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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복합지구

2017-1114.354복합지구 총재협의회

by 조흥식 2023. 6. 1.

2017-1114.354복합지구 총재협의회

진본기, 서초본기, 항우본기(진나라 역사 요약)

 

 

 

 

秦本記와 항우본기(), 나라 역사(요약)

@秦本記

진양공(재위 12): 처음으로 나라를 가짐(西周 유왕, 포사)

문공(재위 50): 도성 건설

진문공 13: 사관을 두고 국사를 기록

진헌공: 기산 인근의 평양으로 천도, 탕사 멸함, 출자(재위 6)

진무공: 처음으로 사람을 순장제도(殉葬) 실시.

진덕공(원년): 처음으로 옹성(雍城) 대정궁에 머뭄.

옹성에 거주하는게 적합한지 점을 치자 이런 점괘가 나왔다.

후대 자손은 황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게 될 것이다.”

진선공(12년 재위)

진성공(4년 재위)

 

목공(임호 등극): 오고대부 백리해와 건숙을 책사로 둠.

진목공이 정나라를 공격할려고 하자 백리해와 건숙이 극구 반대하자

진목공은 백리해의 아들 맹 명시와 건숙의 아들 서기술과 백을병을

이끌고 출병했으나 나라에게 호산에서 대패.

이를 계기로 진목공은 백리해와 건숙의 충고를듣지 않은 자신을

크게 자책한 후 패배하고 돌아 온 맹명시와 건숙 아들들에게 더욱 후하게 대접함.

목공(34): 융왕이 유여(由余)를 사자로 보냄.

목공: “중원은 시ㆍ서ㆍ예ㆍ악ㆍ법도로 나라를 다스리는데도

늘 난이 일어나오. 지금 융족은 이런 것들도 없소.

그렇다면 무엇으로 다스리는 것이오?”

유여: “그것이 바로 중원에 난리가 일어나는 원인입니다.

상고 때 성인 황제가 예악과 법도를 만든 이후 솔선수범한 덕에

겨우 작은 다스림(小治)을 이루었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군왕이 날로 교만하고 음란해졌습다.

이들은 법률의 위력만 믿고 백성을 문책하고 감찰했습니다.

백성이 극도로 피폐해지면 군주를 원망하며 인의를 요구하게 됩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며 원망하고, 찬탈하며 죽이고,

마침내 멸족에 이르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융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충성으로 윗사람을 받듭니다.

나라의 정사가 마치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것처럼 잘 이루어집니다.

그런데도 군민. 모두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진정한 다스림(大治) 입니다.”

목공은 책사 유여를 얻기 위해 융왕에게 열여섯명의 미모의 여악을 보내

정사를 멀리하게 하는 간계를 펼침.

융왕이 여악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자 이를 유여가 간하자

둘 사이가 멀어진 틈을 이용해 진목공은 유여를 진나로 데려오는데 성공.

 

목공(36): 맹명시로 하여금 다시 나라 공격함(효산의 패배를 설욕)

목공(37): 유여의 계책을 받아들여 융왕 토벌, 1000리의 땅 개척.

마침내 서융 일대를 제패.

목공(39): 사망, 순장한 사람이 177명 이었다.

 

진강공(재위 12)

진공공(재위 5)

진환공(재위 27)

진경공(재위 40)

진애공(재위 36)

진애공(31): 오왕(합려)와 오자서가 초나라 도성 영으로 진공

진혜공(재위 10)

진혜공(원년): 공자가 노나라 재상으로 직무대행

진도공(재위 14)

진여공공(재위 34)

진조공(재위 14)

진회공(재위 4년 후): 요절

진영공(재위 13)

진간공(재위 16)

진혜공(재위 11)

진헌공(원년): 순장제도 폐지. 약양에 성을 쌓고 천도.

진헌공(11): 나라 태사 담이 진헌공을 알현했다.

본래 주나라와 진나라는 하나였으나 나중에 나뉘었습니다.

나뉜 지 500년 뒤 다시 합쳐지고,

합친 지 17년 뒤 천하를 통일하는 패왕이 출현할 것입니다.”

진헌공(재위 24)

효공(즉위): 전국에 진나라를 강성하게 할 계책을 가진 인재를 구한다는

구현령(求賢令)을 선포.

진효공(3): 나라 출신의 위앙(상앙)이 경감을 통해 진효공을 만나다.

위앙은 진효공에게 법령을 바꾸고,

형벌을 정비하는 변법수령(變法修令)과 안으로는 농사에 힘쓰면서

밖으로 적과 싸우다 죽은 자의 상벌을 분명히 하는 내경외전(內耕外戰)을 건의함.

진효공(10): 위앙이 대량조가 되어 나라 안읍 포위, 항복 받아냄.

함양으로 천도.

여러개 마을을 합쳐 큰현을 만들고 현령을 둠,

40개의 현으로 구성.

진효공(12): 위앙을 열후에 봉하고 상군(商君)으로 칭함.

혜문군 즉위 직후: 상앙 거열형에 처해짐.

진혜문군(13): 장의를 보내 섬()땅을 빼앗음

진혜문군(14년 후): 왕호를 진혜문왕 원년으로 고침

진혜문왕(3): 장의 나라 재상

진혜문왕(8): 장의 나라 재상

진혜문왕(12): 장의 나라 재상

진혜문왕(즉위 14)

진무왕(2): 처음으로 승상丞相을 둠.

저리질과 감무가 좌승상, 우승상이 됨.

 

*장의 나라에서 죽음.

진소양왕(즉위): 진소양왕의 모친은 나라 사람이고 성은 미씨고, 선태후로 불리었다.

진소양왕(2): 서장, 장이, 대신, 제후, 공자 등과 함께 모반 했다가

모두 주살, 혜문후도 제 명에 죽지 못했다.

진소양왕(9): 나라 대부 맹상군 전문이 진나라로 와 승상이 되었다.

진소양왕(12): 위염이 승상이 되었다.

진소양왕(14): 좌경(左更) 백기가 이궐에서 나라와 나라를 공격하여

24만명을 참수하고 공손희를 포획

진소양왕(15): 대양조 백기가 나라를 쳐 원땅을 빼앗음

진소양왕(29): 대량조 백기가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짐

진소양왕(42): 안국군이 태자로 봉해짐

진소양왕(47): 나라를 공격, 무안군 백기가 장평 전투에서

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40만명을 모두 죽였다.

진소양왕(50): 무안군 백기, 사병으로 강등 후 유배가는 중에 자진함.

진소양왕(재위 56년 가을): 사망

진효문왕(원년): 즉위후, 사흘만에 죽었다.

*진장양왕(2): 진장양왕이 인질이 되어 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보고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뒤,

영정(진시황)을 낳았다.

영정(진시황)은 소양왕 48년에 한단에서 태어났다.

영정(13): 진양왕 사망후, 뒤를 이어 진왕이 되었다.

 

*진왕 정(, 秦始皇帝) 즉위

진왕 정(즉위 26): 천하 통일, 36군을 두었다. 칭호를 시황제라 했다.

시황제는 51세에 죽고, 아들 호해가 즉위했다.

진왕 정(9): 장신후 노애의 반란.

진왕 정(10): 상국 여불위 노애의 반란에 연루되어 면직

축객령(逐客令)을 시행하려다 이사가 상소(건의), 취소

울료자 군사를 총괄하는 국위 임명, 이사가 정권을 장악

진왕 정(12): 문신후 여불위 사망

진왕 정(14): 나라에서 한비자를 사자로 파견했으나,

이사가 계책을 써 한비자 억류. 한비자 운양에서 옥사.

진왕 정(20): 나라 태자 단이 나라 군사가 나라 침공을 우려하여

자객 형가를 시켜 진왕 정을 척살하고자 시도.

진왕 정(21): 왕전 나라 도성인 계성 격파, 태자 단의 목을 거둠.

 

*진왕 정(26): 천하통일

황제(皇帝)라 칭함: “짐이 최초로 황제가 되었으니 始皇帝에 해당한다

황자들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번왕을 세우지 않고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눈 뒤 군마다 군수와 군위및 군감등을 두기로 했다.

 

진왕 정(28): 진시황 군현 순행. 양보산에서 제사지내고 비석을 세움.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러서 병이 났다.

7월 시황제 사구의 평대에서 병사病死. 여산에 시황제를 안장시키다

 

*2세 황제(호해, 원년): 조고를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아 국사를 돌보게 함.

4: 여산 능묘 복토, 축조 공사 작업, 아방궁 공사 재개,

7: 수졸(戍卒) 진승 등이 나라 땅에서 반기, 장초(張楚) 를 칭함.

진승의 부장. 무신은 스스로 조왕, 위나라 왕실의 위구는 위왕,

제 왕실의 전담은 제왕, 패공 유방은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초나라 명문가 출신의 향량은 회계산 에서 군사를 일으킴.

 

*2세 황제(호해, 2년 겨울): 소부 장함, 여산의 죄수들을 병사로 활용하여

진승을 성보에서 도륙.

조고의 계략으로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등이

국사를 논하는데 소외되고 늘 2세 황제가 궁중에 머물며

천자를 알현할 기회를 갖지 못함.

소부 장함 여러번 싸움에서 패퇴하자 군사를 이끌고 항복.

 

*2세 황제(호해, 3): 조고 승상이 되다. 이사 처형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한데서 유래.

승상 조고가 공자 자영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준비.

그리고 자신의 사위인 염락을 보내 2세 황제(호해) 자진케 함.

최후의 순간에 곁에 있던 환관에게 2세 황제(호해)가 한 말.

그대는 어찌해서 진즉 나에게 고하지 않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었는가?”

신은 감히 고하지 않은 덕에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한 것입니다.

신이 일찍 고했다면 이미 주살당했을 것입니다.”

 

*2세 황제(호해)의 사촌형제 자영을 진왕(秦王)으로 삼아 헛되이

황제를 칭하지 않고 이전처럼 왕으로 칭함.

5일 뒤: 자영이 승상 조고를 척살.

46일째: 나라 장수 패공 유방이 진나라 군사 격파 후 무관으로 진입.

이후, 한달 뒤: 항우가 입성해 자영(진왕)과 여러 공자를 살해.

함양 백성 살해, 궁실(아방궁)을 불태움.

 

@사마천 사기(610년 동안의 사건을 기록)

*한나라 초기, 가생이 쓴 과진론에서 이같이 말했다.

전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 뒤의 역사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

군자가 다스릴 때는 상고 때를 자세히 살펴 당대에 증험해보고,

세상사를 참작해 성쇠의 이치를 이해하고,

권세의 적합함을 세심히 살펴 거취에 기준이 있다.

변화하는 때를 좇은 덕분에 오래도록 계승되고 나라가 태평했던 것이다.

 

무릇 천하를 병탄할 때는 계책과 무력을 중히 여기고,

천하가 안정되었을 때는 권력에 순종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는 천하를 얻을 때(取天下)와 천하를 지키는 때(守天下)의 통치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왕은 시작과 끝의 변화를 보고 존망의 기미를 알았다.

목민(牧民)의 이치는 단지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통찰한 결과다. 이리하면 설령 천하에 비록 정도를 거스르는 신하가

있을지라도 틀림없이 이에 호응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흔히 이르기를, “안정된 백성은 더불어 의를 행할만 하고,

위기에 처한 백성은 더불어 비리를 행하는 것이 용이하다.”라고 한다.

지존의 천자가 되어 천하를 보유하는 부를 지녔는데도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은 기울어 지는 것을 바로잡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2세 황제(호해)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항우본기()

2세 황제(호해), 원년 9

항량은 항우와 함께 회계군의 군수 은통을 척살하고 오중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동양현을 이미 함락시킨 진영은 현령의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2만명)

진영은 모친이 나서서 지혜를 내며 말하기를

문득 큰 명성을 얻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했고

이를 진영이 받아들여 항씨 가문 밑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간다.

 

거소 출신 범증(范增)은 나이가 일흔 살이었다.

평소 집에 머물며 기책을 내는 것을 좋아했다.

이내 항량을 찾아가 유세했다.

진승의 패배는 실로 당연합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했으나 초나라는 가장 무고하게 당했습니다.

초회왕이 진나라로 가 돌아오지 못 한 후,

초나라 백성은 오늘까지 초회왕을 가련히 여기고 있습니다.

 

음량가인 초남공이 말하기를,

초나라에 세 집밖에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항량이 이를 옳게 여겨 초회왕의 손자 옹심을 초회왕으로 옹립한다.

그러나 항량은 진나라 장수 장함에게 크게 패하고 전사 하계 된다.

 

초회왕이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진나라 장군 왕리와 섭간이 포위한

거록을 구출하라 명령했으나, 송의는 여러 핑계로 머뭇거리자

항우가 새벽에 상장군 송의를 목베고 상장군 자리에 오른다.

거록전투를 통해 항우는 제후들 가운데서 실질적인 상장군으로 올라선다.

 

이때 진나라 장군 장함은 항우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2세 황제(호해)로부터 추가 병력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추궁을 당했다.

이에 장함은 조고에 의해 궁중이 장악 당함을 인지하고

참모 사마흔의 충고를 받아들여 몰래 항우에게 맹약을 결정함.

진나라 군사 20만명 생매장 당함.

 

마침내 항우가 진나라의 관문 함곡관을 격파하고 입성할 때 이미 유방이 함양 함락시켰다.

이때 범증이 항우에게 말했다.

유방은 산동에 있을 때만 해도 재물을 탐하고 미색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지금 관내에 들어가서는 재물을 취하지도 않고 여인을 가까이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의 뜻이 작은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 기운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두 용과 범의 기운으로 오색 찬연 했습니다.

이는 천자의 기세입니다.

급히 공격을 가해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다급해진 유방은 책사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우의 계부로 있는 항백에게

유방은 감히 항우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형제의 예우를 다한다.

다음날 유방은 홍문으로 항우를 찿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오해를 풀었다.

그러나 항우의 책사 범증은 항량으로 하여금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베라 지시했으나 항백의 방해로 여의치 않았다.

이에 장량은 급히 번쾌를 불러 군막안에서의 다급함을 전하고

대비책을 세워 측간에 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유방을 탈출시킨다.

 

이에 범증은 유방이 선물로 준비한 옥두를 칼로 내리치며 탄식한다.

, 어린아이와는 대사를 도모할 수 없구나.

항우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의 포로가 되고야 말리라.”

 

*홍문지연(鴻門之宴): 홍문에서 열린 잔치,

겉과 속이 다른 정치적 담판.

초패왕과 유방간의 전쟁에서 유방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훗날 두 사람간의 피말리는 전쟁의 시발점이 만들어지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서초패왕이 된 항우는 팽성에 도읍했고,

유방을 한왕으로 삼아 파촉과 한중에 봉했고 관중일대를 삼분해

진나라 장수를 왕으로 삼아 유방을 견제 하게 했다.

 

고조(원년): 초패왕에 대항해 유방 관중을 모두 병탄한 뒤

동진, 제나라, 조나라 배신의 깃발 높이 세움.

고조(3): 유방이 항우에게 강화를 청함.

 

항우가 받아 들이려 하자 약양후 범증이 유방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바로 공격할 것을 간하자, 항우가 범증과 함께 형양을 포위한다.

 

이때 유방은 책사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이간계를 벌인다.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사통하는 것으로 의심해 범증에게 부여된 권력을 회수했다.

항우의 군막을 떠난 범증은 귀향 도중 병사한다

 

초패왕과 유방간의 전쟁에서 유방이 유리한 고지로 접어드는 두 번째로

획기적인 결말을 낳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유방은 장수 기신의 계책으로 혈혈단신으로 팽성을 빠져 나왔다.

 

한고조(5): 한신과 팽월 출병

서초패왕 항우: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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