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3. 2020-2021 허재갑 총재당선 2탄(세종로LC 카메라 원본)
호남명문가 창평고씨(장흥고씨)
호남명문가 창평고씨(장흥고씨)
1.창평고씨 가문(장흥)
@호남4대 명문가
.울산김씨: 하서 김인후(1510~1560)
.행주기씨: 고봉 기대승(1527~1572)
.장흥고씨: 제봉 고경명(1533~1592) *창평고씨(담양), 3부자 불천위
.연일정씨: 송강 정철 (1536~1593) *지실정씨
*호남의 인물배출의 4대명당은 광주, 나주, 장성, 창평...
@창평고씨 주요 인맥
.창평고씨 최근 인물: 고재욱(동아일보 사장)~고재필(보사부 장관)
~고재청(국회부의장)~고재호(대법관)~고재량(광주고법 부장판사)
~고중석(헌법재판관)~고윤석(서울대 부총장)~고문석(한양법대학장)
~고명승(육군대장)~고일성(무등양말 사장)...
*고재청, 고재호, 고재량은 친3형제지간이며,
*고재호의 사위: 최종영(대법원장), 조카: 고중석(헌법재판관)
.현재 14대 宗孫 고영준
@上月亭(창평 상월정)
.上月亭 맴버: 형제(인촌 김성수, 김연수)~송진우~백관우~김병로...
上月亭은 월봉산(해발 272m) 중턱, 4칸접집 한옥이다(방:4개)
8~9명이 거주하며 공부하는 고시촌이다(최근 1980년까지 활용)
左靑龍과 右白虎가 있는 상속의 고요한 정자이다
.上月亭 1000년의 유래?
*고려시대, 언양김씨에서 400년간 이용, 사위에게 상속(함평이씨)
건재 김천일(1537~1593)은 壬辰倭亂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후손들이 언양김씨 가문이다(김천일: 창평 유천출생)
*함평이씨에서 300년간 이용하고, 외손자(고씨)에게 상속하였다
덕봉 이경(황해감사)의 사위는 학봉 고인후(1561~1592)이다
덕봉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자, 외손자(고씨)에게 물려준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國敎, 사찰이나 암자에서 공부를 했던곳이다
추사 김정희(예산 고택)도 인근 화암사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경주 최부자집 자손들도 남산자락의 와룡암에서 공부하였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사찰(암자)이 정자로 전환된 셈이다
.上月亭은 대자암(고려시대: 불교 암자)에서 언양김씨들이 공부했다
강원감사 김응교(언양김씨)가 上月亭으로 변경시킨 것이다
최근, 신기하(전, 광주출신 국회의원)의 사법고시 공부방이었다
@서울 계동 사랑방(인촌 김성수)
.사랑방에 민족주의 우파, 우국지사들이 매일 30~40명씩 집결하여
토방에 신발이 수북하게 쌓일정도 사람이 들끓었던 것은
인촌 김성수는 3박자(재력, 식견, 덕성)를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김병로~송진우~백관수~김도연~김준연~장덕수~현상윤~조병옥...
2.고씨가문의 보수공존
@제봉 고경명(1533~1592)의 아들(5형제)
.제봉 고경명과 2째아들(학봉 고인후 1561~1592)은 壬辰倭亂에
진주성戰鬪에서 동반戰死하였다
.현재 창평고씨는 학봉 고인후의 후손이다(장흥고씨 학봉파)
@녹천 고광순(60세, 구한말 의병장, 1848~1907)
.보수적 성격으로 목숨을 던져 조국에 충성하는 행동파이다
.의병장으로써 의병들의 식량과 저항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고직가의 창고에서 식량을 몰래 조달한 것을 눈감아 준것이다
*1차의병(1895): 민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반발
송사 기우만의 주도(장성): 노사 기정진(호남 대표학자)의 孫子
기정진 “위정척사” 외세를 배격하고 자존을 지켜야 한다
손자(기우만)는 위정척사 사상적 배경을 두고 의병을 일으킨다
*2차의병(1905):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반대, 고녹천이 주도한다
고녹천 “家國之讐(가국지수)” 진안과 조국의 원수를 갚자
壬辰倭亂 금산전투에서 고경명(12대 조부)과 고인후(11대 조부)의
宗孫으로써 순절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 했다(임란 3부자 순절)
참여했던 의병들은 대부분 창평고씨 집안 사람들이다
1907년, 왜군이 새벽에 고녹천 집을 급습, 주민100세대를 집합시켜
고문했으나 고녹천의 행방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은 고씨宗家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불타는 집을보고 고녹천의 아들(벙어리)이 저항하자,
총칼로 성니주위를 찔러 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1907년, 지리산 영곡사에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던중,
새벽, 일본군의 습격으로 고녹천(13명)이 장렬히 戰死하였다
고녹천은 60세, 315년전 고경명(12대 조부)도 60세에 순절하였다
매천 황현은 고녹천의 초라한 무덤앞에서 詩를 남겼다
.고녹천이 전사한후, 의병들은 2갈래로 나눠 끝까지 항거하였다
➀고광수(1875~1945): 의병진의 선봉장
일본군이 연곡사 습격하는 새벽에 화개장터 일본군 습격을 위해
출발하여 쌍방이 허탕을 친셈이다
천석꾼의 아들로써 전재산을 털어 의병활동 자금을 충당하였다
일본군의 보복으로 남원 효기리 응령의 집을 불태웠을때,
워낚 큰 대궐이어서 문고리만 한 가마니 나올 정도였다
훗날, 금강산으로 피신하여 활동하던중 해방직전에 죽었다
②고광문(1864~1944)
연곡사에서 포위당하여 집중포화를 받을때 고녹천이 건네준
“의병명부”를 들고 탈출하여, 훗날 일본군의 보복을 막을수 있었다
고녹천은 엄명을 내렸다 “의병명단 문건을 들고 어서 피하라”
연곡사~광양~구례~곡성~순천에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고,
무등산에서 광주공격을 준비하던중(200명) 비밀이 탄로나
습격을 당하여, 고광수와 금강산으로 피신하여 1944년에 죽었다
1907년~고광술로 개명하여 일본군의 추적을 피한것이다
.고녹천~고광수~고광문의 후손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였다
고흥석(인문학자)과 고중석은 고광문(의병장)의 孫子이다
@춘강 고정주(창흥의숙 설립자, 1863~1933)
.고정주(고직각): 당시 최고지식인의 낙향후 첫째사업이 상월정이었다
규장각 “직각”(왕실문서, 서적관리: 현 국립중앙 도서관장),
皇子典讀(왕자에게 경전을 가르침), 의친왕(이강)의 비서실장,
1905년, 을사보호조약후 낙향하여 학교를 설립한다
.개화사상으로 전재산을 투입하여 학원을 설립한 민족 계몽운동가
*1906년, 첫학생은 아들(고광준)~김성수, 김연수(형제)뿐이었다
이어서, 송진우~김병로~백관수가 입학하였다
.영학숙을 세우고(영어교육 학교),
.1908년, 창흥의숙으로 확장하여 창평객사를 보수하여 사용(학생:50명)
단발령으로 학생들이 적었으며, 결석자는 집으로 찿아가 설득하고
만석꾼의 전제산을 털어 수업료 면제, 점심을 무료 제공하였다
.이후, 창평학교~창평국민학교로 진화한 것이다
.창평학교 출신: 고재천(전남대 농대학장)과 형제 고재필(보사부장관)~
~고재기(서강전문대 학장)~고재종(전남교육감)~고정석(산업은행장)
~고윤석(서울대 부총장)~고광표(대창 회장)~
~박석윤(동경대, 최초 야구를 도입)과 형제 박석기(항일 국악인)~
~국회의원 3형제(김홍용,문용,성용)...
*이회창의원 外家는 창평이다(母親 김사순)은
~母親은 경기여고 졸업후, 창평에서 교직생활을 하였으며,
~이회창의원도 창평학교에 2~3년간 재학하였다
*고직각(만석꾼)은 고녹천이 쌀(식량)을 꺼내가도 모른체 한것이다
의병활동 실패후, 가담자들의 가혹한 보복이 많았지만,
고직각은 피해가 적었던 것이다
*인촌(김성수, 갑부)도 고직각(인촌의 스승, 장인)을 닮아갔다
서울 사랑방에 독립군 자금을 지원해달라! 독촉을 알고서
방바닦에 돈다발을 놓고, 일부러 외출을 해버린다
훗날, 일본헌병의 추궁에 변명한다 “나는 강도당한 피해자이다!”
3.창평고씨와 특별한 인연(上月亭)
@배경은 춘강 고정주의 영향, 얽힌 혼맥, 창평의 분위기 때문이다
.인촌 김성수(1891~1955)~고하 송진우(1890~1945)~
~가인 김병로(1887~1964)~근촌 백관수(1889~납북)...
@창평고씨와 호남4대 명문가의 얽힌 혼맥
1)울산김씨(인촌 김성수)와 혼사가 많았다(인촌: 외가,처가,사돈)
*인촌의 母親(창평고씨)
*인촌의 부인(춘강 고정주: 고직각의 큰딸)
*인촌의 며느리(2명; 창평고씨)
2)가인 김병로(고향: 순창 복흥)는 청평에서 성장하였다
*가인의 母親(창평고씨),
*가인의 조카(고재필: 전 보사부장관)
*가인의 며느리(창평고씨: 고재욱의 여동생/동아일보 사장)
가인의 생가터: 산줄기의 끝자락 기운이 단단이 뭉친 혈터,
선조의 묘소는 복흥의 소쿠리 음택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3)고하 송진우(신평송씨): 담양에서 성장하였다
*고작각이 발탁하였다 “담양에 똑똑한 놈 하나 있다는데, 데려오거라”
35년후, 송순의 후손(송진우)을 전격 발탁한 것이다
*俛仰亭(면앙정) 송순(1493~1538)은 소쇄원(담양)을 중심으로
호남가사문단(湖南歌團), 溪山風流(계산풍류)의 좌장으로써
호남의 고급문화를 태동케 한 장본인(주인공)이다
뛰어난 학문과 관대한 인품으로 장수하였다(90세)
면앙정 송순의 제자들은 당대 일류 문객들이다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임제 백호,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1552년, 제월봉기슭 면앙정에서 송순의 회갑잔치가 열렸다
면앙정기(기대승)~賻(부:백호)~詩(김인후~임억령~박순~고경명)
스승의 가마를 맨 제자들(기대승~고경명~임제~정철...)
*俛仰亭(면앙정)은 3칸으로 초라하지만, 무등산~추월산의 산세,
창평~나주까지 펼쳐지는 100리의 전망일 장관을 이룬다
나(주체)~산천(객체)이 한덩어리로 동화시킨 명당으로
주변 경관을 최대한 고려한 借景미학(차경)의 대표적 공간이다
제봉 고경명(1533~1592)이 가마를 맨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창평의 독특한 분위가 이채롭다
.단결심과 저항력으로 일제시대에 버틴 삼성삼평이다
삼성(곡성, 보성, 장성)~삼평(함평~남평~창평)
.창평은 自作一村으로 모든 문제를 마을 자체에서 소화해 sosT다
양반동네, 부자동네(1000석꾼이 많아), 들판이 넓고 물이좋아
풍수피해와 천재지변이 없었다(쌀이 많아 한과, 엿을 즐겨먹었다)
4.中庸의 道를 중시하였다
@東學, 일제시대, 韓國戰爭에 인명피해가 없었다
.강온 양파가 공존하여 충돌이 없었다
명분상으로 동학군을 논리적, 공식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지만,
비공식으로 식량과 자금(물자)을 지원하는 타협적 처세이다
차마 情理的으로 모른체 할 수가 없는 인정이 넘치는 조치로 보인다
.피난처로 알려져 인촌, 가인...동학이후 창평에 머물렀던 것이다
.고작각의 절충적인 판단과 학교설립의 판단이 매우 훌룡하다
.의병장 고녹천은 총을 들고 조국을 지켰다
.창평고씨 6명이 의병활동 유공으로 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3부자 不遷位(불천위)
1)제봉 고경명(1533~1592)
2)큰아들(준봉 고종후)
3)둘째아들(학봉 고인후:1561~1592)
.조상 5대조 위패는 자동으로 묘소앞에 묻지만,
불천위는 옮기지 않고, 영원히 위패(제사)를 모셔야 한다
.고경명(60세)이 출정할 때 6000명이 모여 환송하였다
“馬上檄文”(마상격문: 말에 타고 전쟁터로 나가면서 작성한 격문)
*3대 격문: 제갈공명(出師表)~최치원(黃巢檄文, 황소격문)~馬上檄文
.고경명의 동생(고경신): 전투용 馬 를 구해오던중 풍랑으로 순직하고
.고경명의 동생(고경형): 진주성 전투에서 戰死하였다(1593년)
.둘째아들 고인후(32세): 父親(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 戰死(1592년)
.큰아들 고종후(40세): 진주성전투에서 숙부(고경형)와 戰死(1593년)
*큰아들+둘째아들: 대과 급제했던 수재출신이다
.막내아들 청사 고용후(16세): 부친(고경명)을 따르려고 간청하자 만류
“너는 나이도 어리고, 집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
壬辰倭亂 종료후, 대과에 급제하여 부친과 두형님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겨 오늘날 명문가의 족보가 될수있었다
혼자남은 아들이 성공하여 가문의 역할을 훌룡하게 수행하여다
“無晴沙 無霽峯” 청사(막내아들)가 없었더라면
제봉(고경명)의 행적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5.창평상회 설립(1930년), 현재 창평농협의 위치
@일본인의 고리대금업 “장치기”를 막아냈다
.서민에게 비싼 이자로 대출해주고 5일장날에 거출하였다
.민초들은 물건을 모두 내다 팔아야 갚을수 있었다
.만물상회로 탈바꿈하여 일본인의 진출을 막아냈다
.서민들의 저렴한 대출업무를 시작하고, 일자리를 창출하였다
@창평마을의 자긍심(냇가이름)
.柳川(유천): 녹천(고광순)의 宗家, 의병출신 가문이 많이 거주한다
목숨을 조국에 바친 애국 후손들의 자부심이 크다
.三川(삼지창): 고직각(춘강 고정주, 창흥의숙)의 후손이 많은 마을이다
근대 국가계몽의 희생정신을 자긍심으로 여기고 있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Ti-story "늘빛사랑 조흥식"
daum blog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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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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