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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상공회, 종로산악연맹(종로구 등산연합회)

2012-1118.종로상공회 속리산(문장대)

by 조흥식 2023. 1. 2.

2012-1118.종로상공회 속리산(문장대 1054m) 

*宗法과 종손

 

 

 

宗法과 맏며느리 烈傳

@제와 제사, 양자제도의 성행, 동족 부락과 문중 형성,

   .족보 편찬등 가족과 친족의 제도와 관습이 시행된것이다

 

@종법이란 무엇인가?

.宗法宗家를 중심으로여러 방계 친족들을 결속시키는

   친족 편제및 가계 계승의 원리이다

.宗法의 핵심은 宗子(적장자)가 가계를 계승하며

   祭祀를 지내는 장자 상속제를 말한다

.bc1200년경, 나라 왕실 종묘제사에서 시작되어

   春秋時代~戰國時代를 거쳐 고전적 예제로 정착하게 되었다

.禮記, 儀禮등 유교 경전에 성문화되어 표준이 만들어졌다

 

@禮記, 大典에 기록된 宗法이란?

.別子가 되고, 別子를 계승하는 자가 이 된다

   아버지를 계승하는 자는 小宗이다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이 있고, 5세가 되면 옮기는 이 있다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別子의 후손으로 別子出系,

   그 집의 대를 이음한 자를 계승하여 으로 삼아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다

.고조부를 계승하여 으로 삼는 경우에는 5세가 되면 옮기는 것이다

 

@제후()의 적장자를 제외한 아들은 別子라 칭한다

.별장자는 제후를 계승하고,

.別子는 각각 새로운 하나의 을 이루어 始祖로써 大宗이 된다

   別子의 적장자는 大宗을 계승하고,

   別子의 중자는 다시 별도의 을 이루는데 小宗이 된다

.大宗은 백세토록 변함이 없지만,

   小宗5세가 되면 친족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大宗은 백세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고 유지하지만

   小宗5세가 되면 신주를 옮긴다

 

@고대 종법은 나라~나라를 거쳐 왕실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나라는 왕실을 벗어나 사대부 계층으로 확장된다

.사대부는 경제기반을 갖추고 사회지배 계층으로 성리학적 학문체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질서의 규범을 수립해 나간다

.동고조친족집단을 근간으로 별자중심의 고전적 大宗대신에

   사대부의 同高組(동고조)이하 친족범위로 小宗을 중심으로 하였다

.남송시대 주희(1130~1200)의 주자가례에 반영된다

 

@중국의 종법은 삼국시대 초기에 전래되었다

.중국의 유교경전과 고전적 종법관념이 도입되면서

   왕실을 중심으로 宗廟가 설치되고 五廟制가 운영되었다

.고려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朱子家禮가 전파되고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小宗중심의 宗法이 수용된다

.공양왕(2), 주자가례에 의한 사대부가제의를 반포하여

   宗子祭祀 주관과 가묘의 건립을 권고하게 되었다

.조선은 유교이념으로 宗法의 사대부 양반계층에 널리 보급되면서

   사대부의 가계 계승과 재산 상속의 기본원리로 자리잡는다

.조선후기, 가묘

 

@禮記(예기)에는 宗孫支孫(지손)은 하늘과 땅 차이로 구분하였다

.支孫(지손)宗孫보다 하고 부유해져도 절대로 티를 낼수없었다

.지손이 좋은 수레가 있어도 종가에 들어가려면,

   좋은 수레를 먼곳에서 하차하여 단출하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종손의 권위를 한껏 높여준 것이다

   침해된 가능성이 높을수록 권위를 더 높여줘야 했다

.지손들이 종손을 넘보는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지손이 부자, 고위관직, 질투의 대상이 될수도 있을법하다

.종옥(종손)은 과거에 여러번 낙방하고 포기하였는데,

제사지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노상추도 10년만에 과거급제를 하면서 가사를 탕진하였으니까...

 

 

宗孫이란 祭祀의 주체자를 말한다

@노상추(1746~1829)宗孫(노종옥)과 끝내 불화했다

.말년에 종옥과 마주하면 毒蛇가 앞에 앉아 있는것 같다

.종옥은 노상추의 맏형의 孫子이기에 집안의 宗孫이었다

   정월에는 아프다며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칠월에는 전염병이 돌아 깨끗하지 않다며 제사를 안지냈다

   지난 겨울에는 흉년이라 핑계를 댄 것이 불만이었다

.얼마후 종손은 제사답 문서를 탈취하여 팔아버린 것이다

   제사답은 萬世不易之田(만세불역지전)으로 절대 팔아선 안된다

.1811(순조11), 노상추는 가덕 첨사로 임명되었을때(66)

   집을 비운사이 종옥(宗孫)과 종옥의 숙부(기엽)

   노상추의 집에 처들어와 토지문서를 정리해야 한다면서

   노상추의 아들(익엽)에게 땅문서를 가져오라고 시킨것이다

   당시 자물쇠로 잠겨있자, 익엽은 호통을 친것이다

   이때 익엽(노상추의 아들)열쇠는 부친께서 보관하신다

.종옥이 휴대했던 예비열쇠를 맞춰보니 문서고가 열린것이다

   買食(매식), 땅을 팔아서라도 먹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노상추는 종옥(종손)을 몹쓸 종손이라 했다

 

@노상추는 종옥~종옥의 부친(정엽)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노상추가 보기에는 큰형(정엽)이 종손으로 제사를 소홀했기 때문이다

.맏형님이 어린 정엽을 남긴채 일찍 죽었는데,

   맏형수(28)는 청상과부나 다름없어 매사에 의욕이 없었으며

   宗婦의 의미를 염두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64세까지 친정을 가까이 하면서 40년간 독수공방하였으니

   종가는 썰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엽은 출세하지도 못했다

.노상추의 아들은 무과급제후 흥덕현감을 지냈으니 종가와 대조적으로

  종손은 자기집안을 계속 헐뜯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정엽이는 노상추와 이들(익엽)이 늘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종손과 지손의 갈등이었는데, 종가의 무능함 때문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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