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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사랑 조흥식

2012-0828.이봉우(경주이씨)

by 조흥식 2022. 12. 31.

2012-0828.이봉우(경주이씨)

  *경주이씨(백사 이항복, 우당 이회영)

 

 

 

경주이씨(백사 이항복, 우당 이회영)

@경주이씨, 三韓甲族의 으뜸인가?

.재상(정승)10명 배출한 노론 명문가로써 3만석의 富者였으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구한말에 전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만주에 세우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조선의 京班(서울에 거주하는 양반)~鄕班(시골에 거주하는 양반)

통털어 최고의 명문가문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주이씨 후손~우당 이회영(1867~1932)의 가문

.백사 이항복(선조) 후손이 무려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가문이다

영의정: 9(증영의정 4명 포함), 좌의정: 1

.성재 이시영: 부통령(이승만정부, 우당 이회영의 동생), 영의정급

정확히 11명으로 봐야 옳을것이다

.경주이씨 백사공파에 유일무일한 相臣錄(상신록)” 책자가 있다

상신록은 재상 10명 이상을 배출해야 책자를 만들 수 있으며,

재상들의 행장을 모은책이다

.재상이란 직책은 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능력없이 인맥으로 할수없다

.학식과 인품, 능력을 검증받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10명의 재상들 재상의 집안에 걸맞게 처신해야 한다

(백사 이항복~구천 이세필~양와 이세구~아곡 이태좌~

입향 이종악~운곡 이광좌~오천 이종성~청헌 이경일~

동천 이계조~귤산 이유원)

 

@백사 이항복은 젊었을때부터 촉명하고 당당했다

.영의정(권철)의 하인들이 담 너머 뻣어간 감나무 줄기의 감을 따먹었다

.즉시 달려가서 항의하였다(창호지에 손가락을 넣고서 질문은 했다)

.이 손가락은 누구겁니까?...

.감나무는 누가 주인이냐?...

.영의정은 사과하면서 큰아들(권율)에게 사위로 맞을것을 권하였다

.과거 급제(선조13)로 두각을 드러냈다

 

@弼雲臺(필운대)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를 말한다(종로구 필운동)

.경주이씨 백사공파 중시조(백사 이항복), 弼雲(아호)이 생긴것이다

.필운대는 장인(권율 장군)한테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현재 고택은 없고, 배화여고 교정의 바위에 필운대암석체가 있다

.이항복은 아침마다 주변을 산책하면서 한양(장안)을 내려 봤을것이다

.겸재 정선의 작품(필운대, 간송미술관 소장)을 그릴 정도라면

아마 주변 경관이 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항복(병조판서)은 장인(도원수 권율)에게 삼복더위에 권고했다

.장인은 사위말을 듣고 간편복(베잠방이+융복)으로 어전회의에 참석,

이항복은 정장차림으로 선조에게 간청한 것이다

무더우니, 관복을 벗고 조회를 간청했다선조는 허락하였다

.이때, 권율은 옷을 벗지 못하고 어쩔줄을 모르고 있었다

.선조의 강요로 옷을 벗었는데, 너무나 초라한 내의를 입었던 것이다

.병조판서(백사 이항복)는 대변하였다

도원수(권율)는 가난하여, 평소 짧은옷만 입는다

.임금은 권율의 검소함에 감탄하여 비단과 옷을 히시한다

 

@선조(25, 壬辰倭亂)의 결정적인 신뢰를 받게 된다

.도승지로써 비를 맞으며 심야 피난길을 떠나는 선조의 어가를 끌었다

.깜깜한 밤중에 임진강 나루에 도착한 이항복은 화석정을 불태워

도강하여 동파나루에 도착한 것이다

.이때, 약봉 서성은 선조를 등에 메고 냇가를 건넜다고 전해진다

 

@임진강변 花石亭은 이명신(栗谷5대조)의 정자였다

.栗谷이 어릴때 하인들에게 화석정의 기둥에다 기름칠을 하게했다

훗날 소용 닿는일이 있을것이다예언을 했던것이다

.덕분에 의주로 피난하던 선조는 밤중에 임진강을 도하할수 있었다

.신하들이 花石亭에 불을 놓아 불빛으로 천신만고 끝에 渡河했다

.80년후 儒林들이 복원(현종)하였으나,

6.25화재이후 1966년 재건하였다

 

@임진강을 도하, 장단면에 도착하였으나,

.선조는 피난길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여 방황하였다

.대신들은 태조(이성계)의 고향(동북방, 함경도)방향을 건의했지만,

.이항복은 밤새도록 서북방(평안도)으로 가야되는 이유를 진언했다

조선은 소국, 유일한 계책(명나라 파병지원)으로 권토중래를 해야...”

.결국, 왕자들은 동북방(함경도)으로 피난가던중,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항복은 의주에 도착한 선조의 압록강 도하를 적극 만류하였다

임금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아야 단결하여

왜군에 맞서 奮鬪할 것이다. 영호남(3)에 특사를 파견하여,

임금이 요동(만주지역)으로 가지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다라고

칙령을 내리게 하였다

.소문이 전국에 퍼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모집되어 게릴라전으로

장기전으로 유도하고, 명나라 파병요청 외교에 돌입하게 된다

 

@명나라 黃應賜(황응사, 특사)를 보냈으나, 군사외교가 쉽지 않았다

.이항복은 옛문서를 꺼내 보여준다(왜군이 조선에 보내온 외교문서)

일본은 조선과 함께 명나라를 쳐들어가자일본의 동맹 제안서였다

.임지왜란 초기에 대마도주(소오 요시토시)와 승려(겐소)를 파견하여

.조선에 同盟체결 假道入明의 요구하였으나(나라 攻擊路를 빌려달라)

東來부사(송상현)의 거절하여(戰死易假道難) 순절하였다

.명나라(이여송)를 설득하여 지원병 파병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율곡은 사직후,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을 찾아간다

서럽지 않은 눈물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약이니라...”

.언제? 어떻게 쓰일거라는 이야기는 전혀 귀뜸을 안해줬다

.먼훗날, 이여송 장군() 원군을 이끌고 왔을때 매우 거만을 떨었다

.명나라 원군을 청하려고 파견되어 이항복은 도움을 청할 때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을때 생각난 것이다

.그때 문득, 율곡의 충고를 기억하고 고춧가루 싼 주머니로 눈을 비벼서

슬픈듯 눈물을 흘리면서, 이여송 장군을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이여송)은 전투를 거절하면서

왜군과 휴전및 강화를 주문해온 것을 이항복이 설득에 나섰다

.시간이 지체되면 한양 탈환이 어렵고, 피해가 속출할것으로 판단했었다

.이에 명나라 군대가 적극 가담하여 치열한 전투가 시적된 것이다

 

@이여송 장군()과 기막힌 외교담판이 매우 인상적이다

.최초, 이여송()은 압록강을 도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인접국의 전쟁에 휘말려 피를 흘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여송의 변명은 독특했다

조선에 인물이 있어야 나도 참여한다.

승산이 있어야 전쟁에 참여한다

.이에 외교사절단을 재편성하였다

백사 이항복, 서애 류성룡, 차천로(1556~1615), 한석봉(1543~1605)

.당대 최고 詩人(차천로)은 평소 습관대로 낮술에 취하여 밤이 깊어

흥이 오르자 를 읊기 시작하였다

.조선 명필(한석봉)은 차천로의 를 일필휘지로 받아 적었다

.한석봉의 서예글씨를 이항복은 이여송()에게 전달하며 설득하였다

백사는 左傳을 능통했기에 돌발상황 적임자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춘추좌전: 춘추시대 외교비화를 다룬책(임시변통, 외교적 수사내용)

.이항복이 겸상식사를 하던 이여송()이 트집을 잡았다

소상반죽 저분이 아니면, 밥을 먹지 않겠다...”

*소상반죽이란? 눈물 자국같은 무늬가 있는 대나무 젓가락을 말한다

(고대중국 요임금은 지방을 시찰하던중 소상강에 빠져 죽었다

요임금의 딸(공주2)은 후임 순임금의 황후가 되었다.

(2)이 소상강에서 흘린 눈물이 대나무 줄기에 뿌려졌는데,

그 눈물자국이 배여있는 어린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칭한다)

.최고의 명품(소상강 소상반죽)을 서애 류성룡이 가슴에서 꺼내보였다

류겸암(류성룡의 형님, 풍산류씨 겸암파 중시조)은 예지력이 있는

異人(이인)이었는데, 류겸암은 평소 천장에다 소상반죽 젓가락을

매달아 놓았는데, 동생(류성룡)이 명나라 접빈사로 떠날 때 줬다

꼭 필요할 때 긴요하게 사용하거라

.이여송()은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아하! 조선에도 인재가 있구나! 전쟁을 해도 승산이 있겠구나...”

.명나라 군대가 적극적으로 임진왜란에 가담하게 된것이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시절 병조판서를 5번 지냈다고 알고있다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하여 명나라 군대파견을 성공시킨 유공으로

호성일등공신이 되어 오성부원군(鰲城)”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백사(아호)보다 오성대감으로 많이 불렀던 것이다

.이항복은 광해군시대에 인목대비 폐모반대로 북청으로 귀향을 떠난다

 

@수결(手決)은 오늘날 서명~결재~확인절차의 sign(싸인)이다

.수결에 일심(一心)이 많은것은 한마음으로 하늘에 충성을 맹세하고

어떠한 사심도 없다는 뜻으로, 일본과 중국에는 一心決이 없었다

(一心 또는 )자로 대부분 표기하여 위조사건도 많았다

.부패관리의 부당이득, 양반들의 토지매매 할때 인장대신 활용했다

.노비는 글씨를 몰라, 왼손으로 지장을 찍어 길이를 대조했다

수촌(手寸)이라 했으며, 좌측손을 사용해 左寸으로 불렀다

.중세 서양에서 싸인(sign)제도가 유행하였으나,

.조선말기는 도장(인감)을 권위적으로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활용중이다

 

@백사 이항복(선조)은 유능하고 재치가 넘치고 효율성을 중요시했다

.백사가 결제한 문서에 문제가 생겨, 책임소재를 조사중이었다

.백사가 결백을 주장하자, 수결을 대조 하였는데...가짜로 판명되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수결(자형) 양쪽에 흠집을 표시를 해둔것이다

.누명을 벗은 이후로 즉시 수결표시를 바꾼것이다

*당신의 sign(싸인), 서명이 궁금합니다

 

 

 

우당 이회영(독립운동가)

@부친 이유승(고종, 이조판서, 백사 이항복의 10대손)

.62(아들: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집터: 명동 명례방 저동(YMCA건물과 뒤편 주차장)

.명동성당 정면 우측에 150년수령 은행나무는 부친이 심었다고 한다

.1905,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가장 호방했던 이회영은 이동녕, 이상설과 함께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당시 외부교섭부장(동생; 성재 이시영)은 즉각 사직하여

三韓甲族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을 준비하는

무력 항쟁기지 설립을 염두하여 형제를 설득하였다

 

@만주에 전초기지 설립과 비밀조직을 결성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만주(용정)를 방문하였다

.서전의숙 학교를 설립하고 귀국하였다(현지 조선족의 학교)

.1907, 신민회(비밀조직)를 결성하였다

상동감리교회 지하실에서 모였으며(양기탁, 전덕기 목사, 이동녕)

집안 노비들을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전격 해방시킨다

이후, 노비가 아닌 일꾼으로써 봉록을 지불한 것이다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

.대궐 내시(안호영)와 내통하여 고종황제와 교감을 유지하였다

.헤이그 밀사 신임장을 몰래 받아냈다(국제만국 평화회의)

.이회영은 상동감리교회 지하에서 이준 열사에게 전달하면서

간도(서전의숙) 이상설에게 전달케 하였으며,

통역관 이위종과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하여

네덜란드 헤이그로 잠입한 것이다

*효창공원 四儀士(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백범 김구

 

@1920, 만주로 망명(가족:60. 마차:12. 혹한의 엄동설한)

.6형제의 재산정리로 40만냥을 확보하였다(현시세, 600억원)

서울역 역사 건축비가 180만냥 투입되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가문의 색깔은 소론으로 노론과 남인의 중간수준으로 보인다

.조상들의 위패(位土)와 제사도구를 땅에 묻었다

나라가 망했는데 제사를 지내서 뭐하겠느냐?”

.(명동YMCA건물)23세 연하, 육당 최남선(1890~1957)에게

헐값으로 넘기면서 가문의 古書등을 모두 인계하였다

.자금의 대부분은 귤산 이유원의 재산을 정리하여 조달을 하였다

.두만강 도섭시 뱃사공에게 품삸을 2(20)을 지불하면서 당부했다

돈없는 독립운동가를 만나거든, 무료 승선을 해주시오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실향민의 터전,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에 정착한다

*은양보(삼원보 인근)耕學社(경학사)를 설립하였다

3원칙: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하고(), 공부하고(), 무장한다()

만주거주 민족의 교민 자치기관 겸 항일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귤산 이유원의 적극적인 자금조달

.이유원(우당의 방계 숙부)은 고종의 영의정을 지낸바 있으며,

.1882, 강제 제물포조약 대표로 참석(일본: 하나부사 요시모토)

.과거급제(헌종7), 의주 부윤, 함경도 관찰사, 명상(철종~명성황후)..

.귤산은 뛰어난 학문과 재력가(토지, 재산)로 대원군에게 미움받아

세도정치 기간에는 수원 유수로 좌천된 바 있다

.한양~양주길(80)에 귤산 본인의 땅을 밟고 올수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높은 식견으로 大典會通법전 편찬사업을 추진하였다

.민승호(민비의 오빠)와 함께 반대원군파로 활약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귤산의 외아들은 천연두로 일찍 죽고난뒤,

유승공의 아들이며 이회영의 친형(이석영)에게 유산을 상속하였다

 

@신흥무관학교(1912년 설립~1930년 폐교시까지 독립군 3500명 양성)

.학교(만주 삼원보)는 천연 요새지역이다

.校主(둘째 이석영), 校長(이상룡, 안동출신),

敎授(이동녕, 윤기섭, 이관직, 여준...)

.학비, 숙식비등 일체 무료로써 우당 이회영의 재산으로 운영하였다

.1회 졸업: 변영태, 김훈, 김도태, 이범석, 오광선, 이규학(우당의 )...

이규학의 (이종찬 국정원장)

.김산도(아리랑 저자), 김좌진(청산리 전투), 홍범도(봉오동 전투)...

 

@고종황제의 망명 계획이 무산되다

.우당 이회영의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 망명계획을 기획하였다

.이교영(고종의 시종), 조정구(대원군의 사위), 조남승(조정구의 )

통하여 고종에게 의사전달이 되어 승낙을 받았다

.민영달이 마련한 자금이 조정구를 통하여 이회영에게 전달되어

우당은 북경에 고종의 집무실을 마련하고, 조정구가 관리토록

진행하던중에 고종이 승하하였다(1919)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황제에서 물러났으며, 망명 미수사건으로

고종이 독살을 당한것이다

 

@혼맥으로 공종황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다

.이회영은 조대비의 딸을 며느리로 맞은 혼맥으로 고종과 밀접하였다

.대원군은 조대비를 견제하느라 며느리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찜찜했던 대원군은 조대비 집안의 사위(조정구)를 맞게된다

대원군의 유일한 딸의 남편이 노론의 조정구 대감이다

조정구의 아들(조남승, 조남익: 양주목사), (조계진)을 두었다

고종황제 행렬가마 앞을 지나갈 정도로 조남익은 당시 대단했다

.우당 이회영은 조남승을 활용하여 고종과 교감을 통하였다

결국, 조계진(조정구의 딸)과 아들(이규학)과 혼인으로

소론출신과 노론출신의 혼맥이 형성 된것이다

조계진은 창신동에서 재봉틀 삸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는등

험난한 고생길로 접어든 것이다

 

@우당의 최후

.독립자금이 바닦난 후기에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린다

.석파란을 그려 중국인에게 팔아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유지하였고

.퉁소(대금)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우당의 사상의 종착역은 아나키스트(독립운동 내부를 혹독하게 비판)

흥사단의 務實力行을 비판하였다

흥사단의 잘못으로 독립운동가의 이탈, 투항자가 속출했던 것이다

.훗날,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순직)하여 인생을 마감한다

 

@성재 이시영은 행동파, 이상주의자(논리적, 현실주의적 성향)

.17, 式年鑑試(식년감시)에 급제하여 정치입문을 한다

.19, 형조좌랑

.25, 사헌부, 사간원을 거쳐 법관으로 급성장하지만,

.1905, 외무부 교섭국장(실무자)으로 을사조약을 반대하였다

.당시, 외교부 대신 박제순과 이완용이 을사조약을 추진하던 시기로써

을사조약을 맺는 마지막 어전회의장은 일본군의 포위로 접근조차

어렵워 사직하였으나, 고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최초 학교가 평안도에서 출발한 것도 성재 이시영의 치적인 셈이다

.훗날, 형제들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1945(해방), 망명당시 60여명의 형제중에서 혼자 살아온것이다

.부통령으로 등용되어 신흥학교(, 경희대학교)를 설립하여

신흥무관학교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월남 이상재의 충고를 기억해야 할것이다

해방되면 우당 집안의 재산은 국가에서 되돌려줘야 한다

 

@우당기념관(종로 신교동, 농아학교앞)

.1984, 우당장학회 설립한 이유는 우당지론 때문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1600여개 장학 재단중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 후손을 돕고있다

학생 1,299명에게 31000만원을 지급하였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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