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3. 추석연휴 수락산(장암역~도정봉~수락산 주봉~동봉~수락골 벽운계곡~수락산역)
密陽아리랑 표충사(점필재 김종직 사초이야기, 사명대사)
密陽아리랑 표충사(점필재 김종직 사초이야기, 사명대사)
1.점필재 김종직((1431~1492, 밀양)
@사림정치의 선구자 (1431~1492. 세종~세조~예종~성종)
.父親은 정몽주, 길재의 弟子(유학의 대가), 영남사림파의 宗匠(종장)
.종택과 사당(고령 쌍림면)은 5대손 김수휘(1651, 효종2)가 건립하였다
.김종직의 생가(추원재 追遠齋), 묘소 복원하였다(1810, 순조)
.쌍수정(터)에서 제자양성: 예림서원(업적과 학풍을 사림에게 교육)
@김종직의 사림정치 위기
.수양대군의 큰아들(의경세자)은 세자책봉후(2년후) 사망한다
.둘째아들(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예종(8대, 1450~1469, 19세)~1년2개월후 사망(후손: 제안대군, 4세)
.자을산군(성종, 13세, 9대)을 정희왕후(수양대군비)가 수렴청정한다
의경세자(큰아들)의 둘째아들, 한명회의 사위(1415~1487, 76세)
.성종(1457~1494. 37세)은 구성군을 제거한다
임영대군(세종의 4째아들)의 아들로써 왕권에 위협인물로 탄핵되어
유배되어 죽는다. 이때부터 왕족은 관료가 될수 없었다
.7년간 수렴청정이 끝난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권력편중을 막고
유교사상과 王道政治를 실현한다
.士林은 地方에 근거지를 둔 중소지주, 지식인 학문의 道學이었다
.김종직의 제자 정계진출(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이맹전, 남효온...)
@점필재 김종직의 부관참시, 戊午士禍(1498 연산군4년)
.훈구파의 공격: 유자광, 정문형, 이극돈, 한치례...
.생전에 작성했던 弔義帝文을 제자 김일손(사관)이 史草에 넣었는데,
.김종직의 부관참시, 많은 제자들이 유배~처형되었다
.김종직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중종시대에 복위된다(영의정 추존)
@훈구파 유자광은 신진사림(김일손, 김굉필, 정여창)을 모함하였다
.탁영 김일손(청도)이 쓴 성종실록 史草(弔義帝文)사건은
.세조 비방죄등으로 실록 책임자 이극돈과 논쟁이 심했다
.처형되던 날, 고향하늘에 천둥 번개와 3일간 자계천에 혈류가 흘렀다
@父親(김숙자)의 故鄕은 선산(경북)이나, 대부분 밀양(妻家)에서 지냈다
.점필재 김종직은 밀양(母親의 친정, 밀양박씨)에서 出生하였다
그래서, 점필재 김종직의 生家는 밀양에 있다
.16c 혼인 풍습은 남자가 처가에서 거주하는 형태를 가졌다
.杖家(“장가 간다”)는 “장인댁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김종직은 혼인후 관직생활(漢陽)을 제외하고 김산(경북 김천)에서
살았던 이유는 부인(조씨)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어린아들(목아)이 죽었을때 김산 장모의 곁에 매장하였다
@김종직의 死別후, 처녀장가로 再婚하였다
.52세, 조씨부인이 죽은뒤 재혼하였는데(55세)
둘째부인(문씨)는 18세, 도씨인 셈이다
.道學者를 지향했던 김종직은 後孫이 적자로써 捷의 아들(庶子)이
염려되어, 훗날 과거시험을 염두했던 것이다
당시, 經國大典이 시행된 직후였기 때문이다
.아마, 조씨부인 슬하에 아들이 있었다면 再嫁하지 않았을 것이다
.再婚한 김종직은 妻家로 가지않고, 둘째부인을 불러들인 이유는
재혼의 경우에는 대개 처가로 가지 않았던 관습 때문이다
于歸를 택한 것이다(우귀: 婚姻후 신부가 시댁으로 살러 오는것)
@62세, 점필재 김종직이 죽었을때, 독특한 喪禮(상례)
.아들(7세) 때문에 명목상 상례 주관자는 둘째부인(문씨)이었는데,
.실제 喪禮를 주관한 사람은 처남(첫째부인의 남동생, 조위)과
누님의 아들(甥姪, 생질)이었는데, 김종직과 처남(조위)은 학문적인
교우였으며, 생질(사촌)은 禮學에 밝은 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형님의 아들(김치)에게 喪主 역할을 주지않은것은 의외이다
당시, 처가살이가 당연했기에, 처남이 매형의 장례에 적극 관여함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처가(외가)와 공존하여 세력과시를 택하는 관습으로써
김종직은 조카(김치)에게 할머니 초상에 여묘살이를 하지않아
엄하게 꾸짖은것도 사림의 종장이었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김종직은 中國의 선진 가족제도(부계중심 가족제도)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에 보급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17c이후, “처가살이”가 퇴조하고 “시집살이”로 변화하게 된다
2.史草이야기
@초(草: 풀초는 다듬어야 한다는 뜻)
.宗(종): 德이 있어야(적자를 기준으로 한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祖(조): 功이 있어야(선종~선조로 바꾸는등, 국란극복 유공인가?)
.實錄廳은 왕이 사망하면 신설하여 선대왕의 실록을 집필하는데
영의정을 중심으로 士官을 禮文館에서 파견하여
왕의 품격(祖, 宗. 君)을 정했다...(일기: 연산군~광해군)
@태종(이방원, 1404년)은 사냥하던중 落馬하자 주위를 살핀뒤
.왕은 긴장하여 “이 사실을 士官이 모르게 하라!”
.그러나, 사관에게 보고되어 이조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齊나라(春秋時代), 史官 3형제
.bc548, 최저(중신)는 부인과 불륜현장에서 제장공을 죽였다
史官(대사)은 “최저, 그 왕을 시해하다” 기록했다
최저는 史草내용 삭제를 요구했으나 史官은 거부하여 처형되었다
.죽은 대사(史官)의 동생이 史官이 되어,
“최저는 대사(史官)를 죽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최저는 수정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史官을 또 죽였다
.셋째동생이 史官이 되어, 또 다시 史草에 기록했다
“최저는 그 아우도 죽였다” 라고 기록한뒤, 인접국으로 도주했다
.결국, 최저는 史草 수정을 포기하였다
@폭군 진(晋)영공
.직언하는 충신 조순(재상)을 죽이려고 자객을 동원했지만
.오이려, 정당하지 못한 명령을 따를수 없다면서 자객이 自殺하였다
.연회에 초대하여 개를 시켜 물어죽이려 했으나 “사람에게 죽고 싶다”
.인접국으로 망명하던중, 조천이 진영공을 殺害하였다
.귀국한 조순은 “재상으로 책임지고 물러났다”는 史草 기록이다
.동고 史官(대사)을 孔子는 높이 평가했다
.동고는 “宰相이 왜 책임져야 하는가?”를 명확히 설명하였다
@燕山君은 “나는 세상에서 史草가 가장 무섭다”고 했다
.조박(士官. 정7품. 정종)은 “군주가 두려워 할것은 하늘과 歷史입니다”
.하늘은 순리와 理致이며, 높고 푸르름을 지킨다는 뜻이다
“士官은 君主의 善惡을 萬歲에 전하니 두렵지 않습니까?”
@당태종(이세민)의 어진 신하(충신 위징)
.위징은 史官에게 상소문 사본을 주면서 “사초에 넣어달라...” .위징이 죽은후, 직접 墓碑까지 하사했으나, “위징의 묘지석을 없애라”
.高句麗 침공시, 위징 혼령이 나타나 “고구려 정벌을 당장 중단하라”
.唐太宗은 정벌을 중단하고 철수한 후에, 다시 묘비를 세워준다
.저수량은 사초열람을 요구했던 당태종에게 끝까지 거절한 사관이다
.史官은 두명(좌사: 황제의 움직임을 기록, 우사: 황제의 말을 기록)
@宋태조는 사냥도중 긴급보고를 청하자, 신하를 폭행했다
.신하는 앞니가 2개 부러졌는데, 즉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송태조는 후회했다 “그것을 증거로 왕의 행동을 간소할 작정인가?”
.신하는 “사관에게 알려 분명하게 기록되도록 하겠습니다”
.권력자의 방종과 남용을 견제하여, 황제는 역사기록을 두려워했다
3.밀양아리랑: 아랑(阿娘)의 전설
@명종, 밀양부사의 외동딸 윤동옥은 죽음으로 처녀의 순결을 지켰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부치마 입에 물고 입만방긋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선 아리랑의 定說
“누가 내 처지를 알리오?”
.정선 아리랑은 유장하고 메나리조 가락(주요무형문화재 지정)
.진도 아리랑은 구성지고 육자배기조 가락
.밀양 아리랑은 씩씩하고 정자소리조 가락
4.밀양 영남루(침류당, 능파당)
@“밀성대군”의 단전(밀양박씨 시조)
.신라 영남사의 종각(금벽루)
.농암대(籠巖臺) 용모습의 큰 바위들이 즐비하다
.1365 건립(공민왕), 1834(순조), 1844(헌종)이 재건했다
.남장대(장원루)는 전쟁본부~과거시험장, 일제시대 감옥으로 사용했다
.천진궁에는 단군신위, 시조(이성계, 백제, 부여, 신라, 고구려, 가야),
오아건, 발해태조(고왕)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5.사명대사의 충혼 사당
@스승 서산대사가 입적한후, 묘향산 보현사를 거쳐
.해인사에 홍제암을 짓고 열반(1610 광해군, 67세), 비문(허균의 글)
@재약산 표충비: 1742년(영조) “國亂을 예고하는 땀을 흘린다”
*東學革命~3.1운동~8.15광복~6.25사변~4.19의거~5.16혁명~
~10.26사태~12.12사태~IMF사태)...땀을 5말을 흘렸다
.829년(흥덕왕), 황면노독(黃面老禿:서역에서 온 노란얼굴 대머리 범승)
.마을 괴질에 샘을 가르켜 병이 나았는데, 기념으로 절을 세워다
.한편, 654년(진성여왕), 元曉大師가 창건한 죽림사가 전신이고,
.왕자의 난치병을 고친 영정약수에서 유래되어 재약산? 영정사?
.일연스님(고려, 삼국유사)이 1000명을 모아 수도하였고,
.四溟大師 사당(표충사, 고향/무안면)을 옮겨와 表忠寺라 불렀다
.목탁(직경1m)은 日本에 갔을때, 도쿠가와 이에야스한테 받았다
.효봉스님(일제시대 판사출신 고승~1966)은 표충사를 지켰다
@유정 四溟大師(임응규)
.1554년 출생(중종), 직지사에 입산하여 과거급제(선과, 중종)
.박순, 이산해, 고경명, 허봉, 이달...사림들과 학문을 교류하였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西山大師(휴정)에게 법통을 3년간 이어받는다
(묘향산, 금강산,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오대산, 옥천 동암...)
.1589년, 鄭汝立 역모사건(東人), 기축옥사에 강릉감옥에 갇혔으나,
유생, 승려들의 강력한 상소를 받아 석방되었다
@사명대사는 승병장으로 蔚山전투에서 승리한다(1597)
.西山大師는 묘향산에서 四溟大師에게 선조에게 상소토록 했다
“南漢山城을 보수하라(10만대군, 1년분 전투력 비축하라)”
.栗谷(8세 연상)은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10만명 양병설을 권유받는다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과 고령에서 평화회담(담판)을 하는데,
왜군은 1/2국토를 양분(왜국, 명나라)하고 항복을 권유하지만,
사명당(51세)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1604년, 일본에 건너가 강화조약으로 포로 3500명을 데려온다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방에 가두고 불을 때지만, 오이려 춥다면서
덜덜 떨면서 “어찌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느냐?” 호통을 쳤다
@선조에게 상소문
.관리는 백성을 자식처럼 대하고, 모두 단결해야 한다
.왜국과 외교를 강화하라(영원히 우방국이 될수없다)
.관리선발은 능력위주로 하고,
.국가 질서를 회복하고, 강화해야
.소를 키워라
.남한산성 보강하라
.산성(전쟁)을 준비하고, 전국 산성에 군비를 비축해라
.군인도 농사를 병행하고
.장수를 잘 뽑아야 한다
6.밀양의 자랑
@밀양까마귀 전설
.신임 밀양부사는 어린이가 까마귀(2마리)를 포획하자 살려 보내줬다
살인사건후 단서를 못찿아 헤메던중,
낙동강변에 까마귀가 길을 안내하여 시신을 찿아 해결하였다
그곳에 烏義亭(오의정)을 지었다
.고려말 “춘정 변계량” 관인문학가(변계량의 친구: 이색, 정도전, 권근)
.밀양 얼음골에서 허준(동의보감)은 시신(스승 유의태)을 해부했다
늘빛사랑 조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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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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