安寺地境處(장안사지경처)

.문바위 삼불암을 기준으로 표훈동(표훈사쪽)~장안동(장안사쪽)

*울소(鳴淵. 명연)은 물벼락에 사람이 우는듯한 소리이다

.시체바위(金洞 바위)~삼형제바위(3아들)

 

1)전설(김동거사와 지공스님의 다툼)

.김동사(사찰)는 개경갑부가 화려하게 창건하여 주지로 있었다

.지공스님(인도 남천축국)이 찿아와 극진히 모셨는데,

외도를 하고 있다면서 혼을 내는것이다

.결국, 하늘의 심판에 맡겼는데, 지공은 마하연에 있었다

.새벽에 천지가 진동하며 폭우, 산사태로 사찰이 울소에 쓸려갔다

 

2)전설(김동거사와 나옹화상의 대결)

*지공은 나옹선사의 스승

.김동거사는 이 높은 나옹선사를 몰아낼 욕심이 생기고,

.나옹은 욕심많은 김동거사를 쫒아낼 궁리를 했던것이다

.삼불암의 세부처는 석가~아미타~미륵(과거~현재~미래)이며

.바위, 커다란 2개의 삼각바위에 불상에 새겨져 있다

.장안사쪽 바위에는 큰 3부처를 나옹선사가 새겨 내기에서 승리했다

.표훈사쪽 바위에는 김동거사가 화불 60, 보살 두분을 새겼는데

.60화불중에서 4번째 부처의 왼쪽 귀를 새기지 못했다

.결국, 내기에서 패배한 김동거사와 3아들이 울소에 투신하였다

 

*함영교: 빛을 머금은 다리

.표훈스님(의상대사의 제자, 불국사의 大德)이 창건하였다

.백화암(고려시대 창건)의 수충영각에 5명의 영정, 한국전쟁에 소실

지공~나옹~무학~서산~사명(백화도인)을 배출한 명찰이다

.현재, 5대화상은 서산대사와 제자들의 부도이다

.서산대사는 묘향산 보현사에서 열반한뒤, 사리만 모셔온것이다

.1398, 천재지변에 조선초기 조정은 표훈사에서 기도를 올렸다

.판도방(判道房): 손님이 묵어가는방(청류헌, 침계루,...)

 

*나라의 표훈사 재정지원

.순제의 지원묘비(봉명신 양제 글, 우정승 권한공 필체)

.태왕태후, 영종황제(순제 전임황제), 태자(완자불화), 두낭자,

신하(완택독심왕...)들의 시주내용이 비석에 적었다

 

7.만폭동 나옹화상의 필체: 天下第一名山

*7세 아동의 전설은 金剛을 쓴후 탈진하여 유언을 남긴다

훗날에 을 채우는 자는 자신의 後身이다

해강 김규진은 아들을 시켜 글을 써넣은 7歲童(청강 김영기)이다

 

*금강8(옥류동, 삼일포, 만폭동...)

.후원으로 통하는 문은 좁아야한다(정약용, 산림경제)

 

8.摩訶衍(마하연, 마가연):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나옹선사가 거쳐갔다

*마하연(摩訶衍)은 금강산의 심장 대승이 넘치는곳...”

.53칸 절집은 월송선사가 중건하였다(1831)

.한국동란에 소실되어, 칠성각만 남았다

.율봉스님(1738~1823)이 열반하여 자취가 사라졌다

(서예를 잘하고, 도력이 뛰어나...活佛이라 칭했다)

 

9.內八潭

*玉女洗頭盆(옥녀세두분): 보덕각시가 머리를 감았다

.고려 화정선사가 물에 비친 관음보살을 봤다는 影我池(영아지)

.묘길상(문수보살의 별칭)이란? 화계동, 잔도를 말한다

 

10.보덕암(눈썹지붕, 팔작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보덕굴(627), 고구려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제비집 같은 석연굴(石燕屈), 회정스님 창건설화

(회정스님이 낮잠도중, 꿈에 보덕각시가 만폭동에서 만나자고 했다

일어나 만폭동에 오르니, 꿈에 본 여인이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곳이 옥녀세두분...계속 여인을 따라가니 보덕굴이었다

파랑새 한 마리가 굴속으로 사라져, 작은 부처와 불경이 있었다

 

後談, 금강산을 유람한 사람들!

1.김창협(20. 안동김씨, 4, 둘째)

*30일간 금강산 유람(1671,8,11~ 숙종), 회양부사 접대를 받아(3일간)~

 

2.우석 이풍익: 금강산 여행(28일간)

*김창협과 반대코스로 여행하였다(1825,8,4~)

 

3.최해(1287~1340) “금강산으로 떠나는 어느 스님에게 드리는 글

*금강산 유람하는 사람때문에 백성들이 혹독한 고통을 받고있으며,

자신은 그런꼴을 보고 싶지않아 금강산에 가지 않는다)

 

4.월사 이정구(1564~1635): 당대 4대 문장가(예조판서)의 금강산 유람

.1603, 함흥 화릉(이성계의 母親, 혜황후의 릉)개수공사 감독하였다

.당시 흡곡 현령은 한석봉(석봉 한호, 당대 최고의 명필),

간성군수(간이당 최립, 당대 문장가)와 유람에 동행하였다

.또한, 적공(篴工: 피리연주가, 함무금)과 화가(표응현)을 대동했다

 

5.창랑 홍세태(1653~1725): 숙종시절(당대 최고의 시인)

.회양을 지나면서 일부러 금강산을 유람하지 않았다

.시인의 명성때문에, 명산을 보고 멋진 시를 기대할것이다

내 재주로써, 도저히 신령스러운 금강산의 경치를 묘사해낼 자신이 없고,

평범한 시를 보여주기 싫어서, 금강산을 유람하지 않았다

 

6.황초령(黃草領) 진흥왕 순수비 *호남별곡(추사 김정희)참고

.갑산(함경도)에서 5일간 소요되는 산속에 황초령비가 있었다

.북병사 신립 장군이 발견하여 탁본을 해오자,

.조정관료들이 심부름을 계속시켜 비석을 깨트려(이미 40년전에 없어졌다)

.추사 김정희는 권돈인(함경도 관찰사)이 비석조각을 탁본해 보냈다

 

7.금강산으로 떠나는 승려를 전송하며...

*성석린 (成石璘, 1338~1423), 송승지풍악(送僧之楓嶽)~독곡집(獨谷集)

一萬二千峯 高低自不同 君看日輪上 高處最先紅

(일만 이천 개의 산봉우리, 높고 낮음 각기 다르다네

그대 보게나 해가 뜰 적에, 높은 곳 가장 먼저 붉으니...)

.詩人이 직접 금강산을 보면서 읊은 시는 아니라

금강산으로 떠나는 어떤 스님을 전송하며 적어준 시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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