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2.뉴성북라이온스클럽 한진구회장 칠순잔치(정릉 아리랑고개)
가난과 文人
가난과 文人
베스트셀러 시집을 냈던 유명 여류시인이 최근 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해서 큰 얘깃거리가 됐다
근로장려금이란?
연 소득이 1,300만 원 미만인 무주택자에게 정부가 주는 생활보조금이다.
글품을 파는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우울했을 것이다.
마침 소설가 한강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 부커상’을 받은 시점이라 묘한 대비가 됐다.
몇 해 전에도 여류 작가가 가난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세대주택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글을 쓰던 시나리오 작가는 췌장염 등을 앓고 있었지만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작가는 이웃집 현관에 이런 쪽지 글을 남겼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슬픈 글은 없을 것이다.
새해를 맞아서 이웃집 사람은 며칠 집을 비워 그 쪽지를 보지 못했고, 32세의 작가는 숨졌다.
이 땅에서 글만 쓰며 살아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누구나 한번쯤은 시인과 작가를 꿈꾸지만 글은 밥이 될 수 없음이 엄혹한 현실이다.
우리나라 문인 중에서 원고료를 받아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은
백에 한 명, 아니 천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
글쟁이들 형편이 곤궁한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도 글쟁이들은 가난했다.
글이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서민들도 글을 읽고 지었다.
그리고 글쟁이들이 나타나 소위 여항(閭巷)문학이란 것을 형성했다.
여항이란 서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일컬었다.
여항문학이란 사대부의 양반문학과는 대비되는 중인 중심의 문학이었다.
중인 외에도 상인, 서얼, 승려들까지 자신의 글 솜씨를 뽐냈다.
여항문학은 18, 19세기에 성했고 개화기까지 이어졌다
나름 문리를 터득했지만 신분 제약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무리가 글 속에 학식과 재능을 쏟아부었다.
자연 그들의 글은 소재가 다양했고, 풍자 또한 날카로웠다.
신춘문예, 추천제 같은 등단 제도는 없었지만 문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 지금의 편찬위원회 같은 모임이 있어 당대 문인들의 글을 엄선하여 책을 만들었다.
소대풍요(昭代風謠),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 등이 있다.
그중 풍요속선에 이런 발문이 있다
“이 풍요속선에 이름이 나란히 열거된 사람이 삼백여 명이나 되고
시가 칠백여 수가 되지만,
불우함을 슬퍼하고 의식을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삼분의 이가 되니,
선비가 글을 잘하면 곤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처지가 곤궁한 뒤라야 글을 잘하게 되는 것인가?”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이로 미루어 시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도 문인으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부터 글 읽는 사람은 가난했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가난하면 정신이 맑았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붓은 거리낌이 없었다.
물질이 풍부하면 영혼에 살이 올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
한때는 전도가 유망했던 문인이 재물을 탐한 후 문재(文才)를 잃어버린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봤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 또한 중요했다.
글은 이상이었지만 먹고 입고 자는 것은 현실이었다.
돌아보면 근·현대사의 천재 문인들도 가난으로 스러져갔다.
작가 김유정은 동백꽃, 봄봄 같은 단편을 남기고 스물아홉에 세상을 떴다.
사람들은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홀연 무지개처럼 사라져 갔다며 그의 요절을 아쉬워했다.
춘천시 외곽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은 그의 고단한 삶을 띄엄띄엄 전시해 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가난’이 눈에 들어온다.
말년엔 폐결핵이 그의 심신을 파괴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필승아, 나는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삼십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살아날 것 같다. 돈 돈, 슬픈 일이다.”
김유정은 돈 백 원만 있으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닭 국물을 입속에 흘려 넣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처럼 자상했던 작가 박완서 선생도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당부를 했다.
“문인들은 가난하니 부의금을 받지 말라.”
은유적이면서도 향기로운 언어로 자신의 최후를 장식할 수도 있었겠지만 선생은 문인들의 가난을 걱정했다.
사실 문인들은 거의가 가난이 뼛속까지 번져 있다.
문인들의 술자리가 유독 긴 것은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기실 선뜻 누군가 술값을 치르지 못하기 때문임을 선생은 아셨다.
예나 지금이나 문인은 가난하다.
글로는 세상을 뒤흔들어도 이내 현실에서는 살아갈 ‘주변머리가 없기에’ 생존의 대열에서 뒤처졌다
글이란 독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문명(文名)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글만을 팔아서는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 제대로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글쟁이란 자부심으로 가난을 내쫓아보지만 생활의 궁핍함은 엄연한 고통이다.
김유정이 “돈 돈, 슬픈 일이다”라며 피를 토한 지 어림 8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문학은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며 절규하고 있다
가난이 문인의 숙명이라면 물론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풍요속선의 발문을 쓴 어산 정이조(丁彛祚)의 글 속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다.
선비란 무릇 가난한 법이니, 가난이 곁에 있음을 근심하지 말라고 이른다
“선비가 글을 잘하면 곤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처지가 곤궁한 뒤라야 글을 잘하게 되는 것인가?
(豈士能文則困窮耶? 抑窮而後工也?)”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회장동우회(2014-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1024.회장동우회 워크숍 2일차 (0) | 2023.03.29 |
---|---|
2015-1023.회장동우회 워크숍 1일차 (0) | 2023.03.29 |
2015-1017 회장동우회 10월 정기산행 (0) | 2023.03.29 |
2015-1012.회장동우회 이사회 (1) | 2023.03.29 |
2015-1006.회장동우회 번개모임 (0) | 2023.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