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4.종로상공회 용봉산(홍성)
*만해 한용운과 後漢 漢성제
만해 한용운과 後漢 漢성제
@서울 산악연맹 주관 2013년도 설제(2013,2,24)
.충남 홍성 용봉산(381m)을 찿아 설제를 올렸다
.홍성은 충청 명당으로 인근에 덕산온천이 있으며
매죽헌 성삼문(사육신), 백야 김좌진(청산리 전투), 만해 한용운,
최영 장군(고려말)을 배출한 동네이며, 충남도청이 옮겨진 곳이다
@공자 68세, 다음해 아들(백어)이 죽는다(69세)
.그 다음해 안회가 죽는다(41세), 공자보다 30년 연하(70세)
공자가 매우 슬퍼한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안회집에 조문가서 큰소리로 곡을 하였다
“슬픈 마음을 억제하기 위하여 哭(곡)을 한다”
“내가 지금 울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하여 울겠느냐?”
.공자는 조문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으며
일절 음악을 듣거나, 부르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백담사)
@불교인, 문학가, 사상가, 독립투사, 개혁가, 청년정신, 위대한 한국인
.인제 용대리(백담사, 오세암)는 한용운의 마음 안식처이다
.만해마을에는 만해문학 박물관, 시비(전세게 시인 55명의 310여수)
.매년 만해 백일장, 만해 대상(동양의 노벨 평화상) 행사를 준비한다
@만해 한용운(1879~1944)
.1905년: 부친의 사망후 무작정 가출하여 설악산 백담사 입산하여
장작패기, 수행하며 무조건 책을 읽으며 고통을 극복하던중,
.청나라 서적 “영환지략(서계여 작)”을 일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다
인제~한양~원산~블라디보스크(선박)~북경~미국행을 결심했으나
블라디보스크에서 친일파로 오인되어 고통속에 여행이 좌절된다
*일본에서 문명을 배워 조국의 개혁을 결심하였으며,
스승 만화선사(고성 건봉사)에게 본명 “용운”을 부여받는다
.만주 신흥문관학교를 찿았으나 친일파로 오인받아 총상을 입었을때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을 만나, 마취없는 수술을 고집한다
.백담사에 입산후 오세암으로 옮겨 깨달음을 얻는다(39세, 1917년)
*감옥, 파란만장한 역정
.형무소 옥중투쟁 3대원칙: 변호사 거절, 사식 거부, 보석 불가
반성문 요구에 꾸짖어, 똥통을 뒤집는 소동으로 독방에 수감되었다
출소당시(1921년), 동아일보가지의 질문에 발끈하였다
(지옥에 다녀온게 아니라, 극락에 다녀왔다...)
.출소후 성북동 “심우장” 지인들이 처소마련하였는데
북향건물을 고집한 이유는 남쪽에는 조선총독부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딸(3세)에게 “일본글씨(신문) 뭐냐?” 고 질문하였는데,
“그건 몰라도 된다! 그건 글씨가 아니다!...”
*종로에서 육당 최남선과 마주쳤을때 모른체 하였다
최남선은 뒤돌아 달려가 인사를 하면서 “스님, 최남선입니다”
만해는 “내가 알고있던 육당은 이미 죽었다”
이미 변절곡을 육당집에서 외친뒤 나오던 길이었다
*만해 한용운주요업적
.1910년: 불교 대중화를 주장하며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고
불교개혁에 앞장서고, 한일합방후 조선불교, 일본불교의 통합에 반대
.불경번역으로 “불교대전”을 완성하고
.1918년: 유심(불교 잡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1919년: 3.1독립운동 독립선언서에 자신의 생각을 첨부한다(공약3장)
마포경찰서에 연행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3년간 수감된다
.1924년: 불교 청년회 회장 취임~“만당”당수 겸임(독립운동 단체)
.1931년: 잡지 “불교” 창간
순회강연시 승려들에게 일침(가장 더러운것: 똥<시체<스님)
.1926년: “님의 침묵”(47세)
시조 “춘주” 발표
욕심많은 後漢성제
@諸葛亮(제갈량)의 出師表(先帝未嘗不嘆息於桓靈也)
“先帝(유비)께서는 한환제, 한영제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漢나라 쇠망은 한환제, 한영제가 나라를 다스린 20여년 때문이다
*漢영제는 총명한 군주로써(즉위 초기, 12살 소년)
.4년후, 환관세력에 의지하여 궁중의 가장 큰 두태후를 포함하여
두씨집단(竇氏集團)을 소멸시켰고(두태후는 울분속에서 죽는다)
.용렬함 속에 십상시(十常侍)에게 눈과 귀가 가려지고,
간신들에게 이용만 당하여 나라를 망국으로 버렸다
.26세, 성숙한 군주(한영제)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욕망도 계속 팽창한다
환관세력을 이용하여 탄압하고, 새로운 궁전을 건축하였다
@한영제의 지나친 총명함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된다
.신하들에게 권모술수만 쓰고 통치하였으며,
국가와 백성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조차 없었다
.결국, 천하의 정직한 관리 및 천하 백성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시기에는 동탁, 조조 같은 신하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당시 천하에서 폭동이 많았지만, 조정대신과 십상시를 장악하면,
변방의 소란은 신경쓸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영제는 唐후주처럼 詩詞를 쓰는 재주는 없었다
.宋휘종처럼 회화, 서예에도 재주가 없었다
.한영제의 욕심은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천하의 부자였지만, 항상 부족하다고 느낀다
1)신하들에게 달라고 하였다 “짐이 개를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영제에게 각양각색의 개를 바쳤다
한영제는 개에게 대신의 모자(의관)를 씌우고,
대신의 허리띠를 채워서, “구관(狗官)”을 끌고 書院에서
위풍당당하게 다니며 만족해 했다
개를 데리고 노는 것이 싫증나자, 마차가 개성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짐은 여차(驢車, 나귀가 끄는 차)를 모는게 좋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은 각양각색의 나귀를 바친다
한영제는 4마리의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서원을 다녔다
2)비용징수
백성들이 조정에 바친 재물중 가장 좋은것을 골라서
자신의 개인금고에 넣는다(도행비, 導行費, 통행세)
천하의 관직에 가격을 붙인다
*조숭(조조의 父親)은 1천만으로 태위를 샀다
당시의 명사인 최열(崔烈)은 한영제의 유모와 관계가 좋은 바람에
절반으로 깎아서 오백만에 샀다.
한영제는 조서를 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너무 싸게 팔았다”며 아쉬워 하였다
사마직은 거록태수를 맡았는데, 관례에 2천만을 지급해야 했지만,
정직하고 불쌍한 관리라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삼백만을 감해준다
결국, 사마직은 고민하다가 음독자살하고 만다
환관 여강(呂强)이 등장한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0204mpcho@hanmail.net
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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