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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동우회(2014-2015)

2015-0110.회장단회 겨울야유회

by 조흥식 2023. 3. 5.

2015-0110.회장단회 겨울야유회(산정호수, 이동폭포갈비)

  *삼일제(三日製) 답안 용지

 

 

삼일제(三日製) 답안 용지

@승정원일기(정조91785)

*승지 서용보(徐龍輔)가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내일 삼일제의 답안 용지로 대호지(大好紙)를 쓰라고 명하셨습니다.

방금 지전(紙廛)의 시민(市民)들이 호소한 내용을 보니

대호지는 본래 시전에 있는 물품이 아니어서 대호지를 쓰라는

명이 내리고 나면 매번 호조에서 이 일을 위해 파는 것을 청해서

얻어 수요에 대왔는데,

현재 호조의 재고가 20권뿐이라서 실로 팔 길이 없습니다.

전에 절일제(節日製) 때 백면지(白綿紙)를 쓴 예도 많으니

호조의 오래 묵은 백면지 중에서 100권까지만 전례대로 팔도록 하고

그 나머지 부족한 수량은 본 지전에서 담당했으면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번 삼일제에 대호지를 쓰라고 명하신 것은 실로 지방 유생들에게

비용을 줄여 주고 시민들에게 폐해를 없애 주려는 덕스러운 뜻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호지는 위와 같이 변통할 길이 없는 형편이고,

백면지는 근거할 만한 여러 전례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호조와 지전에서도 변통해 볼 방도가 있습니다.

가격도 대호지보다 거의 3분의 2로 줄어드니,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더욱이 편리하고 마땅합니다.

내일 답안용지를 백면지로 쓰도록 하고, 호조의 오래 묵은 백면지중에서

100권까지만 특별히 골라 시민들에게 팔도록 일체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초기(草記)의 내용대로 시행하라고 즉시 호조에 분부하라.

지방 유생의 능력으로는 대호지든 백면지든 법식대로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일 듯하다.

당일의 삼일제 답안 용지를 백면지나 장지(壯紙) 중에서

종이 품질에 구애받지 말고 능력이 닿는 대로 마련해서

바치도록 할 일을 성균관과 한성부도 잘 알게 하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

3월이 되면 삼짇날을 즈음하여 성균관 유생에게

정기 제술시험인 삼일제를 보였으니,

17[人日], 77[七夕], 99[重陽]의 제술 시험과 함께

절일제라고 하였다.

위 기록은 정조 939일로 예정된 삼일제를 하루 앞두고

답안 용지 마련과 관련하여 비변사가 아뢰고 정조가 전교한 내용이다.

 

@절일제는 의정부, 육조, 성균관 당상 등이 성균관에 가서

평소의 출석 기준 점수를 채운 생원과 진사에게 시험 보이고

그 결과를 왕에게 아뢰는 것이 일반적인 규례였으나,

영조 이후로는 때로 절일의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왕이 특명을 내려 지방 유생에게까지 참가 자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대제학과 승지가 왕이 낸 시험 문제를 가지고

성균관으로 가서 시험 보인 뒤 대궐로 와서 성적을 매겼다.

 

@우수한 자에게는 왕의 하교에 따라 전시(殿試)나 회시(會試)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기도 하고 소정의 점수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문과의 2차 시험인 회시나 급제 등수만 정하는 3차 최종 시험인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는 것은 문과를 단계적으로

다 거치지 않고도 급제자로서 관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이때도 그런 특명을 내렸는데, 311일의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러

지방 유생이 대거 상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삼일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답안 용지를 가격이

저렴한 종류로 지정하였으니,

용지를 나라에서 공급받는 성균관 유생과 달리

이들은 자비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 정해진 용지인 정초지(正草紙)는 도련초주지(搗鍊草注紙)

추측되는데 순조 초의 가격이 201권에 쌀 40말이었으니,

두 장만 해도 쌀 4말이 들었다.

반면 대호지는 1권에 15말이었으니 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중국에 보내는 세폐 물품 등으로 호조에서 다뤄 늘 비축분이 있었기에

이런 조처가 내릴 적이면 지전을 통해 물량이 공급되었다.

그런데 이때는 비축분도 바닥나게 되자,

방물 등으로 다뤄지던 백면지의 활용을 지전에서 청한 것이다.

백면지는 1권에 5~7말로 대호지 가격의 반도 안 되었다.

물론 지전이나 호조로서는 오래 묵힌 백면지의 판매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속내도 있었겠지만,

정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청하였을 것이다.

이에 정조는 한 발 더 나아가 백면지는 물론이고

이와 가격이 비슷하거나 약간 저렴한 장지까지도 허용해 주었다.

 

@이렇게 실시된 삼일제에서 수석은

지방의 유학(幼學) 권일성(權一惺)이 차지하고

2등 그룹에야 성균관 생원과 진사들이 끼는가 하면

3~4등 그룹에 또 유학들이 대거 포함되었으니,

정조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는 결과였다.

애석하게 수석한 권일성은 급제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던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전후로 이런 방식의 절일제를 통해 급제하고

관직으로 나간 지방 유생은 상당히 많았으니,

관원으로 진출할 또 하나의 길로 자리잡은 성균관의 정기 제술시험이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정규 과거시험이 온갖 폐단으로 물들었던 조선 후기,

당색(黨色)이나 집안 배경 등을 떠나 학문과 능력을 겸비한 인재를

널리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이들을 관원으로 선발하여

나라를 잘 다스려 보고자 한 것이 영조나 정조의 본뜻이었고,

정조는 이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는 창의적인 능력과 열정을 품은 숨은 인재들이 집안의 재력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나라의 미래를 위해 날개를 활짝 펴고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와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오늘날에도 눈여겨봐야 할 유효한 교훈이 아닐까 싶어 소개해 보았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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