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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갑총재(2020-2021)

2021-0503. 의전부총장 생일파티

by 조흥식 2024. 2. 18.

2021-0503. 의전부총장 생일파티(장한평 춘자네 낙지전문점)

懷尼是非(송시열~윤증~박세채), 鷺江書院

 

 

 

 

 

 

懷尼是非(송시열~윤증~박세채), 鷺江書院

1.歷史속의 라이벌 우암 송시열(宋時烈) vs 명재 윤증(尹拯)”

@회니시비(懷尼是非)란 무엇인가?

.西人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제자 윤증(尹拯)의 대립사건이다

.송시열은 회덕(懷德, 대전 동쪽마을)에 거주하였고,

.윤증은 이성(尼城, 논산 노성면)에 살았기 때문이다

 

@회니시비는 朱子學 도통주의에 입각하여 政局을 운영하던 老論계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現實政治를 운영하고자 했던 小論계의 대립이다

.곧 송시열과 윤증 간의 감정과 얽혀 일어난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훗날, 老論~小論은 경종~영조~정조까지 이어지며 격렬히 대립한다

.老論勝利하면서 老論일당의 전제 政治體制로 굳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정치지배 구조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을 지나고,

朋黨政治는 세도정치가 등장한 조선말까지 이어진다

.붕당정치 주도권은 東人이었으나, 인조반정후 西人이 득세하였고

.西人은 숙종초기 老論(송시열)小論(윤증)으로 분열되면서

100여년간 대립으로 갈등이 진행된다

 

2.윤선거(尹宣擧, 윤증의 父親)의 묘갈명(墓碣銘)

@1669(현종10), 윤선거가 죽었다

.어쨌든 송시열은 윤선거와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절교하지 않았다

.우암(송시열)은 윤선거의 제문을 보내왔는데,

.윤선거 비문 찬술과 윤증의 배사론(背師論)에서 감정이 폭발한것이다

.명재(윤증)南溪(박세채)가 지은 行狀과 자신이 작성한 연보를

송시열에게 주면서 父親(윤선거)墓碣名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父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비명을 지어 보냈다

.윤선거의 을 기리는 구절에

망연해 할 말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뒤,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我述不作)”고 마무리했다

 

@송시열은 박세채가 그 行狀(행장)에서 모두 나타냈으므로,

특별히 할 말이 없다하여 윤선거의 행적만 간단히 정리했던 것이다

.명재(윤증)은 미진하다고 여겨 4~5년간 장문의 편지를 띄우거나,

직접 찿아가서 墓碣名을 수정하고, 개찬(改纂)하기를 청했으나,

송시열은 골자(요지)는 전혀 손대지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줬다

끝내 명재(윤증)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父親墓碑를 송시열이 정성을 들이지 않고 작성하여 감정대립이 비롯된다

 

@송시열이 윤선거의 墓碣名을 탐탁하지 않은 마음으로 지었던 이유는?

.윤선거의 과거행적과 朱子學에 대한 思想的 태도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1637(인조15), 송시열은 丙子胡亂에 강화도를 수비하다가 이 함락,

脫出하여 살아남았던 윤선거에 대해 大義名分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한 윤휴(尹鑴)에 대하여

友好的인 관계를 유지했던 윤선거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윤선거는 죽기 직전 우암(송시열)朱子學 일변도의 사상편향과

편협한 政局 운영을 비판하는 기유의서(己酉擬書)”를 남겼다

.송시열과 윤선거 간의 이러한 감정 대립은 윤선거가 죽은후,

墓碣名 작성을 계기로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대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우암(송시열)은 명재(윤증)과의 관계를 끊고 적대시했다

.송시열을 주축으로 한 老論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小論이 형성되었다

 

3.왜 송시열과 윤증은 대립하는가?

@송시열은 丙子胡亂과 효종의 北伐計劃(청나라)이 탄로나는 바람에

.조정과 재야를 넘나들며, 20년 절친하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진다

.백호(윤휴)의 경전해석 때문에 사건이 발단되었다

백호(윤휴)중용에 대해 집주를 달았는데,

우암(송시열)은 백호(윤휴)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이후,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예송논쟁(1~2)으로 극에 달했고,

.숙종6, 윤휴는 허적의 서자(허견) 모반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윤선거(윤증 父親)는 백호(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존경하였다

오직 朱子學 절대 신봉의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시각이었다

.효종4, 백호(윤휴)와 우암(송시열)의 입장차이가 드러나는데,

황산서원의 시회(詩會) 토론과정에서 윤휴~송시열의 논쟁은

윤증에게 이어져 西人老論~小論으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論爭을 통해 불거진 老論~小論 파당 불씨

.명재(윤증)은 인조7(1629) 출생~우암(송시열)22세 연상이다

父親(윤선거), 유계, 송준길, 송시열에게 수학하였으며

윤휴, 윤선도 南人계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양명학에 관심이 컸다

.송시열 문하에서 가장 뛰어나 수차례 관직 제의를 한사코 뿌리쳤다

 

@송시열의 주장(회니시비)

.송시열의 예송논쟁에 윤父子(윤선거~윤증)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

백호(윤휴)를 감싸는 섭섭함에서 비롯되었다

.丙子胡亂에 강도(江都, 강화도) 수난과 탈출 사건을 언급하면서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친구들과 의병 모집후 을 사수하기로 약속했다

친구(권순장, 김익겸, 이돈오)들은 나라에 함락되던 날에

약속대로 죽었고, 윤선거의 도 자결하였고, 윤선거만 살아남았다

(김익겸은 서포 김만중의 父親, 김상용은 청음 김상헌의 큰형)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봉림대군 사신일행이 에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로 위장하여 뒤돌아가는 사신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으로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윤선거~윤증의 주장은 다소 다르다

.윤선거 주장: 권순장, 김익겸은 南門을 지키던 김상용이 분신자살하자,

적과 싸우지도 않고 자결했으며,

는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한 것이다

미복으로 강도를 탈출한 건 교전은 이미 끝났을 뿐 아니라,

적에게 포위된 南漢山城으로 父親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양쪽 주장(송시열~윤증)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윤선거가 강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은 사실이다

.윤선거는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하지않고

재야에서 평생 자숙한다

.죽을때까지 강도의 굴욕이 그를 옭아맨 족쇄가 된것이다

 

@송시열이 제자(윤증)의 마음을 저버린 2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송시열은 옛정을 생각해 윤선거를 칭송하는 제문을 보냈는데도

자신(송시열)이 미워하던 윤휴의 제문을 윤증이 거절하지 않고

받은데서 무척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윤증이 비명을 요청하며 가져간 기유의서(己酉疑書)”도 화근을 낳았다

윤선거가 죽기 4년전에 작성한 기유의서는 설령 윤휴~허목 등이

많은 잘못을 했을지라도 같은 士林이니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중용하는게 옳다며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증은 父親(윤선거)이 생전에 보내지 않았던 서신을 선의로 보여줬지만

이는 송시열의 비위를 더욱 건드린 격이 되고 말았다

 

@스승(송시열)과 제자(윤증)가 절교한 2가지 이유는?

.신유의서(辛酉疑書),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증오가 시작되었는데,

.숙종13(1687, 경신환국 다음해), 윤증이 쓴 편지를 말한다

.편지내용(요약)

1)송시열의 학문은 그 根本朱子學이라고 하지만,

기질이 편벽돼 朱子가 말하는 實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2)송시열의 尊明伐靑은 말로만 方法을 내세울 뿐 實益이 없다

.명재(윤증)은 신유의서를 먼저 남계(박세채)에게 보여줬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해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는데,

.송순석(송시열의 孫子~박세채의 사위)이 박세채 집에서 읽어본후

신유의서를 몰래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한것이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다

이후, 師弟간의 의절과 老論~小論 분당에도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스승(송시열)과 제자(윤증)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라섰다

*숙종의 3대환국(1680년 경신환국~1689 기사환국~1694 갑술환국)

 

@회니시비는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是非로 이어졌다

.삼전도 비문은 우암(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이 지었다

.송시열은 숭명(崇明)의리에 입각해 이경석을 성토하고 나섰다

.윤증 중심의 小論은 어차피 君臣에 항복한 상황에서,

누구든지 그 碑文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했다

 

4.사상적 갈등으로 西人이 분열(老論~小論)

@송시열~윤증 두 사람간의 政治思想적 견해차는 매우 컸다

.송시열은 朱子學 理念(절대주의자)으로 大義名分을 중시하였으며,

西人중심의 정국을 운용한 政治哲學 崇明反靑(숭명반청)”이었다

.윤증은 현실바탕 정치를 꿈꿔온 선비, 學文思想自由를 도모하였다

양명학을 인정하는 절충적 태도로 탄력있게 현실을 인식했다

.특히 경신대출척 이후, 윤증은 송시열이 전개한 편협하고도

비현실적인 정치에 크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신유의서(辛酉擬書, 1681)”에서 송시열의 행동과 사상을 비판했다

송시열의 독선적인 朱子學과 숭명의리론(崇明義理論)의 허구를

호되게 비판하여 송시열의 理念行動이 결국 허명(虛名)”이며,

이행(利行)”이라 했다

西人~南人간의 論爭老論~小論간의 마찰을 없애자는 의견을

장문으로 피력했다

 

@“가례원류?

.윤증의 스승(유계)이 사계 김장생한테 배운 禮學을 발전시킨 책이다

가례원류의 간행문제와 찬자 是非에서는 윤증의 배사론이 불거졌다

.집필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윤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떴다

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하였고,

사계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은후, 비로소 햇빛을 보는데,

권상하(송시열의 제자)는 윤증이 스승의 遺言을 저버리고,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후, 제자들도 老論~小論으로 첨예한 대립은 계속되었다

 

5.예송논쟁

@예송논쟁의 意義

.조선전기: 儒敎理念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였지만(왕권우세)

.조선후기: 士林勢力이 주도권으로 신권(臣權)儒學思想

政治的武器로 삼아 王權을 위협한(臣權우세) 대표적인 사례이다

 

@1차 기해예송 논쟁(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승하, 1659)

.인조의 첫째아들(소현세자)나라에서 귀국, 석달만에 의문사한다

.소현세자는 3명의 아들(석철, 석린, 석견)이 있었으나

.인조의 둘째아들(봉림대군)이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즉위하였다

.소현세자의 부인(강빈)은 인조를 독살하려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고,

3명 아들도 제주도로 유배되어, 막내아들만 살아 남았다

.효종은 즉위하여 10년동안 송시열등 척화파의 지지를 기반으로

북벌을 준비하던중 재위 10년만에 승하하였다

.효종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을

3년으로 할것인지? 1년으로 할것인가? 西人南人의 논쟁이다

.西人(송시열)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을 경우

성리학에서는 장자(長子)경우 3,

차자(次子)일 경우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임금이라도 예법을 초월할수 없고,

왕가의 특수성도 부정하는 주장한다(임금보다 주자학예법중시)

.南人(윤선도)은 효종이 차자이지만,

임금이니 장자가 될 수도 있다차장자설(허목)”을 내세운다

.결과: 西人의 승리, 1년 복제를 치른다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南人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西人(영수 송시열)은 효종때부터 권력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19세의 현종이 西人을 내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차 갑인예송 논쟁(효종비 인선왕후 승하, 1674), 15년후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西人南人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이다

.西人: 인선왕후를 차자부로 대접하여 9개월 복상을 주장한다

.南人: 왕비이므로 장자부로 대접하여 1년 복상 주장하였다

.결과: 南人이 승리한다

1차 예송논쟁에 선왕을 차자로 몰고간 西人에 대한 현종의 불만,

1차와 2차의 기준이 다르고, 南人에 반대하기 위하여

1년에서 9개월로 고치는등 西人들의 주장을 문제삼으며

1차 예송논쟁의 결정도 南人(3년복상)주장으로 바뀌어 西人이 몰락

 

6.우암 송시열은 누구인가?

@우암 송시열(1607~1689, 83) 西人의 영수

.화양동서원, 송우암유허비

8세 공부(송준길) 선조40년 출생(1607)

中國 朱子무이구곡을 본뜬 화양동계곡, 암서대 정자

만동묘(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의 사당)

.한천정사(서원, 1910 재건), 남간정사

.栗谷의 기호학파로써 儒學의 영남학파와 쌍벽이었다

.孔子, 孟子처럼 松子로 불렀다

.노론의 영수, 조선실록에 3000번 이상 기록된 인물

.송시열의 부친(주자학)은 율곡, 조광조, 사계 김장생(1548~1631,예학)

등과 매우 친밀했던 유복한 집안출신이다

.선조40(1607),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출생하여

3,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썼다고 한다

8, 송이창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송준길을 만나며,

두 사람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로 지내게 된다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다

.김장생, 김집의 가르침을 받으며, 윤선거(윤증 父親)와 우정을 나눈다

.29세 생원시 장원급제(인조11. 주역 논술), 繫辭上傳(계사상전)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 순환하여 움직이는것이 )

.봉림대군의 스승(효종즉위 1649)

.병자호란후 낙향, 정계복귀후 북벌계획(효종 1649)

.예송논쟁(효종사망: 1659, 5), 西人들의 몰락

*조대비 복상문제(1674)

*효종비 사망 2차 예송논쟁(1674)

*16891, 장희빈(숙의장씨)의 아들(경종)의 세자책봉을 반대

(제주 유배, 6월 한양으로 압송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1694년 갑술환국에 西人집권으로 명예회복한다

 

@송시열의 유배

.1674, 덕원에 유배

(효종이 죽은뒤, 효종의 母親 조대비의 복상문제)

.1675(숙종1), 장기곶에서 5년간 위안리치 유배(오도천의 집)

.매일 孫子(주석)와 토론하였다

.위리부근에서 산책길에 혹시 위리를 넘어간 적이 있었느냐?”

.손님들이 위리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남쪽지방에는 학질이 많았다

.학질환자 손님이 위안리치에 들어오면 깔끔하게 나았다

.송시열이 떠난후, 환자의 등에 송대감글씨를 써붙이면 완쾌되었다

.1679, 거제도 유배지 이동

.아내의 임종, 사위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

.아내 빈소에 손자(희석)를 통하여 제문을 보낸다

.정읍 수송동에서 賜藥을 받다(1689. 숙종15)

유언(朱子가 죽기전에 곧을 을 알려준다)

.죽어서도 붓으로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천하를 휘어잡았던 정치인이었다

 

@질마재

1)괴산 질마재

.괴산 질마재: 나라 황제를 매료시킨 낙영산(落影山)이다

.황제(高祖)는 세수대야 물위에 낙영산 그림자가 비친다

.畵家를 불러 대야속의 을 그리고, 中國을 샅샅이 찿았으나

.아무도 그림속의 산을 찿지못했다

.꿈속에서 동자승이 은 동방의 新羅國에 있다고 알려준다

결국신라에서 낙영산을 찿았던 것이다

落影山, 그림자가 떨어진 산이다

.그림자 그늘이 질마재이다(靑太宗인가?)

2)평창 면온고개 질마재

.말안장이 떨어진줄도 모르고 도망친다(태기왕)

3)고창 질마재

.선운사(도솔암) 뒷산언덕으로 미당 서정주의 문학 고향

 

 

@비겁하지 않게 원수를 대하라!

.숙종시절, 명신 허미수와 송시열은 서로 대립하는 사이였다

.허미수는 송시열에 의하여 한 때 좌천되기도 했었으며,

.입장이 바뀌자 허미수는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고 주장했었다

.먼훗날, 송시열이 병에 걸려 온갖 약을 써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허씨 집안 전통으로 전해 내려오는 비방이 아니면

고칠수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시열은 허미수에게 약처방을 얻고자 하지만 집안에서 모두 반대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허미수가 송시열을 해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허미수는 우리의 政敵이지만 병든 사람을 해칠 사람이 아니다

.어쩔수없이 허미수에게 요청하자, 처방을 지어주며 물었다

이 처방대로 약을 지어드릴 수 있겠는가?”

.송씨 집안의 사람들이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와 처방전을 펴보니

과연 그 처방전에는 비상을 넣도록 되어 있었다

.송시열은 그대로 지어라. 허미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비상만은 처방전보다 조금 적게넣은 약을 먹고 완쾌된다

.송씨 집안에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허미수를 찾아간다

.허미수가 물었다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드렸느냐?”

.송씨 집안의 대답은 비상만은 조금 적게 넣었습니다

.허미수가 크게 웃으면서

허허, 그래? 그 정도라도 넣었으면

앞으로 살아가기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일세....”

 

 

 

 

 

 

水落山 鷺江書院(박세채)

1.수락산과 노강서원

@水落山의 유래?

.비온뒤 물이 계곡에 고이지 않고 낙수물처럼 떨어져

빗물이 지체없이 흘러 버린다는 뜻이다(계곡에 물이 없다)

.수락산에는 정재 박태보와 남계 박세체를 모신 노강서원과

박세당 古宅이 있으며, 梅月堂 김시습과 인연이 많은 곳이다

.동쪽편 계곡 靑鶴洞의 풍광은 비교적 수려한 편이다

 

@鷺江書院(박태보, 박세채)

.서계(박세당)2째아들(정재 박태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남계 박세체를 배향한 賜額書院으로 정조가 내린 懸板이다

*정재 박태보(박세당의 아들)

학문이 깊고 성품도 강직하여 인현왕후 폐위(숙종15, 1689)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던중 鷺梁津 부근에서 순절하였다(己巳換局, 우의정)

숙종21(1695) 서원을 짓고, 숙종23(1697)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鷺江이란? “백로가 즐겨찿는 강변을 의미하며,

*鷺梁津이란? “백로가 노닐던 곳, 물고기를 낚던곳을 말한다

명칭이 약간 변형되었다(노들길, 노들섬...)

., 박세당 고택은 韓國動亂(6.25)에 소실되어 최근에 재건하였다

.한때, 梅月堂(金時習)을 제사하던 淸絶寺로 이용하였으나,

興宣大院君(고종)에 의해 書院이 철폐된 수모도 겪은바 있다

 

2.노강서원

@서계 박세당 종택(반남박씨 서계공파 종택, 1631~1695)

.父親(박정)이 인조반정 공신 책록으로 조정에서 하사받은 땅에

5세손이 종택을 건축한것이 6.25사변에 불타고 사랑채만 남아있다

.앞마당 은행나무는 수령 400년이 지난 고목으로 매우 우람하다

.종택의 좌향이 서쪽인 이유는 도봉산과 중랑천을 바라본 것이다

.박정의 4째아들 서계 박세당은 인조7(1629)에 태어났다

.박세당은 현종~숙종시대 유학자, 중농주의 실학자로써

손수 농사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색경이 유명하다

 

@사변록의 후유증

.특히, 저서중에서 통설(사변록)에는 중국 고전을 담고 있는데,

大學中庸에 대한 견해가 두드러져 당대 주류세력(老論)들이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아쳐 유배되었으나,

후학 이인엽의 상소로 해배되어 돌아온 후 3개월만에 죽었다

*斯文亂賊이란?

儒敎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비난하는 말이다

老論(집권층)政敵 南人小論을 정치적 탄압하는 명분으로

이용하여 숙적을 제거한것이다

.당시 小論(서계 박세당, 백헌 이경서, 남계 박세채, 약천 남구만...)

약천 남구먼의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

 

@, 박세당이 죽었는가?

*박세당이 죽은 이유는 백헌 이경석 신도비문과 관련이 있다

.백헌은 청태종의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 비문을 쓴 장본인이다

(丙子胡亂이후, 인조17, 1639)

사실은 마지못해 비문을 쓰게된 것인데,

이때 우암 송시열은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데 신경쓴 것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백헌은 송시열의 비난에 직접 대응하지 않았다

.비문에서 이경석은 老成人, 君子의 상징인 鳳凰으로 비유했고

송시열은 不祥人, 봉황을 모욕하는 올빼미로 풍자하기도 했다

이에 老論이 발끈하였다

老論의 영수(우암 송시열)를 모욕했다고 생각한 老論파들은

서계 박세당을 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유배를 보낸것이다

.매월당(김시습)이 동봉에서 최초 은거하여 초기 아호(東峰. 동봉)이고,

박세당은 서쪽편 계곡에서 수련하여 西溪()로 정했다

 

@청풍정유지

.종택 위편에 있으며, 박세당이 김시습을 추모배향을 위해 청절사를 짓고

그 앞에 정자를 만들어 유생들과 학문을 강론했다

.맑은 바람(청풍)매월당의 맑은 정신을 본 받는다는 뜻으로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박세당 고택앞에 샘은 石泉이라 동네이름이 石泉洞이 된것이다

.지금도 그곳에 石泉洞의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박세당이 즐겨 찿던 취승대(聚勝臺)가 있으며,

처남(남구만)의 금석문 水落洞川이 선명하다

넓은 바위에는 西溪幽居”(서계유거)의 암각서도 보인다

박세당이 후학을 가르치던 궤산정도 남아있다

 

@朝鮮7대 명문가

1)태조 이성계(전주이씨), 왕족(519년간)

2)청음 김상헌(~~안동김씨)

3)남계 박세체(반남박씨)

4)학봉 김성일(의성김씨, 屛虎是非)

5)약봉 서성(대구 달성서씨, 徐之藥峰 洪之慕堂)

6)명재 윤증(파평윤씨)

7)사계 김장생(광산김씨)

 

3.윤증과 박세채의 담판

@명재 윤증, 55(숙종9,1683,庚申還國이후) 유명한 담판이 있었다

.벼슬을 응하려 했었으나 상경도중에 포기하였다

.3(호조참의)를 제의받고 漢陽으로 上京하던중,

과천 나좌량(동문수학)의 집을 방문하였다

.당대의 名門世族論客(남계 박세채, 1631~1695)을 만났다

남계(박세채)의 가문에는 박세당~박태유~박태보(노강서원)...

남계의 孫子사위는 西人의 영수(우암 송시열)孫子(송순석)이었다

노론~소론의 懷尼是非(회니시비, 1684, 노론~소론이 갈라서다)

당파 속에서 남계는 중간입장에서 蕩平策을 주장하였고,

끝내 윤증의 입장을 두둔하여 小論쪽으로 기울었던 人物이다

.1683, 懷尼是非(회니시비, 1684)가 일어나기 1년전에 만난 이유는

윤증의 입궐여부를 놓고 밤새워 討論을 한것이다

.일부러 만난 이유는 숙종이 三人同事(삼인동사)를 하명했기 때문이다

三人同事? 3(송시열, 윤증, 박세채)에게 政權을 맡긴셈이다

성격이 전혀 다른 3명에게 협력정치를 주문한것이다

송시열 中心으로 윤증(左靑龍), 박세채(右白虎)...

@명재 윤증이 요구하는 입각3대 명분(원칙)

1)西人南人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2)外戚(외척)勢道를 막지 않으면 안된다

3)당이 다른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지금의 잘못된 인사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첫째조건은 南人(嶺南學派)의 차별과

地域感情解消하는 방안이었다

*박세채는 3가지 조건이 不可能하다고 結論을 내린다

명재 윤증의 조건을 本人의 힘으로 풀어줄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재 윤증은 지체없이 故鄕(논산)으로 되돌아 온다

3가지 조건이 不可能하다면 나도 벼슬에 들어갈수 없다

.남계 박세채도 이에 공감하고, 출사를 포기하고 집으로 落鄕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우암 송시열도 속리산(괴산 화양동계곡)으로 落鄕한다

.다음해, 西人이 분열된다(老論 송시열~小論 윤증)

 

4.梅月堂(金時習)이 은거했던 수락산과 도봉산

.세종은 장차 조정에 큰일을 할 사내이니, 잘 키워라!”激勵하였다

.金時習(5神童)이 수도했던 오세암(雪嶽山) 명칭이 유래되었고,

훗날 만해(한용운)이 수도했던 암자이다

.21, 癸酉靖亂三角山으로 입산하였다고 전해진다

.24, 死六臣屍身을 거두어 鷺梁津에 매장하고 隱者로 살아간다

.31, 金鰲山(경주 남산)에서 수도하던중 달밤에 핀 梅花를 보고서

(梅月堂)自作하였고, 金鰲新話를 집필하였다

.38, 道峰山~水落山으로 옮겨왔다(성종)

.47, 再婚하였으나 폐비윤씨 퇴출사건후 다시 승려가 된다(연산군)

.수양대군, 정창손(領議政), 김질과 어색한 인연이었으며,

.부여(충남)의 묘비에도 五歲 金時習이라 쓰여있다

 

@小說 金鰲新話(최초의 漢文小說)

.만복산저포기(총각 양생: 영혼의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눠...)

.이생규장전(1359, 홍건적의 난...이생: 개성처녀를 만나지만...)

.취유부벽정기(개성 기생: 평양 부벽정에서...)

.남염부주지(경주 박생: 염라대왕/염부주와 지옥토론...권력남용?)

.용궁부연록(개성 한생: 박연폭포에 용왕, 선물과 용녀를 부탁...)

 

 

 

 

 

 

명재 윤증(파평윤씨)

@파평윤씨, 명제 윤증(86, 1629~1714)

.백의정승(선비정신)으로 名文家門으로 부흥시켰다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자락 玉女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玉女彈琴 明堂(옥녀탄금)으로 左靑龍이 거문고 지세로 유명하다

.古宅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어 숨길것이 없는 투명한 집안이다

현재 後孫이 거주하고 있으며, 뒤뜰 장독대가 일품이다

1년 전통문화 답사 인원 약 15,000여명이 古宅을 찿는다

.고을 서민들을 위해 집안에서 養蠶(양잠)을 못하게 하였다

*강릉 선교장, 일두 정여창 고택(빈집, 1450~1504)도 유명하다

.6.25사변에 조종사가 폭격을 만류했던 고택이다(당시, 인민군 사령부)

.遺言을 남기다 제사상의 크기를 90cm이상 하지마라

묘비에 徵士(징사)만 써라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던 선비)를 말한다

.조선의 대표 徵士는 명재(윤증)이며,

.조선의 대표 處士는 남명(조식)이다

 

@명제 윤증(86, 1629~1714)

.명분없는 벼슬을 20여번 거절한 선비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인생말년은 벼슬과의 戰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1, 우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8회 올리고,

.83, 판중추부사 사임상소를 9회 올린다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 임금 얼굴을 한번도 보지않고 천거되는

立身揚名의 명에를 남겼다

 

@당시, 숙종시대(1674~1720)는 당쟁 살육전의 하일라이트(예송~환국)

.己亥예송(1659)西人시대(우암 송시열)

.15년후, 甲寅예송(1674)南人시대

.6년후, 庚申환국(1680)西人시대, 장희빈의 득남

.9년후, 己巳환국(1689)南人시대, 세자책봉 문제(장희빈, 경종)

.5년후, 甲戌환국(1694)의 노론시대, 南人의 몰락

 

 

@명재(윤증)과 우암(송시열)은 사상적 대립관계로 볼수있다

.윤증의 父親(윤선거)의 묘비 비문내용을 보면 알수있다

.송시열은 철저한 朱子學派이지만,

.윤증은 기호지방 儒學을 계승하면서 朱子學과 약간 다른 노선으로

보다 (마음)을 중심으로 판단한 心學으로 陽明學과 일맥상통한다

.조선 양명학의 大家 하곡(정재두, 1649~1736)를 지도하였다

陽明學3대 골격(心卽理, 知行合一, 致良知)중에서

致良知가 핵심은 마음 자체가 곧 良志, 지혜이다

 

@朱子學은 도덕적, 윤리적인 성격의 를 중시한다

() 四端七情 가운데 四端이지만,

喜怒哀樂같은 인간적인 감정은 포함하지 않는다

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음)喜怒哀樂같은

(제거되어야 할) 인간의 감정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마음)을 중시한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純善(순선)이지만,

(마음)은 선악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까지도 용인되는것으로 본것이다

그래서 主理를 강조하는 朱子學派에서는 을 배척했던 것이다

 

@陽明學善惡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자체가 곧 良志이고, 知慧이다라고 주장한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卽心是佛)”禪家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마 윤증은 佛敎思想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仲父(윤상거)가 불교에 심오한 조예가 깊었다고 口傳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朱子學(마음)을 강조하는 陽明學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벼슬, 슬데없는 名譽의 집착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고

實心實功이 쌓인다고 윤증은 주장했던 것이다

훗날, 陽明學實學者(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명제 윤증이후, 소론의 학풍이 변화하게 된다

명분보다 실질, 실용을 중시하는 실학적 기풍으로 변화한다

.陽明學은 하곡(정재두)이후, 조선말기 강화학파(이건승, 김택영)출신들이

독립운동 투사로 변한것도 실천을 중시했던 심학적 전통이다

해방전후 박은식, 정인보, 송진우등도 심학의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종학당”(재야에서 후손을 가르켜 47명 대과 급제)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윤증 고택과 5분거리)

.1618, 仲父 동토(윤순거, 1596~1668)가 문중의 힘을 모아 건립했다

300년간의 가문의 장기 발전계획을 세운 장본인이다

학문적 지도는 동토(윤순거)의 동생(노서 윤선거)이 전담하였다

동토(윤순거)는 송시열과 학문적 논쟁을 벌인 일류 학자출신이다

이후, 동토의 아들(명재 윤증)이 가문을 번창시킨 것이다

.파평윤씨 노종파의 특별 교육기관이다(문중 서당, 가족 사립학교)

3(, , )을 위한 독특한 집안이었다

.대청마루 시판의 생활지침(명제의 친필)

日用(하루에 할 일), 夜寐(야매: 밤에 잠자는 것),

持身(지신: 몸가짐의 방법), 四勿(사물: 하지말아야 할 4가지),

讀書之序(독서의 순서), 讀書之法(책을 읽는법)

.중등과정을 마치면 윗 건물로 올라간다: 대학과정의 교육공간

현판 吾家白鹿(오가백록)”: 우리집이 곧 백록이다

*백록이란? 朱子에게 유래되었는데,

朱子白鹿洞에서 살았고, 白鹿洞 書院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淨水樓(정수루)2층 누각으로 80여명이 앉을수 있는 공간으로

멀리 조상들의 묘를 참배하고 공부를 하던 사방이 탁트인 공간이다

 

*1618(개교)~1910: 292년간 대과급제 42명을 배출하였고

종학당 설립이전에 이미 5명이 합격하였다(47명 합격: 파평윤씨)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배출 명문집안은 전주이씨(이성계 가문)이다

2위는 파평윤씨 460명 배출하였는데, 그중 47명은 명재 집안이다

.종학당과 정수루의 낙서가 아직도 남아있다

登科後初上樓(대과에 급제후 처음 오르다)

人傑在齊(인걸재제: 인걸이 이 공부방에 있도다)

南風萬抱(남풍을 한아름 안았다. 큰 뜻을 품는다)

*필운대 후면, 황학정터

(登科亭과 흡사하다: 과거 합격후에 올라서는 정자...)

.贍養(섬양)이란? “넉넉하다~풍부하다스승들의 급료를 칭한다

.課讀(과독)이란? 돈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켰다

.종학당의 입학자격이 신분 차별없는 문호개방이 이채롭다

 

@안동 屛山書院(서애 류성룡)의 비슷한 맥락이다

.晩對樓(만대루)에는 2층 루대로써 넓은 교실에서 낙동강이 보인다

.屛山書院도 고려말부터 류씨가문 교육기관으로

.1572(선조), 풍산읍에서 豊岳書堂(풍악)을 병산으로 옮겼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인간의 죽음을 극복하는 2가지 방법이란?

1)저술을 남기는것(法子: 사상을 이어받은 자식, 弟子)

제자는 죽음을 극복하는 문명적 방안이다

2)자식을 남기는것(血子: 혈통을 이어받은 자식, 子孫)

죽음을 극복하는 본능적 제안이다

 

@義田義倉제도 구현(민간 구휼사업)

.주변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위하여 일정량의 기금을 마련한 것이다

.利不可獨食 이익이 생기면 혼자 먹지않는다

.윤씨 노종파에서 오방파(5가구)가 분가해 나간다

.윤순거는 이 5가구에서 7마지기씩, 35마지기를 내놓고 농사후

일정량을 거출하여 문중의 기금으로 적립하여,

문중의 제사비용, 부조금, 어려운 집에 밑천과 양식을 제공한다

윤순거는 先墓(선묘) 주변에는 윤씨들의 거주를 금지시켰다

(윤씨들이 동네주민을 괴롭히지 않도록 사전에 접근을 차단했다)

 

@덕으로 베풀다(동토 윤순거)

.동네 집 대지와 채마밭의 소작료 면제해주고,

.동민들이 생활을 지탱할만큼 전답을 임대해 준다

.동민들의 경조사에 종중에서 상당량을 보조해주고 대여해 준다

.흉년, 우환등 재난시에 상당한 재원을 보조, 또는 대여해 준다

.현재, 덕보마을에는 의창비가 세워져 있다

*범중엄(북송, 명재상 출신, 989~1052)義田 제도를 창안했다

*김제 서도리, 장씨가문도 활용했던 제도이다

@東學戰爭도 피해간 積善之家(적선지가)

.고을 서민들을 위해 집안에서 양잠(누에)을 못하게 하였다

.가장 오래가는 카리스마는 도덕성 처신에 달려있다

.남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살 행동을 하지말라

.자기만 이롭고 다른사람에게 방해가 되는일은 하지말라

 

@명재 윤증의 진면목을 배워라!

.윤증의 생가는 조그만 초가 세칸집에서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보리밥, 볶은 소금, 고춧가루였으나, 방안에 책이 가득하였다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하여, 문틈으로 그린 옆모습이 전해오고 있다

유별나게 큰코(용코, 龍鼻 용비)는 대귀할 상, 결단력이 탁월함이다

.사실은 현재 고택은 큰아들(윤행교)가 살았던 윤행교 고택이다

.명재가 죽기 5년전(1709), 2째아들(윤충교)이 큰형을 위해 건축하였다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사랑채에 담장을 세우지 않았다

 

@6.25전쟁에도 살아남은 윤증 고택

.옆집에 살았던 박희동(공군 조종사)은 일본군 출신으로 낙향하였으나

6.25전쟁에 복직, 윤증고택(인민군 지휘부)의 폭격임무를 받았으나,

미공군을 회유하여 전통고택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앞마당에 石假山(석가산)을 조성하여 감상케 하였다

금강산을 모델로 만들어 상상케 한것이다

.사랑채 옆 편액: 桃源人家(도원인가)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

.화단을 둘러싼 정원석은 12, 하나가 巫山十二峰(무산십이봉)이란?

금강산 12000봉을 줄인 숫자인 것이다

*巫峽(무협)이란?

황토빛 長江三峽중에서 瞿塘峽(구당협)이나 西陵峽(서릉협)보다

巫峽(무협)이 주는 풍광이 가장 압권을 자랑한다

.현재 12대종부(신정숙)가 살고있다(대지: 3000, 50칸 고택)

 

@충청도 3대 명문집안

.연산 사계 김장생(광산김씨)

.회덕 우암 송시열(은진송씨)

.논산 명재 윤증(파평윤씨)

 

 

 

 

 

 

파평윤씨 세도정치(문정왕후)

@파평윤씨의 득세는 수양대군비 정희왕후 수렴청정(성종)을 시작으로

.정치전면에 등장하여 많은 왕비(후궁)을 배출하는 명문가문이다

.父親(윤번)의 큰딸이 정희왕후~둘째 윤사윤~셋째 윤사흔...

 

@大尹계보: 윤사윤의 아들은 윤보이다

.윤보의 孫女는 중종비(장경왕후)로써 大尹의 중심이다

.연산군을 퇴출시킨 중종반정, 7일후에 왕비(단경왕후)를 폐위시키다

政敵 신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거창신씨) *영남별곡(거창)참고

12살의 단경왕후는 평생동안 중종이 불러주리라 믿었다

사무치는 기다림,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속의 주인공이다

죽은뒤에도 장흥에 홀로 잠들었다(남편이 그리워 온릉이다)

.손자는 윤임, 아들은 2명이었다

.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권자에서 물러난것이다

 

@小尹계보: 윤사흔의 2째아들이 윤계겸이다

.윤계겸의 증손녀, 유명한 문정왕후가 명종의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문정왕후의 4째동생 윤원형(영의정)은 기와집 16채를 소유했다

.후첩이 여인천하 정난정(정종석의 서고모)으로 정경부인으로 부각된다

 

@乙巳士禍(1545, 명종1), 파평윤씨들의 세도정치의 서막

.윤원형(영의정)9촌아저씨(大尹)세력을 처단하는 士禍(비극)이다

.大尹(장경왕후)는 서삼릉에 혼자 잠들어 있고,

.小尹(문정왕후)는 태릉에서 홀로 명종 부부곁에 쓸쓸히 보내고 있다

.중종도 졸지에 선정릉에서 홀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선릉을 위해 봉은사를 중창하고, 판서급 정치스님(보우)이 등장한다

.문정왕후는 서삼릉에 장경왕후와 합장되어 있던 중종의 묘를 이장하여

선정릉(선릉역)으로 안치하고, 본인의 옆자리는 비워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은 문정왕후(母親)을 홀로 태릉으로 모신것이다

父親과 생모를 합장하지 않았을까?

 

@파평윤씨의 궁궐내 권력중심에 등장하는 역사는 참으로 다양하다

 

 

 

 

 

 

 

항재 정종영과 파평윤씨

@원주 송호鄭氏 와 파평윤씨(문정왕후)

.지정면 송호리(, 월송리)

.초계鄭氏(관동파), 여주에서 원주로 이전후(조선초기) 성공했다

.항재 정종영(중종~선조, 4명임금을 보좌, 50년간 공직생활)

.청백리 표상(4도 관찰사+6조 판서+청백리)

.원주에 낙향후 사망하자(77), 선조는 이틀간 식음을 하지않았다

.선조는 불천위: 영원히 사당에 모셔라를 하사하였다

 

@정난정 여인천하”(윤원형, 문정왕후)

.파평윤씨(소윤) 문정왕후 수렴청정(명종)할 때,

정종영은 관직을 거절한다

.영의정(윤원형)의 세력에 참여를 제의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외척의 정치관여는 안된다거부하자, 탄핵위기가 왔다

.정난정(정종영의 서고모)의 모친(정종영의 祖母)이 강력 항의한다

우리 종손을 해친다면, 내가 먼저 죽겠다

.고모 정난정의 남편은 윤원형(영의정, 문정왕후의 남동생)

.정난정의 부친(정윤겸: 정종영의 祖父, 부총관: 군부요직)

관비출신 어머니(서녀출신)와 혼인하였다

.서얼출신으로 정경부인으로 진출한 전무후무한 입지적인 여인이다

권력을 농단한 천하의 요부로 낙인은 남겼으나,

서얼허통법으로 혁명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불교를 중흥시켰다

.원주~횡성에는 항재 정종영, 정난정의 후손 집성촌이 있다

.己卯士禍~乙巳士禍

*영제, 모의천하와 흡사하다(조비연, 조합덕...)

 

@조선시대 6조판서 역임한 선비는 총29명을 배출하였다

.29명중에서 청백리는 5명이다

1) 황희(세종)

2) 청음 김상헌(선조)

3) 오상(중종~선조)

4) 이세화(숙종, 인현왕후 폐출반대, 귀향)

5) 정종영(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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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