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2.회장동우회 이사회(청담동 생생일품두부)
광희문을 나서며
광희문을 나서며
@조선시대의 시가들 가운데 광희문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단 한 편도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작품 중에서는 그렇다.
제목은 커녕 내용 가운데 광희문이 등장하는 것도 아주 드물게 몇 편이 있을 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리 없다.
그 시대의 사람들, 특히 시인의 지위를 거의 독차지하고 있던 사대부들은
광희문과 그 주변 지역이 시의 소재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선 광희문 밖의 지역은 밭작물을 재배하는 농경지 아니면 공동묘지였다.
사대부들이 굳이 가볼 이유가 없는 곳이다.
채소류가 필요하면 하인들이 알아서 구입하면 될 일이고,
공동묘지는 선산을 갖지 못한 잔반(殘班)이나 중인 이하 계층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였으니 사대부들이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광희문 밖의 지역을 지나는 일은 한강 남쪽의 어딘가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나는 경우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왕의 행렬을 수행하는 것처럼 공식적인 행차 때에는
‘임금의 길’에 해당하는 흥인문으로 나갔을 테니 광희문과는 관련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대부 계층이 광희문을 거쳐 성 밖으로 나서는 것은
아주 드물게 개인적인 용무로 한강 이남 지역으로 갈 때뿐이었다.
이른바 ‘백성의 길’을 이용하는 경우이다.
@그렇게 아주 드물게 광희문과 그 밖의 지역을 읊은 시 몇 편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조선 말기 대문장가인 이건창(1852~1898)의
명미당집(明美堂集)에 실린 구성도중(駒城道中)이다.
이건창은 스물다섯 살(1876, 고종13) 음력 5월에 이 작품을 남겼다.
그는 이미 열다섯 살에 ‘조선시대 최연소 등과(登科)’의 명성을 떨쳤고,
19세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이 작품을 쓸 때는 이미 홍문관의 관리였다.
모든것이 보장된 상황이었고 관료로서 백성을 제도한다는 의식도
뚜렷했기때문에 모든 면에서 야심만만했다.
그런데 이건창의 가계를 알고서 이 시를 읽을 경우 묘한 반전이 발견된다
@광희문을 나서서 구성(駒城 지금의 용인)까지 가는 길의 풍경,
그중에서도 주로 목적지인 구성 근처 농가의 가난하지만
여유로운 한여름 모습을 그리고 있다.
광희문 밖의 풍경은 초반부에 잠깐만 등장한다.
광희문 밖의 길이 구불구불하다면 그것은 광희문을 나서서
왕십리역에 이르는 구간을 가리키는 말일 터이다.
그 자리는 이미 묘지가 조밀하게 들어서고
그 주변에 쌓인 갖가지 오물의 양도 엄청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건창은 이 동네 풍경을 “푸른빛이 싱그럽다”고 하는가 하면,
자신이 타고 가는 말의 머리 앞에 호랑나비가 쌍쌍이 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곳에 꽃 피었는지 모르겠구나”라고 영탄조로 노래한다.
이는 객관적인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묘사다.
그는 지금 이 동네의 상황에는 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중이다.
뭔가 다른 얘기를 하기 위해 지레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잠시 뒤 그 단서가 나타난다.
이미 그의 목적지인 구성에 다 왔다.
그런데 그곳에는 샘도 있고 무덤도 있는데
“구성의 강산에는 사연들도 많다지”라고 짐짓 남의 얘기하듯 한다.
지금의 용인에는 사연을 간직한 무덤들이 많은 편이다.
고려시대 정몽주, 조선초기 조광조, 조선중기 이경석 등이 그 무덤의 주인공들이다.
@이경석(1595~1671)은 누구인가?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당대의 문장가였으나 오히려 글 잘 짓는 것이 문제였다.
병자호란 직후 삼전도비의 비문을 써서
후대의 역사에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이다.
본인으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치욕스런 일이다.
당연히 그의 의지에 따른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임금이 시키니 할 수 없이 한 것이다.
그는 나중에 그의 큰형이자 스승인 이경직(1577~1640)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悔學文字)”고 토로했다.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편지를 받은 이경직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병자호란 초기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최명길과 함께 무악재 방면으로 나아가 청군과 담판을 벌였고,
하루 앞서 조선시대 임금들 중 유일하게 광희문으로 나간 기록을 남긴
인조의 행로를 뒤쫓아 남한산성으로 갔으며,
그런가 하면 이 전쟁이 항복으로 끝난 직후 도승지로서
왕십리 밖의 살곶이로 인조를 안내해 청태종을 배웅했던 당사자이다.
병자호란 때 두 형제는 전쟁 상황에 대응하는 일에서 최일선에 있었고,
그 전쟁의 뒤처리에서도 가장 험한 꼴을 최일선에서 맞닥뜨렸다.
주로 형은 행동으로, 동생은 문장으로 각각 그렇게 했다.
@이경직의 후손들은 서인 중에서 소론의 길을 걸었다.
영광보다는 모멸과 형극의 시간이 훨씬 길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들 가문은 강화도를 근거지로 삼는 가운데 양명학을 가학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새로운 시대정신을 체현하는 ‘선비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국진체(東國眞體)를 확립한 명필 이광사,
꼿꼿한 선비의 귀감 이광려,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자결해 영의정에 추증된 이시원 등이 모두 이경직의 후손이다.
이 중에서 이시원의 손자가 이건창이다.
그는 지식인의 길을 끈질기게 걸으면서 기개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가계의 정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이건창이 인조와 조상의 치욕이 쌓인 길을 모를 리 없었다.
삼전도비문과 관련된 이경석의 사연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병자호란(1636)으로부터 꼭 네갑자가 지난 1876년에 말을 타기는 했으되
‘옥당 관리’의 체신에 걸맞는 ‘임금의 길’(흥인문~살곶이다리) 대신
‘백성의 길’(광희문~살곶이다리)을 택해 한강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런 점을 강조하느라 시의 첫머리에 광희문을 나서는 것임을 아주 분명히 박아 넣었다.
대단한 자의식이고, 대단한 문장 기법이다.
@그가 왜 그 길을 택했으며 왜 시의 첫머리를 그렇게 시작했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도 대단한 자의식이다.
그러면서 시의 중간에 슬쩍 용인 지역의 무덤들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속에 조상들의 사연을 불러내고 자신의 마음도 다잡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대목으로 넘어간다.
이건창이 이 시를 쓸 때의 심리적 기제가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 뒤의 대목은 한여름 농촌의 힘들고 바쁜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결코 비루하지 않다. 그냥 차분히 읽어 내려가면 된다.
이때처럼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일하면
한 끼에 한 되씩 밥을 먹을 수 있을 터이니 백성의 삶은 큰 걱정이 없을 것 같다.
아이들도 행색은 누추할망정 “저절로 아름답다”고 하니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까.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건창이 광희문 밖에서 본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지역에 아로새겨진 역사였다.
그는 눈을 떴으되 실은 눈을 감고 그 풍경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역사적 지층을 살피며 거기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광희문 밖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어두운 풍경? 가슴 아픈 역사?
혹시 그 두 가지가 다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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