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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상공회, 종로산악연맹(종로구 등산연합회)

2014-0518.종로구 등산연합회 서울시장기 등산대회

by 조흥식 2023. 1. 29.

2014-0518.종로구 등산연합회 서울시장기 등산대회(은평구 진돤동 북한산 진관사)

충청도 사인암에 놀러간 사람과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충청도 사인암에 놀러간 사람과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은평구 진관사에서 서울시장기 등산대회에 종로구도 참가하였다

*서울시장 후보(정몽준, 박원순)들은 카메라 후레쉬 세례를 받앗았다

*의상봉 등산코그 증취봉에는 암각문이 있다

紫剛海印臺는 누구 필체일까?

 

@조영경(趙榮慶, 1742)

*“취한 듯 살다가 꿈꾸듯 죽는 인생

나의 마음은 늘 슬프구나,

잠깐의 유람이나 평소 바라던 것 산골짜기를 다녀보았네

우뚝하여라 바위 홀로 서 있는데 사인암은 누구의 자취인가

영롱하여라

세 겹의 절벽 먹줄 놓은 듯 천 길이나 곧구나

일곱 구비 맑디맑은 물 한 웅덩이 푸른 옥거울,

반반한 돌은 상,

높은 돌은 베개,

하늘이 사람 누울 바위를 빌려주었네.

계곡 길 가마가 강의 배보다 나으니

편안한 자세로 그윽이 경치를 감상하네

 

@1803(순조3), 서화첩(사군강산참선수)에 그림과 함께 수록된 작품이다.

*그림은 기야(箕埜) 이방운(李邦運 1761~1815)

발문을 쓴 사람은 우어 거사(寓於居士) 김양지(金養之)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조영경(趙榮慶)인데 자가 안숙(安叔)이다.

조영경은 1802년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중양절을 맞이하여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 흥취와 견문을 시로

기록하고 당시 유명한 화가 이방운에게 그림을 의뢰한 것이다.

 

*사군은 산도 좋고 물도 좋기로 이름난 충청도의 네 고을로

경상도와 강원도의 접경에 위치한 단양, 청풍, 제천, 영춘을 말하며

오늘날의 제천과 단양에 해당한다.

조영경이 가 본 곳은 차례대로 도화동(桃花洞), 평등석(平等石),

금병산(錦屛山), 도담(島潭), 귀담(龜潭), 의림지(義林池),

그리고 마지막에 사인암(舍人巖)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뜻은 사군 지역의 선계와 같은 아름다운 풍광이다

 

@그림을 그린 이방운에 대해서는 미술사학계의 연구가 있고

.서화첩은 국민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2006년에 원래 그림 크기대로 도록을 발간하였다.

.김양지의 발문에 안숙으로 되어 있어 그동안 작가를 안숙이라 하였는데

최근 연구자에 의해 조영경으로 밝혀졌다.

.김양지의 경우도 양지가 자()로 보이고 조영경의 시를 쓴 사람이

조영경 자신인지 다른 여러 명의 서가인지

분명치 않고 시에 찍은 비점과 관주 등 아직 의문점이 많이 남아 있다.

 

@사인암

.명칭의 유래는 사인 벼슬을 지낸 역동(易東) 우탁(禹倬)이 노닐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인암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살았던 이윤영(李胤永)의 사인암 시에

책 벼랑 천 척 똑바로 서 있어,

온종일 바라보느라 저물녘 모래톱에 앉아있네라는 구절을 보면

옛사람도 책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이윤영은 사인암기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바위 아래의 돌은 또 평평하고 비스듬하다.

마루나 계단, 침석이나 안석과 같은 바위들이 높이와 기울기가

모두 저마다 알맞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8,90명 정도는 앉을 수 있다.

술동이와 안주, 필연을 마음대로 앞에 놓을 수 있고 계곡 물을 굽어보고

희롱을 하며 양치를 하거나 씻을 수 있다.

바위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가면 50여 보의 거리가 되는데

바위의 북쪽 뿌리가 물에 잠겨 있고 물이 깊어 배를 띄울 수 있다.”

 

@이윤영의 복거기(卜居記)에 나오는 내용과도 통하고 있어 흥미롭다.

좋은 경치 구경하러 우연히 왔는데 높다란 정자에 주인은 보이지 않네

무성한 숲에 가을 석양 내리고 고운 바위 결 객의 걸음 머무네

산의 모습 시 속에 담아보고 흐르는 물소리에 술도 깨네

갖춘 그 모습 아름다우니 세속의 마음 절로 멀어지네

 

@이 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첫 구절의 간죽(看竹)’은 동진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의 고사를 썼다.

평소 대를 좋아하던 왕휘지가 어떤 사대부 집에 아름다운 대나무가

있는 걸 보고 가마를 타고 들어가 휘파람을 불며

한참 즐기다가 나가려 하자 주인이 문을 닫아 못 가게 만류하며

같이 즐긴 뒤에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설신어에 예법에 얽매이지 않은 사례로 나온다.

.그러니 이 시에서는 사인암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

주변의 사소한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왔다는 뜻이 되고

결국 사인암이 유람객의 마음을 크게 끌었다는 말이다.

 

*‘높다란 정자에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사인암 절벽 틈에 정자를 짓고 산 이윤영이 이미 죽고

그의 흔적인 정자만 남아 있다는 말이다.

 

*초정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에

절벽을 기어올라 희미한 길 찾으니,

사면의 푸른 벼랑에 정자 더욱 좋구나라는 대목으로 보아

박제가는 이 정자를 본 것 같은데,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단양산수기에는

서벽정은 단릉(이윤영의 호)이 지은 것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유지만 바위틈에 남아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조영경이 보고 얼마 지나지않아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해 본다.

 

@귀담(龜潭)을 그린 그림에

원령(이인상의 호)의 바위 글씨와 윤지(이윤영의 자)의 시는

귀신도 아끼고 숨겨 돌 어르신에게 문의하네라는 한 구절이 있는데,

돌 어르신은 미불(米芾)이 돌을 높여 부른 말인데,

 

*돌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바위틈에서 이 두 사람의 글씨와 시를 찾아본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우리나라는 석각이 중국에 비해 아주 적은 편이지만

금강산의 글씨가 유명한데 못 가봤고

거창 수승대, 동해 무릉계곡, 가평 조종암, 포천 금수정 주변 등은

한번 가 볼 만한데,

이 사인암이 전서와 예서체의 글씨로 각인되어 있다.

 

@조영경이라는 인물은 노론의 거두인 조태채(趙泰采)의 손자로

그 후광을 입어 음직으로 관계에 나갔는데,

문헌 기록에는 지방 행정을 잘못하여 주로 탄핵을 받고

처벌당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사인암 시를 통해 일부 살펴보았듯이 이 화첩은 조영경이란

인물을 매우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화첩에 적힌 시들은 그림과 함께 당시 오지였지만

문화 명소로 자리한 사군강산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켜 줄듯하니,

조영경이 서문에서 쓴 바람이 이루어질것 같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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