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5. 한국라이온스 60주년 행사준비(장충체육관, 의전위원장, 청룡LC회장)
우계 성혼(64세)
우계 성혼(64세)
동국 18대 명현(문묘 배향): 성균관, 향교
*신라: 설총, 최치원
*고려: 안향, 정몽주
*조선1(6명):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조선2(8명):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서계 박세채
문묘, 시대적 배경
*조건: 정치적 재야지도자의 지지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
학문적 권위와 추종자없이 문묘배양이 사실상 불가능
*西人: 이이, 조헌, 성혼(이이,조헌: 老論의 추앙, 성혼: 小論의 추앙),송익필
*小論: 박세채
*老論: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南人들이 문묘 종사를 반대)
*南人: 18현에 없는 이유
정국 주도권이 없어, 숙종시대 잠시 집권했던 약한 세력
유형원, 이익, 이가환, 이중환, 채제공, 정약용
체제 개혁적인 實學 중심(朱子學 비판)과 천주교 관련으로 밀려
송강 정철의 생일파티 초청받아(율곡, 성혼)
*대문에 들어섰을 때 분위기가 풍악소리, 기생들이 흥을 돋구었다
우계 성혼은 안색이 변하여 몸이 굳어 되돌아선다
“저 기녀들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온당치가 않다”
*율곡이 성혼의 소매를 붙들며 만류하였는데,
“검은물을 들여도 물들지 않는 것이 선비의 태도이다”
論語(상황이 어떠해도 반듯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으면 되는게 아닌가?)
*서로 대조적인 성품
성혼: 대단히 규범적인 삶을 살아온 흔적일 엿볼수있다
율곡: 때로는 탈규범적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인 진리(가치)가 어디있느냐에
따르는 초점에 맞춘 삶을 살았다고 해석할수 있다
성혼, 율곡 우정(바늘과 실)
*바늘과 실(숙종시대 동시에 문묘종사에 배향), 東人의 모함과 비난
*선조의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 “나도 성혼과 이이의 黨에 들어가고 싶다”
선조의 만류를 뿌리쳐(벼슬을 떠나는 율곡, 벼슬을 사양하는 성혼)
*파주3걸, 인근 거주했던 학우이자 친구(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
*후원자가 사망이후(율곡 이이, 영의정 박순), 西人 세력이 급속하게 약화
東人: 三司 장악(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성혼(외톨이 신세), 율곡 이이(사망)에 대한 東人의 집중공격이 시작된다
우계 성혼의 우계정사(파주)
*위대한 학자, 교육자, 선비(병치레, 가난, 종이 옷,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
*이기설(주리주기설, 이기일발설 주장), 기호유학의 독자적 학문을 개척
*안향, 정몽주의 정통성리학을 이어받아 조선유학의 道統(도통)을 계승
*파주 우계정사에서 후생양성을 위한 교육, 시 작품 남겨
학문은 사위 윤황(1571~1639)을 거쳐 小論의 실용적 유학으로 계승
선조의 벼슬 수십번 거절하고, 파주 오두막집 우계(牛溪, 쇠내)
성혼, 정치적 위기(임진왜란)
*율곡 이이(병조판서), 실수로 공격당하자 구원자 역할을 한다
당시 구설수 “東人은 성혼이 西人들과 작당하여 권력농단을 한다”
*정여립 모반사건, 최경영(경상도 처사, 조식 제자)이 연루되어 옥사,
당시, 성혼은 위관 송강 정철(1535~1593, 우의정)과 절친이었는데,
東人들은 성혼이 정철에게 구명운동을 하지않아 최경영이 죽었다면서
공격했지만, 성혼은 직접 편지를 정철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성혼은 아들을 보내 직접 위로하였으나, 당시 성혼은 실권이 없었으며
최영경이 허무하게 병사하리라 예상을 하지못한게 사실이다
그러나, 東人들은 “성혼이 최영경을 죽였다”며 비난의 화살은 거셌다
*임진왜란, 선조가 의주 피난길에 성혼이 배알하지 않아 섭섭하여 오해한다
임진나루터에서 이홍로에게 선조의 질문 “성혼의 집이 어데냐?”
옆동네를 가르키며 거짓으로 대답하여 불충신하가 된다 “저곳에 산다”
실제 임진나루에서 20리 거주, 선조가 피신(파천) 상황을 전혀 몰랐었다
*험악한 비판과 모함으로 고통을 감래(임진왜란 초기)
선조, 세자(광해군)의 부름으로 호종(늙고 병들어 허약한 뼈대를 극복)
호종하면서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추위와 굶주림, 병마의 고통
*이정암을 충신이라 선조에게 상소(명나라가 일본과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선조는 명나라가 일본과 강화를 맺는 것을 반대하며, 적극 전투를 요구
성혼이 강화를 찬성하는 듯한 태도에 선조가 크게 화를 내며 꾸짖는다
*선조의 결정적인 섭섭했던 이유는
마치 성혼이 세자(광해군)에게 선위(禪位)하기를 기대했다는 뜬소문인데,
사실은 성혼과 西人의 정치적 태도는 개혁에 소극적인 선조에 대한 실망,
광해군의 집권을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럴수록, 선조는 광해군에 대한 미움이 증가된다
*성혼과 선조간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여 귀향한다
일본과 명나라간 강화로 휴전되어, 가족들을 평안도와 황해도에 남겨둔채
홀로 고향 파주로 귀향하였으나 가옥은 불타 없어지고,
사찰에서 음식동냥으로 비참한 생계로 버티다가 64세에 죽는다
성혼, 정치행적(끓임없는 상소)
*말년에 선조의 사랑을 잃고 미움, 율곡의 개혁운동에 큰 보탬을 준다
*율곡과 함께 선조를 聖君으로 만들기 위하여 힘을 다하였고
나라와 백성의 안정을 위한 노력한다
*更張(경장)을 촉구하는 萬言封事(만언봉사)를 수차례 올리고,
革弊都監(혁패도감) 기구 설치와 과감한 개혁을 요청한다
성혼, 문묘배향 과정
*성혼, 율곡의 후생이 많고 탄탄하여 문묘배향에 어려움은 없었다
*東人(훗날 北人, 南人)은 2명이 받았던 모함과 선조의 성혼에 대한
관직박탈을 문제삼아 문묘종사를 계속 반대하지만,
성혼을 찬성하는 여론은 깨끗한 선비의 표상이며 조선 道學의 正統을
계승한 인물이라며 주장하며 찬성운동을 펼친다
*100년후, 西人이 독자적으로 집권한 숙종8년(1682년)에서야
배향된 이유는 “치열한 당쟁 때문이었다” 라며 평가한다
*7년후, 南人이 집권후 문묘에서 퇴출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지만,
*5년후, 西人이 재집권하면서 문묘에 復享(복향)된다
성혼의 흔적
*성균관(성균관대학교) 대성전(문묘)에 성혼의 위패가 있으며
자운서원(파주 법원읍 동문리)에서 제사를 모시고
*파주 파평면 눌노리 쇠내(牛溪)에는 파산서원에 모시는 우계 성혼,
성수침(부친), 스승(백인걸), 성혼의 집터와 우계서실 터가 남아있다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실과 바늘)
*성혼, 율곡: 파주(고향)에서 30년간 교우, 선조시대 붕당갈등에 시달려
성균관 문묘(공자의 제사 지내는 곳)에 동시배향으로 선비사회의 사표
牛栗(우율), 우율학파로 불리며 학자의 쌍벽을 이룬다
*성리학의 가르침으로 堯舜시대의 이상사회를 꿈꾸며
백성들이 편안하고 도덕이 꽃피는 나라를 위하여 노력한다
선조에게 경장의 필요성을 역설후, 관철되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낙향
*율곡은 20대 과거급제후 엘리트 코스 정청요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동호문답(1569년), 만언봉사(1574, 1585년), 성학집요(1575년)을 저술
선조에게 바쳐 경연때마다 성인을 본받아 경장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조선이 망할것이라고 압박하였으나, 임진왜란의 참변을 초래한다
특히, 현자를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 민생안정을 위해 공납제도를 개선,
경장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임시기구(경제사)를 설치를 건의
이때, 성혼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성혼은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미응시, 오직 학문과 교육분야에 전념한다
학행으로 천거되어(34세) 여러번의 벼슬을 거절하다가,
47세(선조14년, 1581), 종묘서령(종5품)~첨정(종4품) 선조를 처음 만나
경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실행하는 임시기구(혁폐도감)의 설치를 건의,
선조는 율곡과 생각이 같다고 반응하였다
율곡은 10월에 경제사 설치를 건의하고,
성혼은 4월에 혁폐도감 설치 건의한다
성혼은 선조를 만나기 전에 율곡에게 자문을 구하여 생각이 같았으며,
율곡은 선조에게 성혼의 천거를 배후에서 도와준다
*성혼(48세, 1583년), 율곡을 변호하면서 항변한다
율곡이 정초부터 년말까지 탄핵에 시달리자, 목숨을 걸고 조정에 나온다
“변무(辨誣)” 무고당한 것을 해명하는 작업(율곡지키기)을 실행하여
주변의 공격을 차단하고 오해받은 부분을 풀어준다
주변에서 “율곡이 먼저 죽은게 행운이다” 라며
“성혼이 먼저 죽었더라면 율곡에 대하여 해명할 자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율곡의 정치적 위기에 장문의 상소로써 적극 변명하여 구원한다
병조판서 율곡의 말년(선조16년, 1583년), 니탕개 여진족(2만명)이
함경도를 침입시 임금의 재가없이 군마를 바치는 군병에게 전쟁에 투입을
면제해준 사건에 대하여 東人들이 강력한 상소로 탄핵하였다
“무군오국(無君誤國),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쳤다”
이때부터 東人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어 율곡과 함께 묶어 공격을 당한다
*성혼은 교육분야에서는 후학을 가르키는 학교에 율곡보다 앞서나간다
牛溪서실(우계정사)이 율곡의 隱屛정사(은병)보다 앞서 설치하였고,
학생 교육지침 僞學之方(성혼, 위학지방)이 擊蒙要訣(율곡, 격몽요결)
보다 수년 먼저 편찬한바 있다
*율곡이 죽은뒤 西人세력이 약화되고, 東人세력이 커지면서
성혼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어 큰 고초를 겪기 시작한다
율곡이 죽은후, 1년간 고기반찬을 먹지 않고 “율곡은 나의 스승이다”
성혼과 율곡, 두터운 친교관계
*성혼은 죽기전까지, 율곡의 제자들과 함께 율곡의 문집을 편찬하지만,
큰틀을 잡아 결정적 역할후, 편집을 완성하지 못하고 성혼도 죽는다
*성혼은 율곡에 대한 극존칭으로 존선선생(尊先)이라 호칭하면서
늘 율곡과 자신이 일심동체임을 강조하였다
“살아서는 율곡과 생사를 같이하고, 죽어서는 함께 열전에 오르겠다”
*훗날 100년후, 문묘배향도 함께 되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혼, 성장환경, 가문, 학풍의 평가
*종로 순화방(순화동) 태생, 겸재 정선 “인왕청송도(기와집)”
*부친(청송 성수침)은 조광조의 수제자로써 부친따라 낙향한다(10세)
스승(정암 조광조)가 기묘사화 충격으로 낙향후 은거(파주 파평 눌노리)
“나는 평생 벼슬하지 않겠다, 은거하겠다”
*부친(성수침)은 친구 휴암 백인걸을 성혼의 스승으로 모신다
“아들(우계 성혼, 성문준), 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
*1551년, 생원, 진사양장초시 합격후 복시(2차시험) 응시거절, 학문연구
율곡이 천거, 선조의 부름에 거절(사양)하며 평생 도학자의 길을 걷는다
*창년성씨 성삼문(死六臣): 1456년, 단종복위 운동에 수양대군의 철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이개”
*학문의 승계는 사위(윤황)을 거쳐 윤선거, 윤증으로 이어진다
결국, 小論 학문의 종장으로 추앙되어 조선후기 사상사에 위상을 높인다
*훗날 율곡, 성혼의 후생은 老論과 小論으로 분리되는데
율곡은 老論학풍에 가깝고, 성혼은 小論학풍에 가깝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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