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5.안철수 대표(국민의당), 정선 여행(5,5~5,7)
자치통감 17(齊家9)
자치통감 17(齊家9)
3.만물은 지나치게 성대히 되는 것을 꺼린다
@장안세 家門
*장안세는 諸侯가 된후 “父子의 지위가 너무 높아 녹봉을 사양한다”
결국, 한선제는 장안세가 반납한 녹봉을 보관하는 無名錢에 보관시킨다
수백만전을 국고에 반납한 뒤에도 존귀해짐을 불안해 하였다
병환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인재를 관직에 추천하였으나 감사 인사를 단호하게 사양하고
이후, 절교하고 일절 왕래하지 않았다
@장안세의 아들 장연수를 “지방으로 좌천시켜 달라”고 상소하여
*한선제는 장연수(아들)을 한직으로 보낸뒤,
장안세의 고령을 감안하여 1년후 불러들여 복직시킨다
장연수는 九卿을 역임하고, 부친(장안세)의 제후국을 승계한다
“저는 스스로 세운공이 없는데 부친 덕분으로,
조세(1000만전)가 너무 많아 호구를 줄여달라”고 한선제에게 상소한다
@장안세의 둘째 장팽조(장안수의 양도후)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한선제는 겸양에 탄복하여
또 하나의 제후국을 내리고 죽은후 시호(애후)를 하사하였다
*호구는 전과 같았으나, 조세수입은 절반으로 줄였다
@장안세의 손자 장발(장안수의 아들)은 제후국을 승계받았는데,
*한원제 즉위후 인재등용을 적극 장려하였던 시대적 분위기였다
*장발은 주요관직에 진탕을 천거하였는데,
훗날 죄를 범하자, 장발의 처벌차원에서 호구 200호를 감소시켰다
*진탕이 서역에서 큰 전공을 세우자,
한원제는 장발을 인재추천의 혜안을 높이 평가하였다
*장발이 죽자 시호(무후)를 하사하였다
@장안세의 증손자 장림(장발의 아들)
*장림이 죽은뒤 전재산을 이웃, 친지에게 분배하고
장례식을 건소하게 치르고 “봉분을 세우지말라”고 유언하였다
*검소하고 겸손하여 매번 황궁을 출입시마다 항상 탄식하였다
“곽광이 죽은뒤 부인과 후손들이 모반하여 멸문지화되었는데”
“상홍양과 곽광은 나의 경계가 되는 사람이니
어찌 그교훈이 깊지않은가?”
*상홍양(~bc80)은 한무제시절, 유단(연왕)과 모의하여 한소제,
곽광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장안세의 너무 조심스러운 겸양
*장안세, 곽광은 유하(창읍왕)을 폐위시키고 한선제를 옹립하였다
*장안세의 부친(장탕, 한무제)은 酷吏(혹리)로 악명이 매우 높았다
부친의 영향으로 조심하고 신중한 처신, 보신주의자로 볼수도 있다
*唐명신(누사덕, 안진경, 노회신)에 비하면 격조나 품성이 다소 미흡하다
장안세의 형(장하)은 위태자(유거, 한선제의 조부)를 오랬동안 보좌하였다
*장하는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궁형을 받아 궁궐에서 근무하였다
한선제의 어린시절, 성장과정에 큰 공헌을 하였다
*장하는 자신의 딸과 혼인을 추진하려하자
동생(장안세)이 심하게 역정을 내면서 반대하여 실패하였는데
“저 황종손은 위태자의 후손이다”
형은 동생의 출세를 막지 않으려고 포기를 하고서,
다른 여인(허황후)을 찿아 혼인을 주선헌 것이다
*한무제 말년, 장하는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위태자(유거)도 복권되지 않아 죄인 신분이었으며,
어린시절에 민간에서 어렵게 성장한 한선제가 황제즉위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는 한선제는 죄인의 후예로써
모두가 친분관계를 회피했던 시기였다
*장하는 평소 한선제(어린시절)를 적극 칭찬하였다
이때, 장안세는 형에게 “한선제를 칭찬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위태자의 후손을 추대하여 황위를 도모한다는 오해가 우려스럽다”
장안세는 충직하긴 하지만, 질박하고 정의, 용기가 부족하고
修身 관점에서 약간 소심한 관리임이 틀림없다고 평가할수도 있다
@곽광이 죽은뒤, 장안세는 두렵고 불안한 심정이 다가온다
*장안세는 한선제에게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은 능력이 부족하여 곽광의 지위를 대신할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한선제는 일단 수용한뒤, 머지않아 곽광 직위(재상)에 등용한다
*고급관료의 자질요건
1)권력을 농단하거나, 공로를 가로채지 말아야하며
2)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장안세가 관료를 천거하여 등용을 시켰다
*이후, 감사 인사를 왔을 때, 크게 화를 내며 왕래를 끊어버린다
“인재 추천은 대신의 본분이며 공무인데,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며 자신의 파당을 형성하면 안될 일이며,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별해야한다”며 야단을 친다
@형(장하)이 죽었다
*선제는 뜨거운 추모의 정을 표시하면서, 제후로 추증하고,
민가 200호를 징발하여 묘를 수호케 하명하였다
*이에, 장안세는 너무 과분하다면서 사양하였다
@장하의 아들이 요절하였다
*장안세는 막내아들(장팽조)을 장하(형)에게 입양시켜 대를 잇게한다
“장하를 제후로 추증하면 장안세의 아들(장팽조, 장하의 수양아들)에게
제후국이 귀착된다”면서 장안세는 봉작을 사양하였다
*징발된 민가 200호의 분묘 수호조차 과분하다면서
호구숫자가 너무 많아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한선제에게 간청하였다
*한선제는 거절하였다
“장하를 위한 조치이지, 장안세를 위함은 아니오”
이때 한선제는 한발 양보하여 장하 분묘수호 민가호구를 30호로 줄여
장안세의 겸손함을 수용하였다
@대장부의 꿈은 제후이다
*아무나 제후가 될 수 없다. 대대로 세습되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반초(32~102)가 붓을 내던지고 종군하여 제후의 꿈을 성취하였는데,
*육유(1125~1210 남송시인)는 평생을 분주히 떠돌았으나
실패한 인물이라면서 스스로 자평하였던 인물이다
*장안세는 평소에 소박하여 검은색 도포에 장시조차 하지않았으며
부인도 손수 베를 짜서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700명의 가솔들조차 직접 수공업에 매진하여 자급자족하였으며
“곽광 가문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면서 신중하게 살았다
@교훈: 修身齊家 物忌太盛
“천하만물은 지나치게 성대히 되는 것을 꺼린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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