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8. 제39차 지구연차대회 준비회의 및 현지답사
秋史 金正喜는 누구인가?
秋史 金正喜는 누구인가?
@추사 김정희가 석농(石農) 이종우(李鍾愚 1801~?)에게 보낸 펴지
.김정희는 1849년, 64세의 노령으로 9년 동안의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한강변 용산의 집에서 살았다. 여기서 강은 바로 한강을 가리킨다.
.이종우는 산수화를 잘 그렸고,
글씨는 신위(申緯)와 김정희의 필법이 조화된 독특한 서체로 필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가뜩이나 추운 동짓달, 김정희는 차가운 강바람이 냉기를 몰아오는
한강 가의 집에서 입을 덜덜 떨며 웅크리고 앉아 있다.
.긴 유배에서 풀렸지만 아직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처지라
자유로이 나다니는 물고기와 새가 부럽다.
.그래서 자기의 삶이란 것이 아무 일없이 한가로운 저 산속 노승의 찰나만도 못하다고 투덜거린다.
그렇지만 이 편지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 따위는 읽을 수 없고,
오히려 추운 겨울 한 그루 낙락장송 같은 굳고 곧은 기품이 느껴진다.
☀편지내용
“강가라서 유달리 추운데다 동짓달이라 추위가 닥쳐와 입이 덜덜 떨립니다.
요즘 추운날씨에 벼슬살이에서 평안하심을 살펴 알았으니, 송축합니다
다만 지난날 외진 산골에서 쓸쓸히 사실 때나 현재 요직에 올라 현달한 때나,
만난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실 뿐이겠지요.
나 같은 사람은 외진 강가에 틀어박힌 채 마음대로 찾아가 만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물고기와 새에게 비웃음을 받기에 알맞고,
또한 이내 삶이란 것이 깊은 산 속 노승(老僧)의 찰나만도 못합니다. 우스운 노릇입니다.
머잖아 한 번 찾아 주신다니, 참으로 몹시 바라던 바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번잡한 일들을 떨쳐버리고 한가한 틈을 내어 오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추위가 겁나서 집안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중씨(仲氏)의 행차는 평안히 돌아왔다니, 다행입니다.
써주신 연구(聯句)는 잘 받았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김정희가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에게 보낸 편지
.권돈인은 서화(書畵)에 뛰어났고, 김정희와 특히 친밀하였다.
☀편지내용
“추위의 여세가 곧장 세밑까지 이어진데다 썰렁한 江기운마저 엄습하니
동파(東坡)의 지옥(紙屋)과 죽탑(竹榻)으로는 월동을 걱정하지 않을수 없고,
당 태위(党太尉)가 고주(羔酒)를 조금씩 따라 마셨던 풍류도
내게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추운 아침에 손을 호호 불고 이 가절(佳節)에 무료함을 더욱 느끼면서,
그저 산중에서 눈 녹인 물에 차를 우려 마시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던 차에 뜻밖에 보내주신 편지와 함께 좋은 술과 산짐승 고기를
받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내 구미(口味)에 너무
호사스러울 뿐 아니라 식욕도 가라앉았으니,
저 연한 양고기에 은합(銀榼)의 술을 마신
모산(茅山)의 도사(道士)들은 식탐이 많은 배불뚝이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추운 밤, 종묘에서 제향(祭享)을 모시느라 아직 지난 번 병세(病勢)가
곧바로 쾌차하지 못했음을 살펴 알았습니다.
푸른 암벽, 푸른 이내 낀 산 속을 유람하여 정신을 조용히 쉬어야만
공무에 찌든 속진(俗塵)을 씻어낼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쉽지 않은지요?
나 같은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견디지 못하고 있으니,
신선이 되어 훌쩍 떠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앓던 해수증(咳嗽症)은 이곳의 좋은 샘물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비록 달팽이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있지만
기침이 심하지않으니 자못 기이합니다.
보내주신 두 서화첩(書畵帖)은, 요즘 창가에 앉아
그 토묵(吐墨)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참으로 진기한 작품입니다.
게다가 오방치(吳邦治)가 쓴 화제(畵題)는 필법이 고아(古雅)하여
좋으며, 또 홍설재(鴻雪齋의 글씨는 바로 저수량(褚遂良) 서법(書法)의 정수를 얻은 것입니다.
*홍설재(鴻雪齋)?
淸나라 사람으로 詩~書~畵에 모두 뛰어났던
황단서(黃丹書)를 가리킨다. 그의 호가 설재(雪齋)이다.
*저수량(褚遂良 596~658)?
唐나라 명필로 그의 서법은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을 계승하고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의 장점을 두루 갖추어 힘차면서도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 두 서화첩의 작자가 모두 누구인지 알 수 없단 말입니까.
천하가 지극히 넓어 이들이 두 사람 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혹 우리나라가 외진 지역이라 견문이 미치지 못했을 뿐
강소(江蘇)ㆍ절강(浙江) 지역에는 잘 알려진 사람들인 것입니까.
어찌하여 화록(畫錄)이나 서보(書譜)에 이 두사람 중 한사람의 이름도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李氏 화권(畫卷)의 청록색은 그 선염(渲染)이 더욱 신묘함을 알겠으니,
*선염(渲染)? 묵법(墨法)과 담채법(淡彩法)의 한 종류로써 바림 또는 설색이라고도 한다.
먼저 화면에 물을 칠하고 마르기 전에 수묵이나 채색을 칠하여
붓 자국이 보이지 않게 축축이 번지는 점진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대개 한쪽을 진하게, 다른 한쪽은 갈수록 엷고 흐리게 나타낸다.
산수화에 구름이나 안개가 끼거나 비가 오는 경치, 달밤 등을 그릴 때 많이 사용된다.
옛 사람이 “그림을 좋아함이 골수(骨髓)에 들었다.”고 한 것을
이런 데서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한번 보고난 서화(書畵)에는 마음을 머물러 둔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서화첩은 차마 손에서 선뜻 내려놓지 못하겠습니다.
잠시 여기에 두어 더 감상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종전의 묵은 벽호(癖好)가 다시 도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 눈 내릴 때 산방(山房)에서처럼 마주 앉아
이 서화첩을 함께 품평할 수 없는 것이 몹시 아쉽습니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여모유첨(與毛維瞻)”이란?
편지내용에 歲行盡矣, 風雨凄然; 紙窓竹屋, 燈火青熒
(“한 해가 다 갈 즈음 비바람이 썰렁하니,
종이를 바른 창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집에
등잔불이 푸르스름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지옥(紙屋), 죽탑(竹榻)은 지창(紙窓), 죽옥(竹屋)을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는 물론 김정희 자신의 집을 비유한 것이다.
.宋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도곡(陶穀)이
당 태위(黨太尉) 집의 기녀(妓女)를 얻어서 돌아오는 길에 눈 녹인 물로 차를 우려 마시면서
“당 태위 집에서는 이러한 풍류를 몰랐겠지?”라고 하자,
그 기생이 대답하기를
“그는 거친 사람이니, 어찌 이러한 풍류가 있겠습니까.
다만 따뜻한 소금장(銷金帳) 안에서 잔에 얕게 술을 따라 마시고
가기(歌妓)의 나직한 노래를 들으며 양고주(羊羔酒)를
마실 줄 알 뿐입니다.”고 하니, 도곡이 부끄러워했다는 고사가 있다.
소금장은 금색 실을 넣어서 정교하게 짠 고급 휘장이다.
양고주는 이름난 미주(美酒)이다.
元나라 송백인(宋伯仁)의 “주소사(酒小史)”에 “산서(山西)에는 양고주이다.”고 하였다.
.중국 낭주(朗州)의 도사(道士) 나소미(羅少微)가
모산(茅山)의 자양관(紫陽觀)이란 도관(道觀)에 기숙할 때
정수재(丁秀才)란 사람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추운 겨울 싸락눈이 몹시 내리는 밤에 두세명의 도사들이
화롯가에 둘러앉아서 살찐 양고기와 좋은 술을 먹고 싶다고 탄식하자
정수재가 “그걸 가져오는게 무어 어렵겠습니까.” 하고는
곧바로 나갔다가 밤이 깊을 무렵 눈을 맞으며 돌아와
은합(銀榼), 즉 은으로 만든 술통 하나와 익힌 양 다리 하나를
가져다 놓고는 문득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북몽쇄언(北夢瑣言)”에 나오는 얘기이다.
.토묵(吐墨)은 明나라 원굉도(袁宏道)의 유래는 “졸효전(拙效傳)”의
“오징어는 먹물을 토하여 자신을 가린다(烏賊魚吐墨以自蔽])”
그림에서 먹물이 번지는 것을 형용한 말인 듯하다.
@세밑이라 거리는 흥성거렸으리라.
.김정희는 추운 한강가 집에 틀어 막혀 있다가 친구가 보내준
산짐승 고기와 술을 마시며 과분한 호사라고 감사하고,
연한 양고기를 뜯으며 은합에 담긴 좋은 술을 마셨던
모산(茅山)의 도사들은 식탐이 많은 자들이었다고 농담한다.
.김정희는 작자가 누군지 알수없는 두 서화첩(書畵帖)을 감상하고서 매우 품격이 높다고 감탄한다.
.그리고 그중 작자가 李氏임을 알수있는 화첩 그림의
청록색 선염(渲染)이 더욱 신묘함을 느끼면서,
자신이 서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쳤다고 자조(自嘲)한다.
.환로는 순탄치 못하여 오랜 유배의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하늘이 준 반대급부인가?
.김정희는 좋은 서화를 감상하는 청복(淸福)을 누릴 수 있었다.
歲寒圖(세한도)
@通儒 秋史 金正喜(1786~1856)
.추운 겨울이 오면(歲寒),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떠오른다.
추운시절을 그린 그림으로 조그만 온정에도 마음깊이 감사하게 되니
人之常情으로 따스함을 그리워 했다
.1844년(한갑 직전), 제주 유배5년,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이
자신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려 보낸 작품이다
@화제(부제) 요약
“지난해 계복의 만학집, 운경의 대운산방문고의 책두권을 보내주고,
올해 하장령의황조경세문편(120권)을 보내주니...
세상분위기는 권세와 이득을 쫏는 풍조인데...
*太史公 司馬遷(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
*孔子 논어(자한편)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과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수있다”
*前漢(급암, 정당시 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법이거늘,
하규현의 적공이 대문에 그씨를 써붙인것은 세상인심의 절박함이
극에 달했다는 것으로 참 슬프다...)”
@bc680(春秋時代), 사마천이 세상 민심을 한탄하다!
.정여공은 왕위에서 쫓겨나 17년간 변방에 피신하였다
.여공은 대부(보가)를 사로잡아 협상하였다
“죽이지 않을테니, 나를 다시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달라...”
.보가는 약속하였다 “놓아만 주면, 지금의 왕을 죽이고 여공을 세우겠다”
.神 앞에서 맹세하니 풀어주니, 왕과 왕자를 죽이고 여공을 맞이하였다
.정여공은 왕으로 즉위한후, 보가(대부)를 처형하였는데
“너는 두마음을 가진 자이다...”
.보가는 한탄하였다 “무거운 은혜를 갚지않고 이럴수가 있느냐?”
.애당초 정여공이 간계로써 형을 몰아낸 즉위했던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炎凉世態(염량세태)를 史記(정세가)를 평가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
@司馬遷 평론(급암, 정당시 열전)
“대저 급암과 정당시 같은 어진사람들도 세력이 있을땐
빈객이 10배나 되었지만, 세력이 없어지자 빈객이 모두 흩어졌으니..”
“하규현의 적공이 처음 정위(검찰총장)가 벼슬에 올랐을때
빈객들이 문을 메웠으나, 벼슬을 잃으니 문밖에 새그물을 칠만큼 찿는이가 없었다
적공이 다시 정위로 등용되자 빈객이 또 찿아오기 시작하였다
적공은 대문에 큰 글씨를 걸어놓은 것이다
(한번 죽고 한번 사는 삶에 사귀는 情을 알았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자에 사귀는 態를 보았으며,
한번 貴하고 한번 천해짐에 사귀는 情이 드러났다...)”
@秋史는 司馬遷의 고사를 2번 인용한것은 情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슬프다(悲夫), 司馬遷은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으로
宮刑(불알을 썩이는 벌칙, 벌금 30냥이 없어...)
.장부로써 최대의 치욕적인 형벌을 극복하고 史記를 완성하였다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우선시상)
“추운 시절의 그림이네, 우선이 이것을 보게, 완당”
.황량한 유배지의 고독과 고통을 의지로써 극복하면서
변치않는 옛 제자의 고마운 정을 담은 내용이다
.長毋相忘(장무상망) “오랫동안 잊지말고...”
漢나라 “막세가와”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우선 이상적의 답장(편지)
.이상적은 18세 연하, 中人(역관)으로 중국을 12번 다녀온 인재이다
.詩로 명성을 얻어, 중국 문인들과 친하였으며 벼슬길도 순탄하였다
.이상적의 문집 제목 “은송당집”의 의미가 있는 뜻이다
“헌종 임금께서 직접 그의 시를 읊어주신 은혜가 있었다”
.1862년, 임금의 특명으로 종신 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답장(편지)
“한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절로 흘러 내리는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이번 사행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가면 표구를 하여
지인들게 두루 보이고 시문을 청하고자 합니다... ”
.다음해 10월 동지사의 역관이 되어 북경을 갔다
다음해 정초에 청나라 문인 16명에게 스승의 작품을 보여준 것이다
작품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감격하였다
.두사람의 우정에 頌詩(송시)와 贊文(찬문)을 받아
10m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여 유배지로 보냈다
.이상적은 스승(추사 김정희)의 부고를 받고 詩를 올렸다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
힌 꼬심의 난꽃과 추운시절의 소나무!”
*세한도의 정처없는 유랑의 길!
추사~이상적~북경~추사(사망)~이상적~제자 김병선~아들 김준학
~후지즈카 린(일제시대, 경성대학 교수, 추사 연구가)~1943년 일본
~한국전쟁 직전, 소전 손재형(화가)이 도쿄 찿아가 3개월 설득
~많은 작품은 전쟁에 불타버린다...
.오세창의 감회(세한도를 다시보면서...)
“마치 황천에 갔던 친구를 다시 일으켜 악수하는 심정이라...”
@추사 인물화의 후담
.1857년, 이한철의 초상화(추사김공상)
.상유현(1844~1923)의 “추사방견기”의 놀라운 자료가 발견된다
“1856년 10월 사망, 6개월전에 13세 소년이 관찰한 내용...
상유현이 어린시절 60년전을 회상하여 초상화를 그릴수 있었다”
.이한철은 한의사 가문(中人)에서 학문을 즐겨 300여권 책을 남겼으나
한국동란에 소실되고 천우신조로 “추사방견기”만 살아남았다
.김약슬(서지학자 1913~1971)의 “도서 10호”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글자의 온화함과 묵직함, 바르고 곧음이나 아리따운 짜임새가
백하 윤순(1680~1741)과 원교 이광사(1705~1777) 보다 못한데도
작품값은 백하와 원교보다 높으니 알수가 없네...
1856년, 간암 이인석(1821~1858), 어당 이상수(1820~1882).
단번 윤치조 3명이 과천 반곡에 있는 식암 선생댁에서 묵었울때
봉은사에 가서 추사선생을 뵌적이 있어...
추사의 서재, 나무 안장에는 인장이 수십 덩이가 있었다... ”
.당시 유명한 書聯(서련 3짝)
“봄 바람같은 큰 아량으로 능히 만물을 받아들이니,
가을 물처럼 맑고 고운 문장은 세상 티끌에 물들지 않았네... ”
“산골짝 집에서 푸른이끼로 새끼사슴을 길들이고,
돌밭에 내리는 봄비속에 인삼을 심네... ”
“노국 문언박(1006~1097)은 만년에 오이려 건장했고
여단(935~1000)은 큰일을 맡아서 우물쭈물 한적이 없었다”
추사는 여러 어른을 대하시고 이인석의 외삼촌인
침계 윤정현(1793~1874)공의 안부를 물으셨다
침계가 함경감사 시절, 추사의 문인으로 스승이 북청에서
유배생활 할적에 뒤를 돌봐준 인연이 있다
윤정현의 부탁을 받고 “梣溪(침계)”30년간 고민하였는데
결국, 해서와 예서를 섞어 써준 것이다
秋史 金正喜는 누구인가?
@通儒 秋史 金正喜(1786~1856, 경주김씨)
.예산 고택, 曾祖父(월성위 김한신 1720~1758)
화순공주(영조의 둘째딸)와 혼인, 토지와 53칸 대궐 하사
高祖父 묘소 白松나무(김흥경, 병자호란), 중국에서 가져왔다
추사 집안의 사찰, 화암사(오성산자락)
화암사 뒤편 바위글씨(詩境, 天竺古先生宅. 천축고선생댁)
(詩境은 중국사신단 시절 宋애국시인 육방옹의 필체이다)
(天竺은 인도를 상징, 古先生宅은 부처가 계신곳)
.1m 석주(石年 글씨)기둥 그림자로 시간을 체크했다
주련: 추사체의 변화를 알수있다
.추사의 11촌 대고모(정순왕후, 영조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호조참판, 사촌오빠: 김관주 영의정)
.한양 曾祖父(월성위 김한신)에서 생활
.스승 박제가(1750~1805)
.父親(동부지사 김노경 1766~1840), 북경 사신단 합류(자제군관)
.중국 고증학 탑구(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시구사..실용학문 관심)
.北學(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으로 규장각 설치(비원 주합루, 부용지)
.연경에서 조강(曹江), 서송(徐松), 담계 옹방강(1733~1818), 운대 완원(1764~1849)를 만났다
.1840년, 안동김씨(대사간 김우명, 김흥근)에 밀려
10년전 “윤상도 옥사사건”을 빌미로 父親(故人)을 공격하여
예산에서 체포, 의금부로 압송, 제주에 유배(9년간 위안리치)
.25세, 중국 노대가 옹방강(78세, 1733~1818)을 첫대면을 했을때
“조선에 이런 영재가 있었던가?”라고 탄복하면서
“경전, 학술, 문장이 조선의 으뜸이라!”는 즉석 친필을 써주었다
.임종 직전 뚝섬 봉은사에서 매일 청정심을 팔뚝에 박고 지냈다
@제주 五賢檀(오현단): 귤림서원 사액(숙종), 서원철폐(대원군)
.유배(3명):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공직자: 규암 송인수(제주 목사), 청음 김상헌(안무사)
.추사 김정희도 제주대정에서 9년간 유배가 해배되어 상경하면서,
먼저 동계고택(안의)을 찿아가 사랑채 “忠臣堂” 친필 현판을 남겼다
@해남 대흥사 현판이야기(초의선사)
.피안교를 건너 두류산 대흥사 扁額(아는만큼 느낀다!)
.圓嶠 李匡師, 대웅보전, 천불전, 沈溪樓(침계루)
말을 세우고 “편액 글씨가 참으로 훌룡하도다! 누구 글씨인가?”
원교 이광사의 필체임을 알고 혹평하였다
“형편없도다! 당장 철거하고 내 글씨를 걸어라”
해배되어 상경길에 초의선사(대흥사)를 찿아가서
원교(이광사)의 현판을 찿은뒤, 대웅전에 걸도록 하였다
.秋史 金正喜, 무량수각
훗날, 해배되어 대흥사에 들러 본인 현판 글씨에 부끄러움을 가졌다
.창암 이삼만(전주), 鴐虛樓(가허루)
제주 유배길에 전주부사의 접대를 받으면서 창암 이삼만(거예가)을
호출하여 글씨를 써보라고 독촉하였다
“글씨가 형편없네!” “당신이 써보시오”
몽당 붓을 보고난뒤, 정중히 사과하며 새벽까지 술을 권했다
유배 해제되어 전주를 찿아 창암 부인의 묘비를 추사체롤 써준다
@석전(石顚)과 추사 김정희
.정호스님(1870~1948)의 법명이 석전(돌머리, 박한영)이다
질마재 선운사 백파에게 추사는 종이쪽지에 아호를 적어주었다
“石顚”이란? “누구 주고싶은 사람이 있으면 줘라”
.서랍속에 보관하던중 박한영(19세, 전주 태조암)에게 준것이다
.조선불교 敎正을 지낸후, 정읍 내장사에서 보냈다
.최치원의 사대비명, 석전 노인주는 백파의 제자 한영스님이다
.백파스님은 아호를 넘겨주지 못하고 입적하면서 유언을 했다
“이것은 추사가 내개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에 임자가 있으면 찿아가라”
.영호스님이 절간 서랍에서 발견하여 자신의 아호로 사용한것이다
*논쟁 “백파망증 15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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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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