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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로타리클럽(국제로타리 3640지구)

2019-0417.한미로타리클럽 4월 정기봉사

by 조흥식 2023. 10. 2.

2019-0417.한미로타리클럽 4월 정기봉사(영등포역 천사무료급식소)

경남 의령군 지산면 명문가(GS허씨, LG구씨, 삼성 이병철가문)

 

 

 

 

 

경남 의령군 지산면 명문가(GS허씨, LG구씨, 삼성 이병철)

@김완철은 4년전부터 환자로써 에덴요양원(남양주 수동리)에 입원하여

.주변 암환자에게 생명의 희망을 불어넣는 기부의 천사이다

.김완철은 돈보다 정신적 승리감, 자신감, 기쁨을 주고있다

.음악 재능기부자들을 초청하여 환우들의 마음을 치유시키고

.기쁨을 선사하는 저명인들을 모시고 희만을 잃지않도록 하고있다

.취미로 익혀둔 사진기술을 발휘하여 환우들의 서화전을 열었다

 

@최근에는 KBS에 집중 취재되어 방영되었다(2012,1)

.존경하는 챨리킴(김완철 기부 천사)을 위하여 우리는 뭘해야 하는가?

.부끄럽고, 나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다

.양반의 조건은 으뜸은 "을 베풀어야 한다"

.財多身弱: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진다

.명당을 차지해도 덕을 베풀지 않으면, 복이 찿아오지 않는다

.부자들은 생색나지 않는 기부는 하지않는다

.존경받는 기부의 천사 김완철은 지금도 쉬지않고 봉사를 꿈꾼다

.힌떡 실타레처럼 건강회복도 술술 풀리기를 바랄뿐이다

 

 

@미국 부자(카네기~락펠러)는 왜 존경을 받는가?

1.앤드루 카네기(미국의 철강왕 신이 내린 부자”)1919년에 죽었다

.스코틀랜드 출생, 14살에 이민, 철도사업으로 큰부자가 되었다

.1901, 철강업 US스틸회사는 미국시장의 65%를 독차지했다

.좌우명은 부자인체 죽는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35천만 달러중 90%를 기부, 2500개의 도서관을 환원하였다

.그래서 카네기홀은 성스러운 회의장(시민회관),공연장이다

 

2.락 펠러도 이에 감동받아 기부재단을 세웠다

.4년제 대학교(12)+교회(5000)를 국민들에게 헌납하였다

.쇼크라테스+카네기가 죽은뒤 빈손을 관밖으로 내밀어 공개한다

나는 이렇게 빈손으로 죽는다를 보여준 것이다

 

 

격변기에 살아남은 가문(여순반란사건, 빨치산, 동학전쟁)

 

1.경주 최부자(南人출신)는 왜 존경받는가?

.富不三代(12~400년간 유지비결)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은 하지말라(9대 진사를 배출)

.재산을 10000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300년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3000가마중에서 손님접대에 1000가마를 소모했다

.물건 구입할 때 물건 값(애누리)을 깍지 않았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쌀독을 대문밖에 비치하라

*인촌 김성수(고려대 인수)의 충고에 최부자는 영남학원에 기부한다

 

@최부자집 六然

.自處超然(자처초연):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라

.對人靄然(대인애연):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라

.無事澄然(무사징연): 일이 없을 때에도 맑게 지내라

.得意淡然(득의담연): 뜻을 얻었으면 대담하게 행동하라

.失意泰然(실의태연): 실의에 빠졌어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有事敢然(유사감연):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라

 

 

2.여수 봉소당: 만석꾼(여순반란사건을 어떻게 피했는가?)

.반란군 대장에게 불려가자 두목이 신문만 보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보초를 모두 내보내고 홀로 독대했지만, 종의 큰아들이 두목이었다

.20분간 말이 없어, 도주하라는 신호로 직감하고 2층에서 뛰어 도주한다

.두목 부모(소작농민)는 소작료를 내지 못했을때, 하역을 시켜 봐줬다

.여순반란, 머슴 아들이 완장을 차고 나타나자 아들이 말해형 밥 먹어

주인아들(7)이 평소 종의 아들에게 형으로 호칭했었다

.28평 집안(“자 항렬 후손 28명이 일본유학): 현재 학교운영(3)

.용서대, 서대요리(쫄이요리)

.지금도 재래시장을 지나는데 30분을 소요된다

(시장 상인들과 인사, 악수, 덕담...자신을 나추는 겸손함)

 

 

3.명제 윤증(숙종 1629~1714), 논산 고택이 살아남았던 이유?

.숙종이 우의정을 제의해도 관직을 거절한다

.충청도 3대가문(명제 윤중~우암 송시열~연산 사계 김장생)

.양잠(. 누애집안)을 하지못하게 서민들의 일상을 빼앗지 말라

최근 SNS 대형 슈퍼마켓의 반성이 절실하다

.미군의 폭격을 만류했다(종택을 북괴군이 지휘부로 사용)

.논산 박희동이 공군폭격기 편대에 근무하면서 미군을 만류했다

.그는 중국에 불시착으로 연못에 피신하여 살아남았다

.해방이후 낙향, 농사를 지었는데...6.25 공군에 복직하였다

.육칸대청이란? 큰집(대청이 6)보다 큰 8칸 대청집이다

 

 

4.구례 운조루가 아직까지 존재한 이유?

*南韓 3吉地, 99칸 유이주: 낙안부사(안동출신)

.부귀형: 금환낙지형(金環落地形): 형제봉에서 금반지를 떨어트린 지세

.아랫목: 오보교취(五寶交聚): 5가지 보석이 모여있는 지세

.웃목: 금구몰니(金龜沒尼): 금거북이 진흙속으로 들어가는 지세

.현 종가후손은 강도 침입(2)으로 망치로 맞아 부상(불구)

.빨치산 머슴출신 김지회(300석 부자)가 방화, 처형을 반대

.평소 쌀독(2되씩)으로 선량을 베푼 덕으로 살아남았다

.태몽: 도화살 인기몰이(오세훈: 복숭아~고현정: 복숭아)

 

5.)국방장관 이상훈(, 재향군인회장)의 할머니는 누구인가?

.충남 청원의 명문가로써 동네 텃논, 텃밭은 일체 사들이지 않았다

., 말들이 풀을 뜯어먹으면, 마을주민과 언쟁을 우려한것이다

.증조모(여장부)는 아침마다 거지에게 밥상을 차려준것이다

동냥꾼이 놋그릇을 가져가자 고함을 쳤다 뚜껑도 가져가라

 

6.유일한 박사(1895~1971), 왜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을까?

@유한양행(1926~, 유한 캠벌리, 대방동): 전 대표(문극현 의원)

.(유재라): 재단이사장(경영참여 제외)에게 조건부 유산을 물려준다

(유한 중, 고교안의 땅 5000평에 유한공원, 울타리를 치지말라)

1991, 유언대로 200억원(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

.아들(유일선): 스스로 독립하라

.손자(유일림): 학비 1만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

 

@전 직원의 주주화+전 재산의 사회환원(기업의 사회적 공헌)

.전문 선진 경영체제 도입 CEO

.초대 상공회의소 소장해임후 미국출국(이승만 정부)

부산 수영만 비행장 도착직후, 출국시킨다

.세무조사: 정치자금 제공을 거부(괘씸죄), 미운오리새끼

.납세을 미리 납부(3): 약속을 어긴 경리담당을 처벌한다

.제자의 만주에서 마약장사를 혼내...

.제약~교육사업, 회사~재단의 분류, 민족운동가, 교육가

*경남 의령 지수면의 GS그룹의 허씨 가문의 덕을 배워야 한다

 

7.지수면은 한국갑부들을 탄생시킨 명당이다(삼성, GS, LG, 효성)

@승산리에 입향한 허씨들은 약 5백년의 터줏대감인 것이다

.허씨 가문이 만석꾼이 된 시기는 구한말의 지신정 허준 때부터다

.의병활동을 하던 면암 최익현이 지신정을 방문했다고 전해지는데,

.경상도이지만 허씨 집안은 역대로 노론(老論)이고,

부자였기 때문에 최익현이 의병 자금을 부탁하러 온듯하다.

.이 시기부터 허씨들은 의장답(義莊沓)을 운영하였다

.의장답이란? 공공사업을 위하여 허씨들이 사유재산을 출연해 조성한

땅으로 흉년이 들면 구휼하고, 공공사업, 장학금 등에 이 돈을 썼다.

 

@지신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효주 허만정의 후손이 특히 번창하였다.

.허만정은 만석꾼의 아들이었지만, 항일 감정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우선 독립운동 단체인 백산상회에 거금을 투자했다.

말이 투자지? 사실 독립운동을 위해서 돈을 기부한 셈이다.

.백산상회는 경주 최부자, 옆동네인 의령출신의 백산 안희제,

지수면의 허만정이 주도적으로 돈을 내고 운영한 상회로써,

허만정은 일경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독립 자금을 댔다.

 

@허만정은 진주에 남자 고등학교를 세우려고 부지도 이미 매입했지만

.일제가 학교 설립 허가를 거부하였다.

.독립운동가를 양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때문에 할수없이 여학교를

웠는데, 지금의 진주여고로써 오늘날 공립학교로 되었지만,

.원래는 허만정이 돈을 출연해 설립한 학교였다가 해방후 허씨 후손들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공립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하층민인 백정의 신분해방운동 형평사 운동에 허만정이 돈을댔다.

만석꾼 아들이 백정 운동을 도와줬다고 해서 당시 화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남해대교 밑에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충렬사가 있었는데,

.이 충렬사를 중수할때 허만정이 돈을 기부하였다.

.혹시 일경의 추적을 피하기위해 허만정은 중수기에서 이름의 끝자인

자 위에 갓머리를 씌운 자로 바꿔 써서 이름을 남겼다.

 

@허만정이 1920년대에 지은 자신의 집이 현재 이 고택이다.

.미음() 자 형태로 된 한옥으로 본채는 5, 사랑채는 4칸이다.

.안사랑채 맞은편에 곳간채가 있는 그리 큰 집은 아니다.

.보통 몇백석하는 동네 부자가 살만한 크기의 집으로, 만석꾼의 집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박한 규모다.

.재목으로 최고급 홍송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송진이 조금씩 배어 나온다.

.정지(부엌)에는 손님 접대하느라 매일같이 소다리가 걸려 있었다

.특히 생선인 대구탕을 많이 해서 접대하였다.

대구는 트럭으로 들여올 정도로 많이 소비하였다.

.경남 남자들이 술마신 다음날 가장 시원하게 먹는 대구탕이다

.밥상 모양의 안산이 앞에 바라다보이고,

.대문 앞으로는 실개천이 내당수(內堂水)기능을 하면서 흘러가는 집에서

.허만정은 형평사 운동, 백산상회, 진주여고 설립하였다

 

@첫째 허정구, 둘째 허학구, 셋째 허준구, 넷째 허신구, 다섯째 허완구...

.2째 허준구: 일찍 죽은 숙부 허만옥(허만정의 동생)의 양자로 들어갔다

.허준구의 아들이 바로 허창수, 허정수, 허진수, 허명수, 허태수인데,

장남 허창수는 현재 GS그룹의 회장이고,

GS칼텍스 회장을 맡고 있는 허동수는 첫째인 허정구의 차남이다

.어떻게 보면 GS그룹은 허씨 집안 전체가 운영하는 가업이다.

집단 지도 체제라고나 할까?

.회장 1인 소유라기보다는 집안이 공동으로 운영하는데,

회장은 잠깐 그 직책을 맡아서 하는 것이다(유교적 자본주의)

 

@허만정의 부친 허준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신정(止愼亭)이라 이름

.붙인 아름다운 정자인데, 허씨 집안의 개인 쉼터이자,

.손님 접대 공간으로 사랑채와 본채를 잇는 통로가 있다

.허씨 집안 사람으로서 이 집 관리는 허성호씨가 하고있다

.이 동네는 6.25 때에도 인명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주들이 많은 부자동네에서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데, 평소에 쌓아놓은 적선이 없으면

난리가 터졌을 때, 그 피해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해방 직후에 당시 親日的이던 지수 면장을 죽이려고 동네 청년 30명이 죽창을 들고 왔을 때,

이를 안 허만정이 그 청년들을 가로막아선 일화도 전해진다.

면장을 죽이려거든 나 먼저 죽이고 가라라며 큰 소리로 외쳤는데,

.분개한 동네청년들이 항일에 앞장선 어른인 허만정을 모를리 없었다

.허만정의 기개 덕에 면장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해방이후 지리산에는 북으로 가지못한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지리산과 가까운 지수면에도 우익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빨치산 선발대가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빨치산 의령대장이 함안 조씨였다고 하는데, 이 대장 역시 허만정이 나서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지수면에는 살생이 없었다.

.얼마 후, 우익 쪽에서 좌익 인사들을 처단하려고 나섰을 때도 효주공이 우익을 설득하였다.

.효주 공은 출신 성분이 지주 집안인 덕에 우익 인사들도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얼마후 6.25가 발발해 전세가 역전되어 빨치산과 인민군이 합세하여

우익 인사들을 처단하려고 했을 때도, 역시 효주 공이 전면에 나서서 살생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지수면이 이처럼 해방 이후 좌우익의 충돌, 그리고 6.25 살상전에서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격랑의 시기, 허학구는 경기고교를 다녔다.

.아버지인 효주 공과 함께 차남인 허학구가 보인 행적도 이채롭다.

.운동을 많이 해서 힘이 좋았던 허학구는 조선 학생들을 괴롭히던

일본 형사(요시다)를 계동의 골목에서 실컷 두들겨주었다고 한다.

.허학구의 친한 친구이자 이 자리에 같이있던 인물이 박갑동이다

.허학구와 박갑동은 나란히 퇴학을 당한 뒤, 나중에 두 사람 모두 일본 유학을 떠난다

 

@허학구는 메이지대 경제학과를 다녔고, 박갑동은 와세다대를 다녔는데

.허씨 집안 의장답에서 박갑동의 유학 장학금도 댔다고 전해진다.

.해방후에 박갑동은 남로당 박헌영의 비서로 남로당 조직을 거의 총괄하는 직책에 있었고,

.허학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고향 지수면에서 마을 이장을 하였다.

.만석꾼의 아들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허학구가 해방 이후

좌우익의 어떤 공직에도 나가지 않고 이장을 했다는 점은 색다르다

.허학구가 이장을 맡은 시기는 해방 이후부터 6.25 직전까지였다.

.좌우익이 격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항일 의식이 강한 허학구가 이장을

맡음으로써 명분 없는 살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지 싶다.

 

@보도연맹 사건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좌익쪽에 가담한 사람들이 보도연맹인데, 우익에서 어느날 사람들을 모두 불러내서 모두 총살시킬 예정이었다.

.이 낌새를 알아챈 허학구는 보도연맹 연루자들에게 비밀리에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일 자네 나오라고 부르거든 절대 나가지 말게. 나가면 죽을 테니

오늘 밤에 피신하는 게 좋겠네하며 귀뜸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허학구는 1950년대에 부산으로 가서 럭키전자 전무를 지냈다.

.구인회가 사장을 맡고, 허학구가 전무, 구자경이 상무를 하던 시절이다.

.만석꾼이면서도 항일운동에 많은 자금을 대고, 해방 이후 좌우익의 충돌에서도 완충 작용을 하며

.사람들을 살린 허학구. 그의 후손들은 모두 잘되어서 오늘날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 중심이 바로 지수면의 승산리에 있는 효주 허만정 고택이다

 

@허만정의 아들(5): 1허정구, 2허학구, 3허준구, 4허신구,5허완구

.3째아들(허준구)는 허만옥(허만정의 동생, 일찍 사망)의 양자가 되었다

 

@허준구의 아들(허창수, 허정수, 허진수, 허명수, 허태수)

.허준구(3)의 장남은 허창수(GS그룹 회장)

.허정구(1)의 차남은 허동수(GS칼텍스 회장)

.GS그룹은 허씨집안 공동운영(유교적 자본주의)의 표본이다

 

@럭키전자: 사장 구인회(1950년대, 부산)

.허학구(2째 아들)는 전무

.구자경은 상무

.금성전자(현재 LG그룹, 구씨가문)

.럭키화학(현재 GS그룹, 허씨가문)

 

 

성공아카데미 14기 수료식

송년의 밤(2011,12)

원주 뜨락 야외공연장 (2011.7.21)

환우들의 사진전(에덴요양원, 2011,4)

위문차 방문(늘빛사랑 조흥식, 김종수, 김경연,이선일, 유양희)

환우들의 사진전~미니 음악회(2011.8, 마석역:경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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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