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12.도봉산, 북한산 의상봉
*도봉서원과 정암 조광조, 우암 송시열
도봉서원과 정암 조광조(우암 송시열)
1.조광조(정암)와 도봉서원
.도봉서원(사액서원, 1573, 선조6)은 한양 제일의 서원이다
.정암 조광조가 배향되고, 우암 송시열이 추가 배향되었다
.양주목사(남언경~이재민~이정복)가 6년간 공사하였다
.공사비용은 선후배, 제자들의 찬조금을 거출하였다고 전해진다
(부제학 허협, 우참판 백인걸, 이조참판 박소립...)
.평소, 송시열이 가장 존경했던 조광조 사당을 참배후 詩를 남긴다
@정암 조광조
.조선 성리학의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퇴계)
.주자학 계보는 (안향~이제헌)~정몽주, 길재, 이색,김숙자
~金宗直~金宏弼~趙光祖~退溪, 曺植~栗谷~김장생~송시열
.戊午士禍(1498), 희천에 유배된 한훤당 김굉필을 스승으로
만날때, 당시 조광조는 17세(父親: 평북 어천 찰방)
.훈구파의 반발로 사림파가 무너진 己卯士禍에 희생된다
.추모비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 필체이다
2.고산앙지(高山仰止): 1700년(숙종26년)
@도봉서원앞 개울가 바위 글씨(김수증 친필)
.詩經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 조광조를 사모하다
@김수증(숙종, 영의정 김수항의 형, 청음 김상헌의 손자)
.동생 김수항(영의정)이 송시열(스승)과 유배되자 ,
.김수증은 화천 곡운계곡(삼일계곡)으로 隱者를 택하여
농사를 지으며 은일로 말년을 숨어지냈다
.김수증은 서예와 금석문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朱子도 은거속에 삶의 멋을 찿았는데, 그를 모방하였다
.조세걸(평양출신 문인화가)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것인지 직접 지도하였다(谷雲九谷圖)
.경치가 좋은곳을 곡운(谷雲), 九谷圖는 지식인들의 유행이었다
.김창흡(안동김씨)은 겸재 정선, 묵객들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 이병연(겸재 친구)도 여행에 동참하는데,
사천 이병연(문인)은 겸재의 금강산 그림의 “해악전신첩”의
화첩을 만들어, 화폭마다 제시를 붙인다
3.道峰洞川(도봉동천)
@西人의 좌장, 우암 송시열의 친필(바위글씨)
.봉림대군의 스승(효종): 병자호란후 낙향, 정계복귀, 북벌계획 추진
.예송논쟁: 조대비 복상문제
*효종 사망: 1차 예송논쟁(1659, 西人 승리)
*효종비 사망: 2차 예송논쟁(1674, 南人 승리), 15년후
.기사환국에 사약을 받다(숙종, 1689, 장희빈/경종 세자책봉 반대)
4.도봉산의 고찰
@도봉사 천년 고찰
.고려국사를 혜거(899~974)스님이 창건(광종,5대)
.고려 현종(10대)은 개성이 거란족 침공받았을때
이곳으로 피신하여 정무를 보던 국찰이다
.호국불교의 출발점이자 팔만대장경 발간의 시조이다
.현재 개인사찰로써 대웅전은 단청이 많이 퇴색되었으며,
.감정가 24억원으로 경매되었다(2010년)
@회룡사(回龍)
.유래? 태조(이성계)~무학대사
.1398년(태조7) 함흥에서 한양으로 올때 무학을 방문하였다다
.무학은 정도전의 미움으로 토굴에서 몸을 숨겼다(1394)
(1설)1403년(태종3) 환궁, 무학을 찾아와 회룡이라 불렀다
(2설)1384년(우왕10)에 도봉산에서 창업성취 기도를 했다
이성계는 석굴암에서, 무학은 무학굴에서 기도를 하였다
정암 조광조는 누구인가?(38세, 1482~1519년)
1.중종은 성균관을 방문하여 유생들의 답안지를 보고난뒤,
@정암 조광조를 불러 중종과 기막힌 인연을 맺는다
.조광조의 초고속 승진으로 성리학 이념을 정착시킨 유학자이다
.정치+사상의 전환점으로 4년간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도덕+왕도정치를 구현한다
.중종은 哲人으로 학문+도덕 함양을 위한 경연(매일 4회)에 지쳐간다
“소학”보급으로 수신제가의 성리학 지침서,
훗날 금서로 지정된다
“향약”으로 지방에서 교화+교육에 매진하지요...
“서격서 혁파”...관리자녀의 추천제도를 없애고 인재를 등용한다
“현량과”로 사림파를 위한 추천제로써,
정치세력을 무력화시킨다
@중종반정(연산군 12년, 1506년)...
.신하들의 거사(성희안,박원종)
.연산군(31세)은 교동(강화도) 유배에 적응하지 못하여 병사한다
.중종(인성대구)은 성종계비(정현왕후의 아들)로써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함경도 회령에서 야인(野人) 속고내가 사람과 가축을 약탈했는데,
.조정에서 대응책을 준비코자 중종 임금의 주재로 어전회의가 열렸다
.적이 변법(變法),즉 게릴라전술을 쓰니 이에 능한 그 지방 사람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안이 건의되었다
.부제학 조광조는 “속고내를 속여서 징벌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우리 조선의 왕이 오랑캐를 치는 도리가 아닙니다.”
“담구멍을 뚫는 도적을 당당한 조정에서 도적의 꾀를 씀은나라를
욕되게 하는 수치(羞恥)입니다”왕에게 건의하였다
@변방에서 국가대사(백성의 재산 약탈, 노예로 잡아가는 큰재난)를
명분과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 것이다
.대신회의에서 조광조의 안이 채택되어 임금에게 건의하지요
.병조판서는 건의하였다 “농사일은 머슴에게 묻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묻고, 군사문제는 제게 물으셔야 합니다
실정을 망각한 선비들의 의견은 틀립니다”
그러나, 중중은 파병을 취소하는 것으로 결론을 잘못내린다
2.조광조의 몰락
@己卯士禍(기묘년) “走肖爲王(趙위왕)”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갈아먹지요
.중종반정공신 130명중에서 2/3은 가짜공신에게 부여했던 특혜를
재검토하여 상훈(토지+노예)를 회수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의 반발, 반격이 시작되는 사화이다.
조광조의 실각...“붕당을 만든죄...” 체포된다
.조광조는 매일 아침마다 왕(한양)을 향하여
.큰절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지만,
.화순(능주)으로 유배~사약(38세,1519년)으로 죽는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정치 진출로써 훈구파를 견제하였고,
성리학의 뿌리 발전으로 퇴계, 율곡이 등장한다
.여론, 분위기 파악을 잘못한 진보적 정치인 학자...50년후에 복권된다
.道義정치를 꿈꾸던 중종은 實利보다 명분과 공론을 중시했다
.결정적인 대사결정에 명분과 공론은 중시하고, 실리를 잃어버린다
3.능주에서 사약을 받다
@학포 양팽손이 시신을 수습하여 중조산(화순 이양면)에 암장한다
.조광조의 6살 후배로써 사당을 짓고 배향해 오던중,
죽수서원(1570년, 선조3)에 사당을 이전한다
.1년후 용인으로 묘소를 이장하였다
.이때, 제자 양산보(1503~1557)는 낙향, 소쇄원(담양)에서 은거한다
.제주양씨, 담장에 五谷門글씨는 “계곡물이 5번 돌아 내려온다”
.우암 송시열의 필체(瀟灑處士梁公之廲, 소쇄처사양공지려)
4.소쇄원은 제자 梁山甫(양산보, 1503~1557, 55세)가 조영하였다
@양산보는 蒼巖(창암 양사원)의 장남, 창암촌이라 칭한다
.15세(1517), 부친따라 조광조의 제자가 되어 현량과에 등용된다
.조광조가 유배(능주)되자, 양산보는 창암촌으로 낙향,
초가정자(待鳳臺, 대봉대)에서 處士公으로 은자한다
.학포 양팽손의 화순으로 낙향도 조광조를 따라왔다
.면앙정 송순(宋純)의 도움으로 소쇄원을 건축한다
.松江 鄭澈(1536~1593)의 “소쇄원에 부치는 詩”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고 마흔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는 깨지도 않네)
.양산보(34세)가 지석촌으로 낙향한지 17년후 松江이 태어났다(1536)
.1575년에 쓴 작품으로, 당시 지실마을로 잠시 낙향해 있었다
.양산보는 陶淵明(도연명)과 周茂叔(주무숙)을 존경했다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를 곁에 두었고.
周茂叔(주무숙)의 愛蓮說은 스승(조광조)이 흠모했기 때문이다
.소쇄원은 園林의 이름은 황정견(宋나라 명필)이 周茂叔(주무숙)의
인물됨을 극찬한데서 인용한 것이다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흉회쇄락 여광풍재월)
“가슴에 품은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에 해가 뜨며
부는 바람과도 같고 맑은날의 달빛과고 같네...”
.霽月堂(제월당)은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집
.光風閣(광풍각)은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
.양산보가 어렸을때 오리들이 헤엄쳐 올라와서 놀았던 연못이다
.자손에게 유언하였다
“절대로 남에게 팔지말고,
돌하나 계곡 한구석 내손길 내발자국이 닿지 않은곳이 없으니,
하나도 상하게 함이 없도록 하라...”
(唐나라, 이덕유가 平泉莊을 만들고 그랬다며 환기시켰다)
.1755년, 목판화(소쇄원도)를 보고 재건한 모습이 현재건물이다
.현재, 처사공의 유언에 따라 15대째 유지하고 있다
(1400평, 계곡과 야산을 끼고 흙담, 50m...“ㄱ”형)
벽오동, 매화, 목백일홍, 복사나무, 가을단풍...
.소쇄원은 양산인 모씨의 舊業이며,
저절로 웅덩이가 만들어진 槽潭(조담)이다
.당대 제일의 名儒, 名文, 名流들이 소쇄원의 글을 남겼다
(奇大升기대승, 송강 정철, 송순, 백광훈, 고경명, 김인후)
(사돈 김인후는 48가지 노래와 10편의 시를 남겼다)
.송시열은 뒤뜰 梅臺에 “소쇄처사 양공지려” 문패를 달게했다
.고산 윤선도는 보길도에 “부용동 원림”을 벗으로 삼았다
@紫微灘(자미탄), 증암천...“백일홍 여울”
.紫微花 목백일홍(배롱나무)은 단단하며 터럭(俗氣, 속기)이 없고,
윤기가 흐르는 裸身(나신)으로 겨울에 손을 대면 부르르 떨어
부끄럼 나무(간지럼나무)이며, 뼈마디가 긁은 여인의 손목같다
.원숭이도 미끄러지며, 7우러~9월까지 100일간 붉은꽃이 피고,
백일홍이 시들면 벼가 익어 쌀밥나무라고 부른다
@俛仰亭(면앙정):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2),
.담양 봉산면 제월리 마항마을 뒷산에 있다
.송순(1493~1583) 俛仰亭歌
(면앙정가, 하늘을 우러러보다, 땅을 굽어보다),
낙향후(중종, 1533) 직접 지었다
.송순이 퇴계를 비롯한 당대 최고학자들과 토론하고 제자를 양성한곳
.공자왈, “두 번째 낙은 면앙의 낙이다”.
.면앙정(오례천+담양천)에서 합류하여 영산강이다
@息影亭(식영정) “그림자가 쉬고있는 정자”
.棲霞堂(서하당) 김성원의 장인어른,
옛주인 石川 林億齡(임억령. 65세. 명종) 장인을 위한 정자이다
(그림자 이야기...장자, 그림자가 무서워 나무 그늘로 숨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명명한다
.별모(성산)과 마주보는 언덕빼기 벼랑위의 가장 전망이 좋은곳이다
.한칸 서재, 팔각지붕, 넓은 툇마루(정면2칸, 측면2칸).
아름다운 老松과 곁가지 현애(懸崖), 뒤뜰의 배롱나무
.호남士林들이 모였다(임억령, 김성원)
(奇大升, 정철, 송순, 백광훈, 김인후, 김윤제, 양산보, 송익필, 김덕령)
.연못옆에 芙蓉堂은 1972년에 지었다
@棲霞堂(서하당): 부용당 뒤편의 김성원의 거처였다
.서하당이 훗날 湖南歌壇의 기초가 되었다
스승, 장인(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지었고,
.열동네 지실마을 정철은 김성원에게 글을 배운다.
.서하당은 송강의 土村이다(처가의 외숙의 재당숙)
@環璧唐(환벽당)
.서하당에서 자미탄 건너 마주보이는 사촌의 從姪(종질) 김윤제는
을사사화에 낙향하여 칩거한 環璧唐(환벽당)이다
.성산별곡의 釣臺이 환벽당이며, 뒤편 배롱나무 고목이 아름답다
.김윤제(나주목사, 1501~1572)는 을사사화에 낙향(9월의 상사화)
.꿈에 창계천에 용이내려와,정철이 물놀이를 하였다
(정철의 스승, 외손녀 사위)
5.송강 정철(1536~1593)
@속미인곡,사미인곡,성산별곡,관동별곡
.한양 출생(장의동: 청운동+적선동/장동, 영일정씨 ):
큰누나(인종 후궁), 작은누나(계림군 부인/월산대군의 손자)
.명종(8세, 경원대군, 인종의 이복동생)과 손꼽동무(10세)
.27세 장원급제 재회, 명종의 초청(1562),
17세 혼인(담양부호 유강항의 딸, 4남2녀), 첫날밤(유종헌가옥)
.을사사화에 계림군(정철의 매형)이 역적으로 죽으며 파탄이 온다
.父親은 함경도 경원~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맏형도 유배 후유증으로 병사한다
.부친을 따라 祖父고향(담양)으로 낙향, 김윤제는 환벽당을 건립하였다
(현 광주 충효동, 환벽리+김덕령의 고향/석저촌)
.스승 김윤제(의병대장 김덕령의 曾祖父)의 외손녀사위
.사하당 김성원(김윤제의 사촌조카)과 동문수학하였다,
고봉 기대승을 스승으로 모셨다
.하서 김인후(기대승의 스승),송천 양응정,석천 임억령에게 글을 배웠다
.星山앞으로 흐르는 맑은 냇물을 본떠 松江亭이더
@松江亭(송강정)
.가사문학 松江 정철(고서면 원강리,1955년 개축)
“죽록정(竹綠亭)”이었으나, 후손들이 “松江亭”으로 고쳤다(1770)
.정면 “송강정”~ 측면 “죽록정” (정면2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집)
.식영정을 오가며 “사미인곡~속미인곡~사미인곡
(王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女人이 男便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
.송강 유적(송강정, 환벽당, 식영정)으로 낙향후 4년동안 지내던 정자이다
.성산별곡은 성산(단양)으로 낙향후 김성원을 위해 지었다(1560,명종)
.처하당, 식영루의 사시풍경의 변화와 처외재당숙의 풍류를 칭찬한다
.송강정: 대사헌 낙향, 죽록정(1584 선조17년),
동인~서인 권력다툼으로 물러난다
@정철의 성산별곡을 창작한 무대...식영정
@松江 정철의 “星山別曲(성산별곡)”
어떤 지날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棲霞堂(서하당)
息影亭 주인아, 내말 듣소. 인간세상에 좋은일 많건마는
어찌 한강산을 그처럼 낫게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짝맞는 松이란? 釣臺를 세워두고, 그아래 배를 띄워 가는대로 버려두니”
(송강 14대손 정하용이 지실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실마을을 배경(식영정+환벽당+소쇄원)의 동양화가(석정 김영수)
.가사문학관에 정철 송강본 330장 목판을 보관하였고,
.무등산 서석대에서 흘러 증암천/송강+담양천/오례천이다
2.김수증(안동김씨)
@先안동김씨:장동 김문(壯洞 金門): 청풍계(淸風溪: 청운초교) 정착한후,
.김상용(1561∼1637)의 와유암(臥游庵), 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순절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척화로 안동김씨 세도가문으로 등극한다
.김수항(김상헌의 孫子)과 김창집(김상헌의 曾孫)부자는 영의정(숙종)
.김수항(노론)은 기사환국(南人이 재집권)후, 진도에 유배후 사망한다
.아들 김창집도 부친이 죽은뒤 벼슬을 멀리하였다가, 南人 몰락후
.갑술환국에 재기(우의정, 좌의정 ,영의정)하지만, 신임사화에 죽는다
.김수증은 김수항의 친형이다
@後안동김씨
.김창집의 현손이 김조순(순조의 장인)이다
.60년간(순조~헌종~철종) 세도정치로 가세가 드높았다
.흥선대원군이 등장하면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지만,
.당대 최고의 권좌를 뽐내던 가문이다
3.우암 송시열(西人)은 누구인가?
1.우암 송시열(83세)이 賜藥을 받다(1689. 숙종15년, 정읍 수송동)
.유언(朱子가 죽기전에 “곧을 直”을 알려준자)
.선조40년 출생~장원급제(인조11)~봉림대군의 스승(효종:1649즉위)
.제주도 유배(숙종,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원자 책봉반대)
2.우암 송시열(1607~1689, 83세) 西人
@예송논쟁(효종사망: 1659, 5월), 西人들의 몰락
*효종사망: 1차 예송논쟁, 조대비 복상문제(1674)
*효종비 사망: 2차 예송논쟁(1674)
*1689년 1월, 숙의장씨 아들(경종)의 세자책봉 반대
(제주 유배, 6월 한양으로 압송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1694년 갑술환국에 西人집권으로 명예회복한다
@화양동서원, 송우암 유허비...
.8세 공부(송준길) 선조40년 출생
.中國 朱子의 “무이구곡”을 본뜬 화양동계곡,
암서대 정자: 만동묘(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의 사당)
.한천정사(서원, 1910 재건), 남간정사
.부친(주자학자)과 이이, 조광조, 사계 김장생(1548~1631)과 친구
.29세 생원시 장원급제(인조11년. 주역 논술), 繫辭上傳(계사상전)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 순환하여 움직이는것이 道)
.봉림대군의 스승(효종즉위 1649), 병자호란후 낙향하였다
.정계복귀후 북벌계획을 추진한다(효종 1649)
3.효종, 송시열은 환장암(청주)을 明황제(2명)의 사당을 짓는다
.신종(임진왜란 지원의 은혜)과 의종(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를 위하여
1704년(明,패망 60주년) “대보단”을 창덕궁 후원에 사당을 만든다
“明,태조+신종+의종”의 단을 설치하지만, 1905년경 없어진다
.청나라의 눈치 때문에 묘는 설치하지 않았다
.송시열은 세자책봉 문제(경종)로 정치적 희생이 되지만,
.向化人(明나라에서 귀화)의 특별 과거시험등 예우가 특별했다
.정조는 租貢(특산물, 우정과시)을 직접챙길 정도로 각별했다
.젊은지식인 위주의 “北學”등장으로 “종주국”용어가 등장하지요
.청나라와 외교중시의 중국과 관계를 중간정리한다
.北學은 19c 개화사상으로 이어져 대원군의 척화비로 이어지고
.광무(대한제국,1897)는 부국강병의 국호가 등장하지요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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