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장동우회(2014-2015)

2015-0120.회장단회 월례회

by 조흥식 2023. 3. 5.

2015-0120.회장단회 월례회(지구본부)

  *孫李是非(경주 양동마을)

 

 

 

孫李是非(경주 양동마을)

@경주 양동마을은 동성촌락지(당나라 주진촌과 비슷한 형태)

500년간 월성손씨(경주손씨), 여주이씨(여강이씨)의 인척 집성촌이다

 

@손소(입향조, 월성손씨)는 양동마을에 처가에 정착을 시작하게된다

이후 월송손씨가 양동마을의 명문가문이로 급성장을 하는데,

손소의 아들이 공신, 고관직을 거치며 영남지역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손중돈(손소의 아들)은 성종~연산군~중종시대 중앙(지방) 무대에서

고위관직에 진출하면서 가문이 승승장구한다

손중돈은 청백리로써 사망한뒤 정계진출이 적어지고 경주 양동지방에서

향촌세력 구축에 주력한다

손소의 외손자가 동방5현 회재 이언적(성리학의 5대 대가)이다

 

@여강이씨(여주이씨)는 손소(월성손씨)를 사위로 맞이한다

회재 이언적(옥산서원)의 탁월한 업적으로 종묘 문묘에 배향되었다

양대 가문의 논쟁, 시비의 발단이 시작되었는데...

손중돈(외삼촌)이 조카(회재 이언적)에게 학문적 영향을 미쳤느냐?”

 

@이언적 종택(여강이씨)15C 중반부터 정착한 가문이었다

집의 당호는 無忝堂(무첨당)” 이언적의 맏손자(이윤호) 호에서 인용했다

동쪽방(대청) 현편 左海琴書(좌해금서)”는 흥선대원군의 직접 방문하여

남긴 친필이며, 향촌 지배권을 주도했던 가문이었다

 

@1905년부터 손이시비가 시작되는데...

1773(영조49), 손중돈을 배향하는 동강서원의 상량문은

이상정의 필체이나 이미 여러차례 내용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언적이 손중돈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월성손씨는 여강이씨 가문의 강력한 항의와 여론압박에 굴복하여

당일 상량문을 본가로 철수시킨바 있다

 

@1845(헌종11), 손씨가문에서 우재실기증보를 간행하였다

이상정이 쓴 상량문을 삽입하는 문제로 또다시 논란이 일어난다

유림들의 여론 압박과 부당성을 알리는 공격으로

손씨가문의 의중대로 추진할수 없었던 것은 사회적인 위상이 이씨가문이

워낚 높았기 때문이다

 

@1905, 손중돈의 경절공실기를 중간하면서 손이시비가 본격화된다

손씨 문중에서 서책을 발간시(4), 여주이씨 종가(무첨당)에 소장되어있는 여강세고에서

회재 이언적이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손중돈의 家狀(가장)輓詞(만사)

삽입하고 거기에 이언적의 이름을 써 넣은 것이다

이상정이 쓴 상량문(“이언적이 손중돈의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구절)

주석을 달아 손중돈과 이언적 사이에 학문적 연계가 사실인것처럼 기록한게 문제의 발단이 재발된 것이다

 

@또한, 퇴계후손(진성이씨) 하계파의 이만도, 이병호, 이만규로부터

이언적의 학문이 손중돈에 연원을 두고있다는 서문, 발문이 문제였다

이만도의 발문(참고)”

퇴계가 이언적의 행장을 지으면서 회재가 평소 따로 학문을 배운일이

없다고 서술했는데, 이것은 이언적이 집필했다고 주장하는

손중돈의 행장과 만사를 보지못했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진성이씨 하계파가 손씨문중의 편을 들어주는 글을 써준 이유는

여강이씨가 병호시비에서 자신들의 편인 호계파가 아닌 반대편(병산파)

지지했던 것에 대하여 서운했던 감정과 앙갚음의 의도가 깔려있었다

손씨가문에서는 이러한 내막을 알고서 진성이씨(하계파)에게 의도적으로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경절공실기가 배포되자, 예상대로 여강이씨의 강력한 반발이 일었다

이씨문중은 양동서당에 즉각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주변 유림들이 중재를 하였으나 이씨문중은 일체 거부하였다

오이려 통문을 내어 이씨문중을 압박을 강화시킨 것이다

 

@손씨문중은 퇴계가 쓴 이언적의 행장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자신의 후학이다라고 썼지만,

그것은 이씨문중에서 근거없이 함부로 인용하여 쓴것이라며 반박하였다

회재집은 잘못 집필되었으므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반박하여 이씨문중에서 경절공실기의 문제점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손씨문중에서 회재의 학문적 연원이 손중돈에게 있다는 증거로 제시한

이상정의 상량문은 그 잘못을 지적받고서 즉시 되돌렸는데도,

손씨문중은 이를 다시 책에 수록했다는 것이다

회재가 직접 집필했다고 주장하는 손중돈의 가장과 만사가

회재의 手本(수본)이라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언적의 이름을 함부로 삽입한 것은 불경한 짓이다라고 항의한다

퇴계가 회재의 후학이다라고 쓴 사실임을 알고도

이를 부정함은 선현을 모독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조가 회재의 제문에 회재가 따로 배운곳이 없어 바로 성리학을 창시한

중국의 학자들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이씨문중은 회재의 학문적 연원이 손중돈이라는 경절공실기의 내용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한다

이씨가문의 주장 洛濱壇所(낙빈단소)”會中의 통문을 돌린다

 

@이씨문중은 설득력을 얻으면서 여론이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씨를 지지하는 유림은 경절공실기의 간행에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을

世德祠(세덕사)에 걸어놓고 책벌하면서 유림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영구히 삭제하고 실기는 사사로이 간행한 책자이므로 모두 환송하고,

그 책판을 깨트려야 한다고 통문을 돌리게 된다

 

@손이시비는 영남지방, 한양 태학, 호서유생, 기호지방, 호남도회소까지

계속 번져나가자, 이씨들은 합세하여 손씨문중을 강력히 성토하고 나섰다

전국적으로 여론이 손씨문중에서 불리하게되자,

최초 손씨를 지지했던 유림들 일부는 이씨편으로 전향하기도 하였다

반촌, 향촌지역에서는 가문을 위한 시비가 있어야 위상이 격상되고

명문가문, 양반행세를 할 수 있는 자랑거리라고 생각하였다

서책을 발간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문자시비가 대표적인 경우로 볼수있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