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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동우회(2014-2015)

2015-0314.회장단회 산악회 2015년도 시산제

by 조흥식 2023. 3. 6.

2015-0314.회장단회 산악회 2015년도 시산제(북한산 삼천사계곡)

*뒷풀이 후원: 불광역 황소곱창집(뉴은평LC 이둘임회장)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이항복과 이덕형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 “한원부원군 이덕형 묘지(墓誌)”

며칠이 지나 그(한음 이덕형)의 고자(孤子) 여벽(如璧)

초췌한 모습으로 참최(斬衰)를 입고 장사를 지내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곡을 하고 상장(喪杖)을 내려놓으며 절을 한 다음에

가장(家狀)을 나에게 올리며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이 늙은이의 마음은 친구 이모(李某)가 잘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불행히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교유한 분들 가운데 문학으로 이름이 있는 분은

오직 대부(大夫)뿐이십니다.

이에 감히 아버지의 묘지문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내(이항복)가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옛날에 사마후(司馬侯)가 죽자 숙향(叔向)

그의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내가 함께 임금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내가 그것을 마무리 짓고,

내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너의 아버지가 그것을 마무리 지었다.

진나라는 국정을 여기에 의지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내가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너의 아버지보다 나이로 따지면 조금 위이지만,

덕으로 말하자면 내가 한참 뒤처졌다.

태평 시절에는 차례로 과거에 급제했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번갈아가며 군대를 관장했으며,

만년에 무능한 재상으로 있을때는 형제처럼 막역하여 끝까지 함께 마쳤으니,

평생 벼슬한 자취가 대략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나를 알아준 사람은 그대의 아버지였고,

그대의 아버지를 사모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 젊을 때에는 삼밭의 삼대에 의지하는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천리마의 꼬리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

어찌 그대의 아버지를 위해 즐겁게 묘지문을 쓰지 않을쏜가.”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 기도에 반대해 영의정 관직을 삭탈당한

한음 이덕형(1561~1613)이 양주의 별서로 내려간 것은 16138월이다.

그러나 분노와 상심이 가득한 한음은 병으로 고생하다

와병 한 달여 만에 서거했다.

그해 109일이었다.

한음에 앞서 조정의 탄핵을 받아 경기 노원(지금 서울 노원)에서

야인으로 살던 백사 이항복은 친구의 부음 소식에 댓바람으로 달려갔다.

북한강변에 있는 한음의 별서에는 조문객들로 북적댔다.

주민, 관청서리, 장사치는 물론 어린이, 늙은이까지 조문에 나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백사는 한음의 대렴(大斂: 입관식)을 치르고 다시 노원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음의 아들 이여벽이 백사가 있는 노원을 찾았다.

여벽은 아버지의 가계와 일대기를 적은 행장과 함께 생전에 아버지가

들려줬던 말을 전하며 백사에게 묘지명을 부탁한다.

한음과 백사는 30년 지기이다.

백사 이항복이 어찌 먼저 간 친구의 아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써내려간 게 백사집3권에 실려 있다

백사와 한음은 어려서부터 우정을 쌓아온 죽마고우로 알려져 왔다.

오성과 한음으로 더 유명한 두 사람의 우정은 만화, 동화, 소설로

각색되면서 개구쟁이 우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백사와 한음은 죽마고우가 아니다.

두 사람의 어릴 적 일화는 훗날 꾸며낸 것이다.

백사의 제자 박미의 백사선생 연보에 따르면 백사와 한음이

처음 만난 것은 둘의 나이가 각각 23, 18세 때라고 한다.

실제 백사집이나 한음유고에 이보다 앞서 두 사람이 교제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백사, 한음은 1580년 알성시 문과에 나란히 급제하면서 가까워졌다.

관직에서도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정을 쌓아 갔다.

임진왜란 때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명나라로부터 원병을 받아 냈다.

백사는 이덕형의 아들에게 준 이덕형 묘지에서 둘의 우정을

나를 알아준 사람은 그대의 아버지였고,

그대의 아버지를 사모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知我者君 慕君者我]”

말로 요약했다.

백사와 한음의 우정은 두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욱 빛이 났다.

1604년 영의정 한음 이덕형이 임해군의 살인 교사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선조의 비위를 건드려 파직됐다.

후임으로 백사가 임명됐는데,

백사는 파직된 한음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다며 극력 사양했다.

백사의 상소문에서 알 수 있다

이덕형은 곧 이미 말을 한 신(: 이항복 자신을 말함)이요,

신은 곧 미처 말하지 못한 이덕형일 뿐이니,

죄는 아무리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차마 심정을 숨길 수 없다라고 하여,

한음을 변호하며 두 사람이 일심동체임을 강조했다.

백사는 8번의 상소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백사가 상소문에서 피력했던

덕형은 이미 말을 한 신이요, 신은 미처 말하지 못한 덕형이라는 말은

뒷날 사대부들 사이에서 강한 우정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인용되었다.

예컨대 영조 때 학자 미호 김원행은 친구 송명흠이 견책을 받아 파직되자

이항복의 위 구절을 들어 자신은 우정에 금이 가게 하는 관직에는

나아갈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옛말에 친구를 일컬어 2의 나[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주선인(周旋人)’이라 하기도 했다.

나를 대신해 어려운 일에 나서서 주선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백사,한음은 친구가 어려움이 처하면 앞서 나가서 어려움을 대신 받았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맺어온 오랜 관계에서 나온 게 아니다.

바로 덕으로 쌓은 우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맹자는 이를 두고 친구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으로 사귀는 게 최고의 우정이다라고 했다.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즉 오성과 한음의 우정은 그런 것이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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