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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산악회

2013-0523.청운산악회 생일파티

by 조흥식 2023. 1. 9.

2013-0523.청운산악회 생일파티

*이봉우, 김부연목사 생일잔치(선릉역)

*이름의 의미(이름, 아명, , , 시호, 봉호 封號)

 

 

 

이름의 의미(이름, 아명, , , 시호, 봉호 封號)

@지금과 같은 한자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무렵이다

.고유 토속어 이름을 사용하다가 漢字 유입과 성()의 보급에 따라

일부 지배층과 지식층에서 중국처럼 한자 성명을 쓰게 되었다.

.고려 귀족과 관료 계급으로 확대되고,

.조선 지배층과 지식층에 한정되었으며, 하층민들은 여전히 성이 없이

고유한 우리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1910년 민적부를 작성할 당시까지도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禮記

어려서는 이름을 부르고, 관례를 하면 를 부르고, 50세 이상이 되면

형제간의 서열로 부르고, 사후에는 시호(諡號)를 부른다.”

.정식 이름, 아명, , , 시호, 봉호(封號) 등 다양한 호칭이 있었다

.왕은 여기에 묘호(廟號), 존호(尊號), 능호(陵號) 등이 더 있었다.

.다양한 호칭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예법

즉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부모, 조부모, 가문의 존장, 국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못했는데,

이를 피휘(避諱)라고 하였다.

.이런 의식이 점차 확대되어 성인(成人)에게 이름 부르기를 꺼렸다

.이름을 대신하여 누구나 부를수 있는 자()가 생겨났다.

자는 이름자에 담긴 뜻과 연관되게 지었으며,

이름자에 담긴 덕()을 드러낸다 하여 표자(表字)’라고도 하였다.

 

@김시습(金時習) 이름은 論語 첫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인용,

.매월당의 자는 불역열호(不亦悅乎)’자가 들어간 열경(悅卿)이다.

.고려후기 학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이름을 보면

論語견현사제(見賢思齊)’가 떠오르는데,

그의 자는 자가 들어간 중사(仲思)이다.

.이름, 자를 지은뒤에 그에 담긴 뜻을 설명하는 ()’을 남겼다

고명사의(顧名思義)’이다. 이름을 돌아보며 그 뜻을 생각하라,

즉 이름에 담긴 의미를 늘 생각하며 그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라!

 

@도 차츰 존장, 연장자,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쓰기를 꺼리게 되었다.

.예인(藝人), 은자(隱者)에게 한정적으로 사용되던 호의 사용이 확대되고,

이것이 가장 보편적인 호칭이 되기에 이르렀다.

.부모, 존장을 제외한 손윗사람이 아랫사람, 동년배 사이 를 사용하고,

아랫사람이 손윗사람, 스승, 존경하는 사람을 지칭할때 호를 사용했다.

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후대에 정착된 것이다.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송대(宋代)에 호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우리는 1300년부터 호의 사용이 확대되고

1600년을 넘어 문인들의 대부분이 호를 사용하였다

호는 벗, 지인들이 붙여주기도 하고, 스스로 짓기도 하였으며,

짓는 데도 특별한 제약이 없었다.

.본인이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이나 가치 등을 담기도 하고,

.출신지나 거주지의 지명 및 산수, ()ㆍ정자(亭子)ㆍ서재(書齋)

등의 이름이 그대로 쓰이기도 하였다.

.한 사람이 수백개의 호를 사용한 추사 김정희이다.

.(正祖)는 말년에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고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독특한 자호를 쓰기도 하였다.

 

@고관, 학덕높은 학자, 국가에 공훈자의 사후에 조정에서 시호를 줬다

.시호는 당사자의 삶의 행적을 살펴 두 글자로 정하는데,

본래는 훌륭한 사람에게 좋은 시호를,

못된 사람에게 나쁜 시호(惡諡)를 정해주는 포폄의 의미가 담겼다

.포악한 군주 주나라 여왕(厲王)과 유왕(幽王)의 시호는 대표적 악시이다

후대로 오면서 악시는 거의 없어졌다

.한 인물에게 시호가 내려지는가’~‘어떤 시호가 내려지는가

가문, 학파, 정파, 관련 인물에게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성종시절, 점필재 김종직이 사망하자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정하였는데,

.반대파에서 합당하지 않다며 문제를 제기하였다.

.()을 숭상하는 유학적 사고에서는 자 시호를 선호하였고,

그중에서 도덕을 갖추고 학문이 넓다[道德博聞]’는 뜻의

최상의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김종직의 시호에 도덕박문(道德博聞)’을 적용한 것이

문제의 발단되어 결국, 시호 담당관원이 처벌되고

김종직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개정된 시호의 학문이 넓고 식견이 많다(博聞多見)’는 의미로

위상이 앞의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김종직의 시호는 숙종 34년에 이르러서 처음에 정했던

문충으로 다시 개정되었다(사망 220여년 후)

.이렇게 시호를 정하는 일로 조정내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고

후손이 선대의 시호를 개정하고자 청원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렇듯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될 것으로 여겨졌고,

.상호간의 관계, 신분, 명망, 학덕에 맞추어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진 이름도 고쳐야 할때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항렬자가 잘못 적용된 경우가 그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이름을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사적(士籍)에 이름이 오른 자는 국가에 청원하여 허가받도록

법전(法典)에 규정되어 있었다.

.왕들의 어휘(御諱)와 음이 같은 경우에는 이름을 고쳐야 했다.

선조(宣祖), 역대 왕들의 어휘 글자를 대신할 글자를 정하기도 하였다.

세종(23)은 훗날 단종 원손(元孫)이 태어나자,

원손이라는 이름을 모두 고치도록 명한 일도 있었다.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반역을 저지른 대역죄인과 이름이 같은 경우,

공천(公賤)이 공훈을 세워 면천된 경우, 제한적 개명을 허가하였다.

.법 조항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려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역적 이름과 글자가 다른데도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역적과 항렬자가 같다는 이유로 개명을 청원하여

이를 금지하는 조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동시에 조정에서 벼슬살이하게 되었을 때,

.후진(後進)의 이름을 고치도록 한 사례도 있다.

.중종 문신 회재 어언적(李彦迪)은 본명이 적()인데,

1년전 과거 합격한 동명이인 때문에 중종이 언적으로 개명케 하였다

회재 이언적과 함께 그의 동생도 이괄(李适)에서 이언괄(李彦适)

개명한 듯하다는 점이다.

여주이씨(11) 항렬자는 이고 한 글자 이름이다.

이언적도 처음에 원칙에 맞게 이름을 지었으므로 동생도 그랬다

종형제들과 달리 이언괄도 형처럼 두글자 이름을 쓰고 있다.

형이 두글자 이름을 쓰게 되자,

동생도 형을 따라 언()자를 넣어 두글자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옛날 개명은 왕실, 국가의 권위, 가문의 질서, 개인의 명예 때문이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부모에게 물려받은 머리카락조차도 목숨처럼 여겼지만,

지금은 얼굴, 몸매를 고치는 수술과 시술이 보편화되었다.

.후천적으로 붙여진 이름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모, 조부모가 처음 이름을 지어줄 때의 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름이 멋스러운 이름은 아닐지라도 조상들의 마음과 사랑을

항상 생각하는 값진 고명사의(顧名思義)”가 되지 않을까?

.개명한 사람치고 잘된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라!

 

@1999, 연간 3만명 개명을 신청하였다

.2010년에는 16만명을 넘어섰고, 개명 허가율도 94%에 달했다

.2000~2009, 10년간 73만명이 개명하였다

.한국 인구 5천만명에서 70명중 1명이 이 기간에 개명했다는 얘기이다

 

 

 

늘빛사랑 조흥식

010-3044-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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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