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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사랑 조흥식

2025-0501, 양주 불곡산(14)

by 조흥식 2025. 5. 1.

 

2025-0501, 양주 불곡산(14)

 제목: 꿈틀꿈틀 구불구불, 원교 이광사의 힐곡완전(詰曲宛轉)한 필획(1)

 

 

  제목: 꿈틀꿈틀 구불구불 원교 이광사의 힐곡완전(詰曲宛轉)한 필획(1)

  *이광사(李匡師, 1705: 숙종31 ~ 1777: 정조1)는 원교(圓嶠)라는 호로 널리 알려졌.

   이 호는 그가 살던 곳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33세 되던 1737년부터 원교산(圓嶠山) 아래로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다.

  원교둥그재의 한문식 표현으로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ㆍ냉천동ㆍ충현동 일대에 걸쳐있는 야트막한 산을 가리킨다.

   안산의 남쪽 줄기로서 금화산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 이광사는 부근에 살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 ~ 1770)와 깊이 교유했다.

   김광수는 증조부인 김우석(金禹錫)과 아버지 김동필(金東弼)이 모두 동지사(冬至使)

   북경을 다녀온 바 있는 세가(世家)의 후예로서,

   잠시 지방관을 지냈던 것을 제외하곤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골동, 서화 수집과 감상에 몰두하며 생을 보냈다.

 

  *이 두 사람이 동호(同好)의 교분을 나누던 정경은,

   1743년 여름에 이광사가 지은 내도재기(來道齋記)

    (한국문집총간 221 원교집선(圓嶠集選) 8 수록)라는 글에 자세하다.

   ‘내도재라는 명칭이 곧 도보(道甫, 이광사의 자)를 초청하여 오게 하는 서재란 뜻이다.

   김광수는 이곳에 종정(鐘鼎) 고비(古碑)와 기이한 서책을 쌓아놓고 틈만 나면 이광사를 불렀다.

   그곳에서 이광사는 김광수가 마련해 둔 중국산 지필연묵(紙筆硯墨)으로

   주나라 석고(石鼓)나 한나라의 비갈(碑碣) 등의 옛 글씨를 내키는 대로 모사하곤 하였다.

   옆에는 김광수가 손수 피워올린 향이 타고 있었고,

   이름난 차와 좋은 술도 구비되어 있었다.

   이 둘은 날이 저물도록, 때론 며칠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자마자 또 생각나 다시 불러오기도 했다.

 

 *이광사는 말한다.

   “성중(成仲, 김광수의 자)은 세상에 달리 벗이 없고 오직 나 한 사람과 친하다.

   나 역시 친구가 없고 오로지 성중과 친할 뿐이다.

   사람들이 서로 친한 까닭은 추구하는 바와 취미가 들어맞는 대로 모이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 둘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인데도 유독 친하니 이는 실로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다.

   이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성중에게 물어보니 성중도 그 까닭을 몰랐다.

   성중이 나에게 되물었지만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나와 성중이 알지 못하니, 세상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나와 성중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아마도 그 밑바탕에 깊이 일치하여 바래지 않는 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아한 옛 기물을 매개로 맑은 사귐을 나눈 두 사람의 인연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김광수의 생광명(生壙銘)을 들 수 있다.

   생광명은 살아 있을 때 스스로 지은 묘지명이다.

   김광수는 이 묘지명의 글씨를 이광사에게 부탁했다.

   이광사는 유명조선 상고자 김광수 생광(有明朝鮮尙古子金光遂生壙)’ 12자의 제목을

   전통적인 이양빙(李陽氷) 풍이되 다소 굴곡진 획의 맛이 살아있는 전서(篆書)로 쓴 후,

   28196자 칠언시로 구성된 묘지명 본문은 행서의 맛이 살짝 깃든 단정하고도 정성스런 해서로 썼다.

   연기(年紀)가 없어 언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황상 대체로 이 두 사람이 한창 교유하던 시기인 원교의 30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수집가와 서예가로 이름높던 두 명인의 신교(神交)가 어려 있는 아름다운 글씨다.

 

 김광수 찬, 이광사 필, 김광수 자찬묘지명탁본첩 중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청구기호: 10285)

 

 ▲〈김광수 자찬묘지명탁본첩 중에서

 

 

  *현재 쓰이는 대표자에 의한 표기는 圓嶠이나, 원교는 자신의 호를 주로 員嶠라고 썼다.

   ‘은 같은 의미이지만, 쪽이 세발솥의 둥근 운두를 가리키는 원의에 더 가깝다.

   옛 기명(器皿)의 옛 글씨에 관심이 컸던 이광사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어법이다.

   그런데 ‘원교’는 멀리 동쪽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하는 신화 속의 다섯 산인

   대여(垈輿), 원교, 방호(方壺), 영주(瀛州), 봉래(蓬萊) 중 하나의 이름이기도 하다.

   먼바다에 있는 섬 형태의 이상향은, 보통 다른 버전인

    방장(方丈), 영주, 봉래의 ‘삼신산(三神山)’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열자(列子) 탕문(湯問) 편에 등장하는 ‘오산(五山)’ 또한

   이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 중 하나이기에 그 의의가 작지 않다.

   열자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산들은 높이와 둘레가 3만 리,

   꼭대기의 평평한 곳이 9천 리이며,

   서로 떨어진 거리가 7만 리인데,

   그 위에는 금옥(金玉)의 집,

   순백의 조수(鳥獸),

   불로장생의 열매를 맺는 보옥(寶玉)의 나무가 있고

   신선과 성인(聖人)이 살고 있다고 한다.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하지만 동시에 동경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하다.

   둥그재 아래 내도재의 장서 중엔 과연 열자도 있었을까?

   맑은 친구 상고자와 더불어 바다 위 원교의 신선 부럽지 않은 청아한 취미를 즐기던 원교는,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이 돌아올 수 없는 먼 남해의 섬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되리란 사실을 상상이나 했을까?

 

  *50세 이후 이광사의 삶은 급전직하했다.

   소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그는 51세 때였던 1755년(영조 31, 을해년)에

   나주괘서사건으로 촉발된 을해옥사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괘서사건의 주모자 윤지(尹志)의 아들인 윤광철(尹光哲)과 편지를 주고받은 죄로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이배되었다.

   옥사의 와중 이광사가 사사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자결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1762년에는 부령에서 글과 글씨를 가르치며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진도(珍島)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신지도(薪智島)로 옮겨졌다.

   신지도는 깨끗하고 흰 모래사장이 끝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펼쳐진 명사십리 해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떠들썩한 여름 한철을 제외하면 비교적 고즈넉한 섬이다.

   지금은 완도와 고금도로 연륙교가 이어져 자동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지만,

   과거엔 육지에서 격절된 절해고도였다.

   명사십리에서 약간 들어간 금곡마을의 마을회관 근처에

  이광사가 유배 생활을 보낸 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신지도 원교 이광사 유배지. 전남 완도군 신지면 대곡70번길 33)

   그는 결국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1777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지도 이광사 적거지 전경.

   아래 가로로 길게 자리잡은 집이 이광사가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사진은 복원되기 전의 모습으로서, 상공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찍은 것이다.

   (드론 촬영: 류인태. 2017)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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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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