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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사랑 조흥식

2024-1226, 도봉산 오봉코스

by 조흥식 2024. 12. 23.

2024-1226, 도봉산 오봉코스

병인양요를 되돌아보며

 

 

 

병인양요를 되돌아보며

@융서촬요서(戎書撮要序)

*주역(周易) 췌괘(萃卦)의 상전(象傳)군자가 이를 통하여 뜻밖의 사태에 경계한다.”라고 하였고

기제괘(旣濟卦)의 상전(象傳)근심을 생각하여 미리 방비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학산(鶴山) 위료옹(魏了翁, 1178~1237)*내가 어려서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문을 겹으로 설치하고 목탁을 치며 밤에 순찰을 하여 도적에 대비한다.’

좋은 활과 화살로 천하에 위엄을 보인다.’라는 구절을 보고,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민심이 쉽게 동요하니,

황제(皇帝)와 요순(堯舜)일지라도 일에 앞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구나.’라고

매번 탄식하였다.”**라고 한 적이 있으니, 이것이 무비(武備)를 창제(創制)한 이유이다.

 

말세에 내려와서는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모사(謀士)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맹장(猛將)은 비오듯 쏟아졌으며,

영진(營陣)의 제도와 기습과 정공의 방법이 날로 새롭고 달마다 무성해져서

그 서적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위학산(魏鶴山)은 남송(南宋)의 학자이자 문신인 위료옹(魏了翁, 1178~1237)으로

학산은 그의 호이고 자는 화보(華父),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영종(寧宗) 경원(慶元) 원년(1199)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이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겸 동첨서추밀원사(同僉書樞密院事)에 이르렀으며,

주자를 사숙하여 진덕수(眞德秀)와 함께 이학(理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학산집(鶴山集)  간주견사당기(簡州見思堂記)의 내용이다.

 

*우리 동방은 천하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북쪽 국경 한 지역만 육지로 이어졌는데 태행산(太行山)이나

검각(劍閣)보다 더욱 험준한 첩첩산중이다.

이런 까닭에 고려에서 가장 험준하며 사마(士馬)가 제일 정예롭다.

 

그러므로 당태종과 수양제가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였음에도

콩알만한 백암성(白巖城)과 안시성(安市城)을 함락시키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실로 임금이 정사를 정교(政敎)를 수행하고 무비(武備)에 태만하지 않는다면

천만년 동안 뽑히지 않을 기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왕조가 개창한 뒤로 근심스러운 점은 남쪽 왜놈들과 북쪽 오랑캐뿐이니,

임진년의 변고와 남한산성의 맹약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 이후로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고 문관(文官)들은 안일해지고 무관(武官)들은 게을러져

오늘날에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너무나도 경박하고 타락해졌다.

 

*, 저 서양 천주교가 나라 안에서 틈을 엿보아 몰래 불어난 지 거의 60여 년이다.

병인년(1866, 고종3) 가을 이양선이 한강에 출몰하고 이어서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변고가 있었으니,

경기 연안이 소란스러웠다. 다행히 이 왕의 위엄이 빛나 바다 전운(戰運)이 깨끗해졌으니,

좌해의 백성들이 어찌 기뻐 두 손 모아 축원하지 않았으리오.

그러나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변치 않는 모습이고,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것은 성지(聖智)의 일이다.

오늘날 백성을 위한 근심과 나라를 위한 계책에 대해 어찌 심모원려(深謀遠慮)도 없이

구차하고 우물쭈물하면서 비상사태에 대비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하늘이 만물을 낳음에 아무리 미미한 곤충 같은 부류일지라도

모두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 지려(智慮)가 매우 치밀하고 그 방비가 매우 엄중하다.

그러므로 날짐승은 몸을 굽혀 쪼아 먹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며,

들짐승은 깊은 곳에 살면서 간간히 나오니 이

는 다른 짐승들이 나를 해칠까 봐 두려워서이다.

벌과 전갈은 독침을 끼고서 지내고,

거북과 자라는 등껍질을 지고 살며,

소는 뿔로 적과 대치하고,

말은 뒷발질로 적을 차며,

물고기는 물고기로 몸을 감싸고,

새들은 발톱으로 적을 덮치며,

올빼미와 수리는 틈새를 틀어막는 계책을 하고,

여우와 토끼는 다른 굴을 파는 계책을 하니,

이는 모두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며

각기 그 외적을 막고 제압하는 술책이다. 어찌 우리 사람들이 저 미물들보다 못하겠는가.

 

*서양 선박이 강화도에 이르렀을 때 장수가 된 자는 성을 버리고 숨었고

군민(軍民)들도 분위기를 바라보고 달아났으니,

서울의 남녀들이 일정한 방향 없이 모두 물고기처럼 놀라고 짐승처럼 달아나 숨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평소 원래 일찍부터 강구된 방비책이 없었고

미리 갖추어 둔 무기들이 없어서였다.

이때 마침 우리 막내가 과분하게도 중임을 맡아 행진하는 사이에 종사하였는데,

군무(軍務)가 해이해진 점에 대해 삼가 개탄스럽게 여긴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원융이 있는 자리훈련대장 신관호】【나중에 신헌으로 개명에서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 계책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흥미진진하여 관두지 못할 정도였다.

원융이 소장하고 있는 무지(武志) 1()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무경총요(武經總要), 등단필구(登壇必究), 병벽백금방(洴澼百金方), 호검경(虎鈐經) 등에 이르렀고

해국도지(海國圖志)의 경우는 한 번 열람하고 기억하도록 하였으니,

원융께서 우리 막내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참으로 적지 않았다.

 

*병서의 내용이 광범위하여 다 외울 수 없어서

대체로 장수로 삼는 방도,

진을 경영하는 방법,

기습과 정공의 술책,

무기의 제련에 관련된 부분에서 오늘날 시행할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을 대략 뽑아서

1()으로 모으니 모두 약간 편이었다.

근간에 나에게 보여주면서 서문(序文)을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내가 어찌 병법의 정묘한 뜻을 다 알아서 말을 주워 모아 그 뜻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개 그 귀추를 상상해 보면, 뜻밖의 환란을 미리 대비하는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는 원융이 우리 막내를 깊이 생각하여 보물처럼 소장하고 있던 전서(全書)를 꺼내 보여준 이유이다.

 

*우리 막내가 원융의 뜻을 받들어 요점을 모아 책을 만든 것은

모두 주역의 은미한 뜻을 깊이 터득하여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이 완성된다면 어찌 국가의 다행이 되지 않겠으며,

또한 어찌 백성들에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도검(韜鈐 병서(兵書))에 뜻을 둔 자들 또한 아마 여기에서 방법을 취할 것이다.

삼가 덧붙여, 예전에 내 견해로 모은 내용들도 분류(分類)한 아래에 대략 기록하였으니,

보는 자들은 알아두라.

성상 즉위 4년 정묘년 겨울에, 갈봉노초(葛峰老樵)가 서문을 쓰노라.

 

*병인양요는 조선에서 세 번째로 일어난 외침(外侵)이며,

서양의 무력을 처음으로 접한 전투였다.

무엇보다 병인양요는 서양 군대가 곧장 서울을 점령할 수 있음을 알려준 전투였다.

기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는 적군이 육로를 통하여 수도 서울을 함락하는 형태의 전쟁이었으므로

임금이 몽진(蒙塵)할 수 없게 될 위험성이 왜란과 호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병인양요 이듬해인 1867년 정월 좌참찬 신헌은 서울의 군병을 편성하여 훈련시키고[京兵團操],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포수를 선발하도록 장려하고[獎選鄕砲],

민보를 쌓도록 권장하고[勸設民堡],

북쪽 변경에 군사제도를 정비하고[北沿制兵],

내정을 잘 닦고[篤修內政],

서양 오랑캐의 변란을 살펴 헤아려야 한다[審料夷變]6개 항의 군사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의 민보의(民堡議)에 기반을 두어 민보집설(民堡輯說)을 편찬하였다.

 

*또한 양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는 병서(兵書)도 필요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편찬된 책이 바로 융서촬요(戎書撮要)이다.

융서촬요는 병인양요, 그리고 신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이 편찬된 시기는 병인양요 직후인 1867년이고,

신헌 막하의 장수로 추정되는 이가 그의 지원을 받아 신헌 집안에 소장된 중국 병서들 중에

조선의 실정에 적합한 내용을 발췌 정리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헌의 민보집설에 수록하지 못한

향토병 육성, 산성 운영과 전차를 활용한 유격전, 서양 함선과의 전투 양상을 보탠 병서였다.

이는 종래 병서들의 편찬 목적이 관병 훈련에 중점을 맞췄던 것과 가장 크게 변별되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부분은 총기 부분에서 동모(銅冒),

즉 서양 총의 퍼커션 캡(Percussion Cap)을 도입하여 자체 제작하려고 한 점이다.

퍼커션 캡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화승총에서 화약 접시와 심지 부분이 탄피와 뇌관 구조로 대체된 형태이다.

조선에서는 아직까지 화승총을 사용하였는데*

이와 비교하면 날씨의 제약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는 시점과

실제로 총이 격발되는 시점 사이의 간극이 거의 사라지게 되므로 연사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

 

*조선에서는 1631(인조9)에 서포(西砲)라는 이름의 수발식(燧發式),

플린트 락(flint lock)의 총을 입수하였고 이후 제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두 가지 난점이 있었으니 제조 비용이 조총보다 세 배나 비싼데다가

서양 부싯돌에 비해 동아시아 부싯돌은 강한 타격을 주어야 불이 붙어 운용 자체가 어려웠다.

또한 17세기 중반 이후 안정기인 동아시아 정세 속에 이미 대량으로

운용 중인 화승식 조총을 수석식 총으로 대체할 필요성도 낮아졌다.

(세종대왕유적관리소, 하멜특별전-효종과 하멜 이야기,

세종대왕유적관리소, 2021, 28-29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 두 번째 이야기, 국립진주박물관, 2023, 82.)

 

*융서촬요에서 동모제를 수록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그 의미가 크다.

조선에서는 개항 이후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의 화기를 수입하였는데,

1880(고종17)이 되어서야 동모제 총기를 청나라를 통해 수입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유원(李裕元)이 청()의 유지개(游智開)에게 보낸 편지에,

역관 이용숙(李容肅)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첨부하였다.

거기에는 이용숙이 영평 지부 유지개를 만났다는 언급과 화륜선(火輪船) 구입에 30만 금이 들고

양화약(洋火藥), 동모약(銅帽藥)은 천진국(天津局)에서만 제조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유지개는 1872~1880년까지 영평 지부를 지냈으므로,

이를 승정원일기에서 이용숙이 역관으로 청나라에 들어간 해와 비교 고찰하면,

1880년 이후 보낸 편지로 보인다.*

이후에도 동모제 총기 도입은 난항을 겪는다.

유학 강기형(姜基馨)은 동모창(銅冒鎗)을 청나라에서 사오는 것보다

성능은 나쁘더라도 조선에서 화약과 조총을 더 많이 생산하면 될 일이라고 상소하였다.**

이는 국비 절감을 위한 발언이지만 그 성능 차이를 모르는 문사의 물정 모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동모제 총기의 정식 구매는 1883(고종20)이 되어서야 이루어진다.

*** 융서촬요에서 언급한 지 거의 17년이 되어서야 동모에 대해 인식이 바뀐 것이다.

융서촬요의 편찬자는 실무자로서 조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책이 신헌을 통해 집정자의 허락을 받았으면

조선이 강대국에 힘없이 종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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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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