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0. 2020년도 종무식(성과분석회의)
懷尼是非(회니시비)와 계파싸움
懷尼是非(회니시비)와 계파싸움
1.歷史속의 라이벌 “우암 송시열(宋時烈) vs 명재 윤증(尹拯)”
@회니시비(懷尼是非)란 무엇인가?
.西人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그의 제자 윤증(尹拯)의 대립사건이다
.송시열은 회덕(懷德, 대전 동쪽마을)에 거주하였고,
.윤증은 이성(尼城, 논산 노성면)에 살았기 때문이다
@회니시비는 朱子學 도통주의에 입각하여 政局을 운영하려 했던 老論계
.이런 경직성을 비판하고 現實政治를 운영하고자 했던 小論계의 대립이
송시열과 윤증 간의 감정과 얽혀 일어난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훗날, 老論~小論은 경종~영조~정조까지 이어지며 격렬히 대립한다
.老論이 勝利하면서 老論일당의 전제 政治體制로 굳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정치지배 구조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을 지나고,
.朋黨政治는 세도정치가 등장한 조선말까지 이어진다
.붕당정치 주도권은 東人이었으나, 인조반정후 西人이 득세했다
.西人은 숙종초기 老論(송시열)과 小論(윤증)으로 분열되면서 100여년간 대립으로 강등이 진행된다
2.윤선거(尹宣擧, 윤증의 父親)의 묘갈명(墓碣銘)
@1669년(현종10), 윤선거가 죽었다
.어쨌든 송시열은 윤선거와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절교하지 않았다
.송시열은 제문을 보내왔는데,
.윤선거 비문 찬술과 윤증의 배사론(背師論)에서 감정이 폭발한것이다
.윤증은 남계 박세채가 지은 行狀과 자신이 작성한 연보를 송시열에게
주면며 父親(윤선거)의 墓碣名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父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비명을 지어 보냈다
.윤선거의 德을 기리는 구절에 “망연해 할 말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뒤,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我述不作)”고 마무리했다
@송시열은 박세채가 그 德을 行狀(행장)에서 모두 나타냈으므로,
“특별히 할 말이 없다”하여 윤선거의 행적만 간단히 정리했다
.윤증은 미진하다고 여겨 4~5년간 장문의 편지를 띄우거나,
직접 찿아가서 墓碣名을 수정하고, 개찬(改纂)하기를 청했으나,
송시열은 골자(요지)는 전혀 손대지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줬다
끝내 윤증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父親墓碑를 송시열이 정성을 들이지 않고 작성하여 감정대립이 비롯된다
@송시열이 윤선거의 墓碣名을 탐탁하지 않은 마음으로 지었던 이유는?
.윤선거의 과거행적과 朱子學에 대한 思想的 태도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1637년(인조15), 송시열은 丙子胡亂에 강화도를 수비하다가 城이 함락,
脫出하여 살아남았던 윤선거에 대해 大義名分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한 윤휴(尹鑴)에 대하여
友好的인 관계를 유지했던 윤선거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윤선거는 죽기 직전 송시열의 朱子學 일변도의 사상편향과
편협한 政局 운영을 비판하는 “기유의서(己酉擬書)”를 남겼다
.송시열과 윤선거 간의 이러한 감정 대립은 윤선거가 죽은후,
墓碣名 작성을 계기로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대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송시열은 윤증과의 관계를 끊고 적대시했다
.송시열을 주축으로 한 老論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小論이 형성되었다
3.왜 송시열과 윤증은 대립하는가?
@송시열은 丙子胡亂과 효종의 北伐計劃(청나라)이 탄로나는 바람에
.조정과 재야를 넘나들며, 20년 절친하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진다
.백호 윤휴의 경전해석 때문에 사건이 발단되었다
윤휴가 “중용”에 대해 집주를 달았는데,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이후,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예송논쟁(1차~2차)으로 극에 달했고,
.숙종6년, 윤휴는 “허적의 서자(허견) 모반”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윤선거(윤증 父親)는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존경하였다
오직 朱子學 절대 신봉의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시각이었다
.효종4년, 윤휴와 송시열의 입장차이가 드러나는데,
황산서원의 시회(詩會) 토론과정에서 윤휴~송시열의 논쟁은
윤증에게 이어져 西人을 老論~小論으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論爭을 통해 불거진 老論~小論 파당 불씨
.명재 윤증은 인조7년(1629) 출생~송시열이 22세 연상이다
父親(윤선거), 유계, 송준길, 송시열에게 수학하였으며
윤휴, 윤선도 南人계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양명학에 관심이 컸다
.송시열 문하에서 가장 뛰어나 수차례 관직 제의를 한사코 뿌리쳤다
@송시열의 주장(회니시비)
.송시열의 예송논쟁에 윤父子(윤선거~윤증)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감싸는 섭섭함에서 비롯되었다
.丙子胡亂에 강도(江都, 강화도) 수난과 탈출 사건을 언급하면서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친구들과 의병 모집후 城을 사수하기로 약속했다
친구(권순장, 김익겸, 이돈오)들은 城이 靑나라에 함락되던 날에 약속대로 죽었고, 윤선거의 妻도 자결했다
오직 윤선거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봉림대군 사신일행이 城에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로 위장하여 뒤돌아가는 사신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으로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윤선거~윤증의 주장은 다소 다르다
.윤선거 주장: 권순장, 김익겸은 南門을 지키던 김상용이 분신자살하자,
적과 싸우지도 않고 자결했으며, 妻는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한 것이다
미복으로 강도를 탈출한 건 교전은 이미 끝났을 뿐 아니라,
적에게 포위된 南漢山城으로 父親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양쪽 주장(송시열~윤증)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윤선거가 강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은 사실이다
.윤선거는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하지않고 재야에서 평생 자숙한다
.죽을때까지 강도의 굴욕이 그를 옭아맨 족쇄가 된것이다
@송시열이 제자(윤증)의 마음을 저버린 2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송시열은 옛정을 생각해 윤선거를 칭송하는 제문을 보냈는데도
자신(송시열)이 미워하던 윤휴의 제문을 윤증이 거절하지 않고 받은데서 무척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윤증이 비명을 요청하며 가져간 “기유의서(己酉疑書)”도 화근을 낳았다
윤선거가 죽기 4년전에 작성한 기유의서는 설령 윤휴~허목 등이
많은 잘못을 했을지라도 같은 士林이니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중용하는게 옳다며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증은 父親(윤선거)이 생전에 보내지 않았던 서신을 선의로 보여줬지만
이는 송시열의 비위를 더욱 건드린 격이 되고 말았다
@스승(송시열)과 제자(윤증)가 절교한 2가지 이유는?
.신유의서(辛酉疑書),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증오가 시작되었는데,
.숙종13년(1687, 경신환국 다음해), 윤증이 쓴 편지를 말한다
.편지내용(요약)
1)송시열의 학문은 그 根本이 朱子學이라고 하지만,
기질이 편벽돼 朱子가 말하는 實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2)송시열의 “尊明伐靑”은 말로만 方法을 내세울 뿐 實益이 없다
.윤증은 신유의서를 먼저 남계 박세채에게 보여줬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해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는데,
.송순석(송시열의 孫子~박세채의 사위)이 박세채 집에서 읽어본후
신유의서를 몰래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한것이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다
이후, 師弟간의 의절과 老論~小論 분당에도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스승(송시열)과 제자(윤증)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라섰다
.이후, 제자들도 老論~小論으로 첨예한 대립은 계속되었다
@회니시비는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是非로 이어졌다
.삼전도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이 지었다
.송시열은 숭명(崇明)의리에 입각해 이경석을 성토하고 나섰다
.윤증 중심의 小論은 어차피 君臣이 靑에 항복한 상황에서,
누구든지 그 碑文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했다
4.사상적 갈등으로 西人이 분열(老論~小論)
@송시열~윤증 두 사람간의 政治思想적 견해차는 매우 컸다
.송시열은 朱子學 理念(절대주의자)으로 大義名分을 중시하였으며,
西人중심의 정국을 운용한 政治哲學 “崇明反靑(숭명반청)”이었다
.윤증은 현실바탕 정치를 꿈꿔온 선비, 學文과 思想의 自由를 도모하였다
양명학을 인정하는 절충적 태도로 탄력있게 현실을 인식했다
.특히 경신대출척 이후, 윤증은 송시열이 전개한 편협하고도
비현실적인 정치에 크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신유의서(辛酉擬書, 1681년)”에서 송시열의 행동과 사상을 비판했다
송시열의 독선적인 朱子學과 숭명의리론(崇明義理論)의 허구를
호되게 비판하여 송시열의 理念과 行動이 결국 “허명(虛名)”이며, “이행(利行)”이라 했다
“西人~南人”간의 論爭과 “老論~小論”간의 마찰을 없애자는 의견을 장문으로 피력했다
5.우암 송시열은 누구인가?
@죽어서도 붓으로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천하를 휘어잡았다
.선조40년(1607),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출생하여
3세,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썼다고 한다
8세, 송이창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송준길을 만나며,
두 사람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로 지내게 된다
.김장생, 김집의 가르침을 받으며, 윤선거(윤증 父親)와 우정을 나눈다
@“가례원류”는 윤증의 스승(유계)이 김장생한테 배운 예학을 발전시킨 책
“가례원류”의 간행문제와 찬자 是非에서는 윤증의 배사론이 불거졌다
.집필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윤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떴다
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하였고,
사계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은후, 비로소 햇빛을 보는데,
권상하(송시열의 제자)는 윤증이 스승의 遺言을 저버리고,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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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돼지꿈을 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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