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7. 자문위원회 위촉장 수여(리베라호텔)
경허선사(鏡虛禪師)
경허선사(鏡虛禪師)
@경허(鏡虛) 성우(惺牛)는 우리에게 이미 전설속의 사람이 되었다.
.경허가 입적한지 이제 꼭 100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우리들 기억에
아득한 옛날 사람처럼 느껴진다.
.경허는 상식을 벗어던진 무애행의 극치를 보이다가 만년에는
저 북단의 오지인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들어가 행적이 묘연해졌다.
.그는 근세 한국 선(禪)의 중흥조로 높이 추숭되고 있는 터라
그가 사라진뒤 그를 둘러싼 신비한 소문이 날이 갈수록 무성해졌다.
.그래서 경허는 有~無의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경허가 불교를 공부하는 영남 예천(醴泉)의 선비에게 보낸 편지
*경허(鏡虛) 성우(惺牛 1846~1912)
*장 상사와 김석두에게 올리는 편지(上張上舍金石頭書), 경허집(鏡虛集)
.朱子學의 나라인 朝鮮에 서울, 경기지역의 이른바 경화사족(京華士族)들
사이에서는 진작부터 불교를 공부하는 유생들이 있었으니,
저 유명한 삼연재(三淵齋) 김창흡(金昌翕)같은 이들이다.
그렇지만 완고한 도학의 고장인 영남 예천의 선비가 불교를 좋아하고
경허와 사귀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가로이 지내시는 근황이 좋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소승은 줄곧 병으로 신음하는 두타(頭陀)로 지낼 뿐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지난 달 모일에 실상사(實相寺) 약수암(藥水庵)의 승려 편에
서찰 한 통을 부쳤는데, 받아 보셨는지요?
지금 용문(龍門)으로 가는 인편이 있기에 몇자 적어서 부칩니다.
유가(儒家)에서는 “군자는 자기를 미루어 갈 뿐이니, 자기에 만족하여
밖에서 바라고 기다림이 없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선비들이 늘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불교 공부에 적용해 보면 그 이치가 매우 많고 큽니다.
대개 생사(生死)와 열반, 범성(凡聖)과 선악(善惡) 등은 말할것도 없고
참선, 송경(誦經), 기도, 염불, 수행까지 모두 밖의것이 아님이 없으니,
자기밖의 것이라면 이미 옳지 않습니다.
동정운위(動靜云爲)의 모든 행위에 자기도 모르게 외물(外物)에
얽매이고 이끌리는 것이 마치 교외의 우산(牛山)과 같습니다.
하물며 생사와 화복(禍福)이 갈리는 즈음에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다.” 하였는데,
이는 교가(敎家)에서 너무나 많이 써서 싫증이 나는 말이지만
도리어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스님이 이르기를
“지극히 반조(返照)하여 자신이 의지할 데가 없으면
온 몸이 그대로 대도(大道)에 합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거울을 깨고 오면 그대와 서로 대면해 보리라.”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대저 일점 신령한 마음은 그 자체가 걸림없이 툭 트이고 아주 말쑥하여
본래 갖추어진 바탕에 터럭만한 것도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도달할 본래 자리에 도달하면 자기의 밖이니 자기니 하며
지리(支離)하고 모호하게 구별할 필요가 없으니,
이 경지에 이르면 자유롭다는 것조차도 쓸데없는 말일 뿐입니다.
연년에 남쪽으로 오셨을때 공께서 불법을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았기에
안부 편지를 보내는 차제에 붓가는 대로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정으로 받아주고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는 곳이 서로 아득히 멀어 만날 수 없는 터라
편지를 앞에 놓고 마음 서글픕니다”
@실상사 약수암의 승려 편에 편지를 부쳤다고 한것을 보면,
.경허가 1900년경 남원 실상사에 있을때 부친 편지임을 알수 있다.
.용문(龍門)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이다.
.편지 제목 아래 “장 상사(張上舍)는 이름이 효영(孝永)이고
호는 정련거사(淨蓮居士), 김석두(金石頭)는 이름은 병선(炳先),
석두거사(石頭居士)는 그의 호이다.
모두 예천군 생천동(生川洞)에 산다.”라는 주(注)가 달려 있다.
생천동은 용문면에 있는 마을이다.
@상사(上舍)는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의 이칭이다.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예천 사람 장효영(張孝永) 이름을 찾을수 있다.
.그는 고종(高宗) 22년(18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에 응시하여
진사 3등(三等) 107위로 합격한 사람으로 자는 원선(源善)이고
본관은 단양(丹陽), 1864년생으로 경허보다 나이가 18세 적다.
@상대가 선비들이므로 경허는 儒家의 말을 빌어 불교의 이치를 설명하였다
.군자는 자기에게 만족하고 밖으로 바라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불법(佛法)에서는 자기마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본래 佛性의 자리에서는 生死와 열반, 범성(凡聖)과 선악(善惡) 등,
상대적인 개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참선, 송경(誦經), 기도, 염불 등,
모든 수행조차도 모두 밖의 것이 아님이 없으니,
자기 밖의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기 불성을 찾는데는
누가 된다는 것이다.
@우산(牛山)은 戰國時代 齊나라 도성 교외의 산을 말한다
.그러나, 우산을 사람의 本性에 비유된다.
.즉 우산은 원래 아름다운 숲이 우거졌었는데,
나무꾼들이 베어가고 소와 양들이 싹을 뜯어먹다 보니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사물에 이끌려 손상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孟子사상)
@조공(肇公)은 동진(東晋)시대, 승려 승조(僧肇 384~413)를 가리킨다.
.불교의 깨달음은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이다.
.즉 본래 나라고 할 나가 없음을 깨달으면 사물과 나의 구별이 없어져
마음이 까닭없이 괴로워하고 허덕일 일이 아주 없어진다는 것이다.
“나”가 없다면 자유롭다고 하는 말도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자유롭다, 자유롭지 않다고 판단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깨고 오라”는 말은 거울이 아무리 맑아
.모든 사물을 걸림없이 비춘다 할지라도
비추는 주체는 남아 있으니, 거울이 깨지고 없는 경지라야
철저한 무아의 경지라 할수 있다는 것이다
@경허와 이 영남 선비들과의 교유는 길지 못했다.
.경허는 1904년 해인사에서 인경불사(印經佛事)를 마치고 경상도를 떠나
.1905년, 유생의 모습을 하고 북방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삼수, 갑산, 강계(江界) 일대를 떠돌던 경허는
갑산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夏洞)에서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하다가 1912년 입적하였다.
.경허와 영남 선비들의 교유 이후에도 유생과 승려의 진솔한 만남이
많지 않았다.
@朝鮮時代, 佛敎를 이단으로 강하게 배척하였기 때문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같은 예외가 아주 없진 않지만
불교에 조예가 있는 학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연구의 금자탑이라 할수있는
주차집보(朱箚輯補)의 방대한 주석에서도 佛敎의 학설이나 용어에
대한 것은 매우 초라하고 엉성하다.
.지금도 四書三經을 읽는 사람은 佛書를 애써 기피하고,
佛敎를 공부하는 사람도 儒家의 사상을 경시하는 공부의 편향성이
강하게 남아 있다.
.유불(儒佛)을 대강 섭렵하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어떠한가?
아직도 주자학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자학을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종교인의 정신으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또한 불교인이 주자학을 싫어하고 자기 신앙에 철저해도 나무랄수 없다.
그렇지만 학문하고 연구하는 학자라면, 자기 학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학문을 알려는 노력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학자, 지식인은 무턱대고 다른 사상을 배척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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