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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사랑 조흥식

2015-1030.춘천 금병산

by 조흥식 2023. 3. 29.

2015-1030.춘천 금병산(김유정역, 춘천덝갈비)

밤나무의 대기만성

 

 

 

밤나무의 대기만성

@백문보(白文寶 1303~1374), 담암일집(淡庵逸集) 율정설(栗亭說)

하늘과 땅 사이에서 풀과 나무가 생장하는 것은

모두 같은 기운에 의해서이지만

뿌리 내리고 싹 트고 꽃 피고 열매 맺는 데에는

어렵고 쉬우며 빠르고 늦는 차이가 있어서

유독 밤나무가 모든 초목 중에 가장 늦게 생장한다.

그래서 어린 싹은 자라기가 매우 어렵지만 자라기만 하면

금방 거목이 되고, 잎은 매우 더디게 나지만

나기만 하면 금방 울창해지며,

꽃은 가장 늦게 피지만 피기만 하면 순식간에 만개하고,

열매는 가장 나중에 열리지만 열리기만 하면 바로 수확한다.

아마 밤나무의 성질에 기울면 차고 겸손하면 보태는 이치가 있는 듯하다.

윤공은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 이미 30여 세였고 40세가 넘어서 첫 관직을 받았다.

사람들이 모두 늦었다고 여겼으나 공은 관직에 나아가 더욱 조심하고 삼갔다.

급기야 선군(先君)의 인정을 받아 크게 쓰이자

하루에 아홉 번 승진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사명(司命)을 지으니,

일부러 애써서 이뤄내지 않았어도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다.

앞서 확립하기까지가 어려웠으나 뒤에 성취하기는 쉬웠으니,

대개 이 밤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과 동일한 점이 있다

 

@윤공은 1289(충렬왕 15)에 태어나 1370(공민왕 19)까지 살았던

고려 후기의 문신 윤택(尹澤)이라는 분이다.

이 글을 쓴 백문보보다 나이가 14세나 많다.

1320(충숙왕 7)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주관하는

수재과(秀才科)에 급제하여 백문보와 동년(同年)이 되었는데,

이때 윤택의 나이는 32세였고 백문보의 나이는 18세였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10여 년이 훌쩍 지나서야 처음으로 검열이라는 가장 낮은 9품직을 얻었으니,

당시로써는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할 나이에 사회 초년생이 된 셈이다.

 

@윤택은 밤나무를 매우 좋아하였다.

봄에는 가지가 성글어서 가지 사이로 꽃을 엿볼 수 있어 좋고,

여름에는 잎이 우거져서 그늘에 쉴 수 있어 좋고

가을에는 열매가 좋아서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좋고

겨울에는 껍질을 모아 아궁이에 불을 때서 좋다며

밤나무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택은 생애 첫 주택을 밤나무가 울창한 곤강(坤岡) 남쪽에 마련하고 율정(栗亭)이라는 택호를 붙였다.

윤택의 손자 윤소종(尹紹宗)이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지은 시에서

사직단앞의 옛 율정이여! 노인들 모임은 간곳 없고 풀만 무성하구나라고

했던 것을 보면 밤나무가 많은 곤강은 아마도 고려 사직단이 있었던 개경 서쪽 어름일 것이다.

 

@백문보는 14세나 연상인 동년이 그토록 밤나무를 좋아하는 것을 참으로 남다르게 바라보았다.

윤택은 그저 사시사철 밤나무가 주는 매력에 푹 빠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백문보는 땅속에서 튼실한 뿌리가 내리도록 오랜시간을 버텨내고,

싹 트고 입 달리고 꽃 피고 열매 맺기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어느 순간 최고의 모습으로 발휘되는 밤나무의 참모습을 통해

윤택의 무한한 내공과 내공을 이루기까지의 저력을 들여다본 것이다.

윤택의 내공은 그저 생긴 것이 아니다.

물이 흐르다가 웅덩이를 만나 그 웅덩이를 다 채우도록

머물러 있는 시간이 있었기에 큰 물줄기를 이루어

결국 바다에 도달하는 이치처럼 윤택의 머물러 있었던 오랜 시간에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윤택은 82년의 세월을 살았다.

윤택이 세상을 떠난 그해에 백문보는 68세의 나이로 윤택을 위해 분묘기(墳廟記)를 지었다.

그 글에서 과거에 율정설을 지었다고 말하며 윗글을 인용한 데서 짐작해 보건대,

이 글은 아마 백문보도 윤택도 이미 노년의 나이가 되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며 지은 글인 듯하다.

이 시기는 고려 말기에 가까운 때인 만큼 젊은이들의

사회 진출이 둔화되었을 것이고 미래의 전망도 밝지 못했을 것이다.

백문보는 이 글에서 밤나무의 느린 생장을 닮은 윤택의 인생을 드러내

밝힘으로써 젊은이들에게 빨리 가려고만 하지 말고

세월을 묻는 인내와 지혜를 가지라고 충고한 것은 아닐까?

 

@동년(同年)은 동방(同榜)과 같은 말로,

같은 때의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함께 적힌 사람, 즉 과거의 합격 동기생을 이른다.

 

@동문이란?

율정이라는 시로,

선조께서 정자에 밤나무를 심어놓고 인하여 자호로 삼았다.

매년 봄가을로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반드시 노인들을 모시고

정자 위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는 자주(自註)가 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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